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별 아나운서의 KBS 퇴사 일기 #08]
‘균형과 중립’
아나운서의 덕목을 물으면 저는 꼭 이 두 가지를 말합니다.
다양한 의견과 이야기가 존재하는 가운데
아나운서는 모두의 의견을 아우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더 의식적으로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저도 뉴스를 진행할 때 어떤 의견이 있었지만
뉴스를 전달할 때에는 양쪽 의견 모두를 담았습니다
저도 찬, 반이 있었지만
토론을 진행할 때는 양쪽 의견 모두를 들으려고 했습니다
저에게도 선거 때에는 선택하는 정당과 정치인이 있었지만
개표 방송에서는 표정을 숨겼습니다
저에게도 응원하는 팀이 있었지만
스포츠 중계를 할 때는 중립이었습니다
(아, 물론 국가대표 경기는 예외입니다.
그래서 스포츠 캐스터들은 마음껏 편파중계(?)를 할 수 있는
국가대표 경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저에게는 취향이라는 게 따로 없었습니다
아니, 있었는데 감췄다는 표현이 맞을 수도 있겠네요
물론 방송을 하면서
의식적으로 반대쪽도 이해하고 바라보다 보니
수용의 폭이 넓어진 탓도 있습니다
그렇게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믿음으로
넓은 스펙트럼의 아나운서라는 덕목으로 보람을 느끼던 저였습니다
방송을 하면서
의식적으로 반대쪽도 이해하고 바라보다 보니
수용의 폭이 넓어진 탓도 있습니다
"난 이게 좋아 오빠”
아내의 취향은 확고했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많이 놀랐어요
‘내가 좋아하는 것을 이렇게 얘기해도 되는구나’
제가 확고하면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취향을 표현하면
선택받지 못한 다른 취향의 존재에게 불공평한 거라 생각했습니다
저는 방송을 떠나서도 ‘김한별’이 아닌 ‘아나운서’로 살고 있었나 봅니다
아내는 확실한 취향 안에서 좋아하는 것도 명확했고,
그랬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말하는 데도 주저함이 없었으며
무엇보다 더 행복해 보였습니다
나 자신이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는지를 명확하게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행복버튼’
아내는 늘 행복할 준비가 되어있었습니다
저처럼 선택받지 못한 반대편의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내 행복에 있어서 만큼은 타협이나 양보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전 아내가 부러웠습니다
자신의 ‘행복 버튼’을 명확하게 알고 있는 아내가 부러웠습니다
"난 이게 좋아 오빠”
아내의 취향은 확고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저도 찾게 됐습니다
조심스럽지만 분명 나에게도
그 행복 버튼이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나는 어떨 때 행복하지?’
네, 저에게도 행복 버튼이 있었습니다
알게 모르게 보여지는 취향이 있었습니다
개별적으로는 몰랐지만, 모아놓고 보니 보이더군요
그것은 바로 ‘레코드, 음반’이었습니다
이름, 아티스트, 장르 순으로 빼곡히 모인 1만 장의 음반들
중학생 때부터 급식비를 아껴가며 모은 CD, LP, TAPE
서현역의 레코드점 ‘라르고’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하루 종일 듣고, 정리하고, 모으던 그 음반들
그 레코드들을 보고 있으니, 제 취향이 보였습니다
지금은 집에 다 두지 못하고
개인 창고까지 운영하며 보관중인 보물들
언젠가 꿈을 꿔봅니다
아내와 함께 운영하는 '심리카페'
음악과 커피를 좋아하는 저는
한 쪽에서 음악과 커피, 대화로 누군가를 위로합니다
임상심리전문가인 아내는
다른 쪽에서 누군가를 상담하며 위로를 나눕니다
레코드는 저에게 취향을 넘어 언젠가의 꿈입니다
다시, 음악MC를 꿈꾸는 저에게는 가슴 설레는 희망입니다
그래서 더 반가웠습니다
나도 취향이라는 것이 있구나
취향을 가져도 되는 거구나
취향을 드러내도 되는 거구나
원래 없던 것이 아니었는데
원래도 나는 가지고 있었고
심지어 너무나도 아끼며 좋아하고 있었는데
참 신기하게도 아나운서를 내려놓으니
비로소 보였습니다
내 이야기. 내 생각, 취향.
없었던 것이 아니라 감추고 있던 것이죠
나에게 조금 더 친절하고 관심 가졌다면
충분히 발견할 수 있었을 텐데
그만큼 ‘KBS’ 그리고 ‘아나운서’라는 옷은
저에게 많이 무거웠나 봅니다
나를 든든하게 지켜주는 갑옷이었는데
나를 가리고,
심지어 내가 누군지 잊게 만드는 ‘갑옷’이었나 봅니다
나에게는 너무나 무거운 옷이었나 봅니다
지금 저는 그 갑옷을 벗고 있습니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어렵게 선택받아서 입을 수 있었던,
어떠한 화살도 잘 막아내던 '갑옷'을 스스로 벗는 중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더 이상 사람들은 ‘화살’로 싸우지 않더라고요
화살을 막아낼 필요가 없으니,
무거운 갑옷은 벗어버리고 새로운 옷을 입으려고 합니다
그 과정에서
잊고 있었던 제 체형도, 취향도 발견하게 되네요
몰랐던 것들, 잊고 있었던 것들을 많이 발견하는 요즘입니다
호불호 그리고 취향이 명확한 사람들은
행복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행복에도 노력이 필요하더군요
지금 저는 레코드에서만 발견되지만
나에게 더 친절하고, 조금 더 깊게 관찰하다 보면,
나랑 더 친해지다 보면 더 많이 찾게 되겠죠
그런 의미에서 확실한 나의 ‘행복버튼'
지금 꼭 듣고 싶은 레코드 한 장을 턴테이블에 걸어
기꺼이 불편함을 감수하며 음악을 들어봅니다
저는 음악 한 곡을 소중하게 듣기 위해,
열고, 꺼내고, 닦고, 걸고, 만지며, 기다리는 과정도
음악의 과정이라고 여기는 사람이더군요
그것이 바로, 저의 취향이더군요
호불호 그리고 취향이 명확한 사람들은
행복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행복에도 노력이 필요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