[AI가 방송하면, 아나운서는 뭐해? #02]
서울 토박이입니다.
3대가 덕을 쌓아야만 할 수 있다는 주말 부부를 했기에
금요일은 늘 마음이 급했습니다.
새벽부터 12시간 동안 이어진 여러 생방송들을 마치고
KTX를 타기 위해 급하게 길을 건너다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차에 치인 저는 공중에 꽤 높이 떴고,
다행이 어린 시절 후방 낙법을 배운 덕분에,
특유의 운동 신경으로 크게 다치지 않고 일어났습니다.
그래도 기본적인 검사는 해야 했기에
병원에서 가볍게 CT를 찍었습니다.
그리고는 바로 입원을 했습니다.
“MRI를 찍어봐야겠습니다. CT 상 뇌 안에 무언가가 보이네요. 종양으로 의심되는…”
종양?
의사 선생님의 뒷얘기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습니다.
누구보다 건강을 자신했기에 충격은 컸습니다.
처음으로 인식하게 된 ‘죽음, 그리고 마지막’ 이라는 단어.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습니다.
살고 싶었습니다.
살아야 했습니다.
두 달 후면,
사랑스러운 딸이 태어나는 상황이었습니다.
가족.
삶의 기준이 완전히 달라지는 순간.
다행이 MRI 결과는
혈관이 뭉쳐있는 ‘해면성 혈관종’이라는 진단.
저는 바로 퇴원을 했고
두 달 뒤, 아이가 나오면서 바로 육아휴직에 들어갔습니다.
가족과 더 이상 떨어져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한 인생의 기준이 생기는 순간이었습니다.
어제까지 화려한 조명 아래에서 방송을 하던 KBS 아나운서는
다음날부터 육아하는 아빠가 되었습니다.
하루하루가 치열했고, 소중했습니다.
방송을 하는 제 모습도 좋았지만,
사랑하는 가족과 24시간 함께하는 저의 모습도 좋았습니다.
하루에도 수백 번
행복을 느끼는 순간이 이어지던 어느 날,
문득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제가 느끼는 이 행복을
아이가 기억할 수 없다는 것이 말이죠.
그래서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나운서 시절부터
<파워 블로거 TOP 100>으로 선정된 블로그가 있었습니다.
일기처럼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영상을 찍고,
음악을 만들어서 올렸습니다.
윤슬이가 커서 사춘기가 되었을 때
‘아빠가 나한테 해준 게 뭐있어!’ 라고 말하면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빠짐없이 꼼꼼히 기록했습니다.
콘텐츠가 어느 정도 쌓일 무렵부터는,
여러 플랫폼에 나눠서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기록하고 담아둘 순간이 많았습니다.
영상은 유튜브에,
사진은 인스타그램에,
글은 브런치에,
음악은 사운드 클라우드에.
콘텐츠의 특성에 맞게 플랫폼을 구분해서 올렸습니다.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죠.
약은 약사에게 방송은 아나운서에게.
그런데, 그 당연함 덕분에 제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모든 것은 교통사고로부터 시작됐습니다
절대 거창한 이유가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철저하게 개인적인 이유로 선택한 육아휴직이었습니다.
개인, 그리고 가족의 행복을 위한 육아휴직.
하지만 제가 육아를 하는 사이 세상은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아빠 육아에 대한 관심이 커지게 된 것이죠.
육아하는 아빠들을 주목하면서 저에게도 관심을 가져주었습니다.
10년 간 아나운서로 방송하면서도 받아보지 못 한 관심이었습니다.
대한민국 아빠 육아의 대표 아이콘
KBS 최동석 선배님과 비슷한 시기에 육아휴직에 들어간 덕분에
선배, 후배 육아 대디로 함께 인터뷰를 하기도 했습니다.
정부 부처와 기업들은
아빠 육아에 대한 지원과 프로그램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의무적으로 아빠 육아 휴직을 시행하는 곳도 생겨났습니다.
그렇게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저는
‘라테파파(한 손엔 커피를, 한 손엔 유모차를 끄는 아빠를 가리키는 말로, 육아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아빠를 의미하는 신조어)’가 되어있었습니다.
그것은 10년 간 아나운서로 방송하면서도 받아보지 못 한 관심이었습니다
그렇게 세상에 변하면서
저에게도 많은 변화가 생겼습니다.
꽤 오래 전에 만들었던 콘텐츠들이
생명력을 얻기 시작했던 것이죠.
포털 메인에 제 글과 콘텐츠들이 뜨기 시작했고,
인터뷰 요청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관심이 많아지면서 다양한 제안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습니다.
저는 평소와 다름없이 딸과 육아를 하고 있을 뿐인데,
왜 이런 관심들이 오는 거지?
이유는 ‘플랫폼’과 ’콘텐츠’였습니다.
저만 보기 위해 일기장에 일기를 썼다면 ‘추억’으로 남았을 겁니다.
하지만 이게 콘텐츠가 되니 다르더군요.
특히 콘텐츠 자체는 제가 만든 것이었지만,
어울리는 플랫폼을 만나니
날개를 달고 날아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댓글과 관심, 공유와 주목을 통해 생명력을 얻고,
내가 만들 당시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진화되기도 하더군요.
어느 날 ‘왜 상금을 받아가지 않느냐’ 며 전화가 왔습니다.
모르는 번호라 받지 않았을 뿐인데
브런치에서 주최하는 <작가상>에서 ‘금상’을 받았다는 얘기였습니다.
그저 우리 가족을 위한 글이었지만,
그로 인해 많은 분들이 공감하고 좋아해주셨습니다.
작가상을 받았다는 사실을 모를 정도로 신경을 못 썼는데,
콘텐츠라는 저의 ‘자식’은 알아서 잘 크고 있었습니다.
덕분에 콘텐츠는 출판으로 이어졌습니다.
유명하지 않은 아나운서였던 저에게
아나운서일 때보다 더 많은 관심을 받게 해준 녀석.
저는 과분하게도 아나운서 외에 ‘작가’라는 직업을 얻게 되었습니다.
저는 에세이의 제목을 <라테파파>로 지었습니다.
저만 보기 위해 일기장에 일기를 썼다면 ‘추억’으로 남았을 겁니다.
하지만 이게 콘텐츠가 되니 다르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