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좋아하는 마음만 있다면
올여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과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늦은 휴가를 보냈다. 9박 10일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미술관 방문을 중심으로 스케줄을 빼곡히 채워 보았다. 당시 상반기 옥션에 출마했던 작품들이 거의 판매되고 새로운 작품들에 대해 고민하고 있던 시기였기에 여행을 마음 편히 즐기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고흐, 렘브란트 등 유명한 화가들이 가장 많이 배출된 네덜란드에서의 여행은 정말 흥미롭고 특별했다. 반 고흐 미술관과 렘브란트 뮤지엄, 암스테르담 국립 미술관에서 명작들을 만나며 회화작품의 매력에 흠뻑 빠져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술품 시장에서 그림을 판매할 기회가 쉽게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 나는 참 운이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내 그림의 가치를 높이 평가해 주신 담당자분께도, 아직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나의 작품을 셀렉해 주신 아트 컬렉터분께도 정말 감사할 따름이다. 사실 처음에 난 오일 파스텔 작가가 되기 위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던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항상 그림을 그리기는 했지만 정식 작가가 되겠다고 꿈꾸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입시 때부터 그림에 대한 고민이 있을 때면 나의 그림 선생님을 찾아 자문을 구하고는 했는데, 작년 5월 스승의 날 선생님께서 운영하고 계신 화실에 방문한 것이 전환점이 되었다.
당시 나는 소소하게 문구류 브랜드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었는데, 아기자기한 일러스트를 직접 그려 넣고 인쇄한 제품들을 여러 온라인 사이트를 통해 판매하곤 했다. 좋아하는 마음만으로 시작한 지 어느덧 7년이 되어가고 있었지만, 브랜드를 홀로 운영하는 데 대한 많은 고민과 어려움이 있던 상황이었다. 가벼운 이야기로 시작해 대화를 나누다 그동안 꾸준히 해왔던 작업들을 선생님께 보여드렸는데, 작품이 너무 좋다며 작가를 하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일이라 처음에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마냥 싫지만은 않았는지 나는 하던 일을 잠시 미뤄두고 그림 그리는 것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저 재미있고 내가 좋아하는 일이었기에 시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수험생 시절을 돌아보면 친구들이 왜 미대에 가고 싶냐고 물어보았을 때 그냥 그림 그리고 싶어서라고 대답하곤 했는데, 현실을 너무 모르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를 듣기 일쑤였다. 이제는 현실 속에 자리하는 내 삶 속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니 마치 그때의 나를 만난 것 같아 벅차고 설레기만 했다. 좋아하는 일을 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모른 채 어느새 8개월의 시간이 흘러갔고, 작품이라고 할 만한 그림들이 차곡차곡 쌓여가는 듯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내 그림을 평가받는 것이 내키지는 않았지만 선생님께서 주최하시는 단체전에 참여도 하게 되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여러 가지 일들이 다가왔다. 대형 갤러리에 100점 이상의 작품이 전시되었는데, 판매된 작품 총 4점 중 2점이 내 그림이었다. 예상치 못했던 일이라 신기하기도 하고 무척 기쁘기도 했다. 얼마 후 옥션으로부터 제안을 받아 전시했던 그림 6점을 출품하게 되었고, 감사하게도 적잖이 판매가 되었다.
이 글을 읽다 보면 ‘원래부터 재능이 있었겠지.’, ‘어렸을 때부터 배우기 시작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년시절의 나는 특별한 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평범한 아이였다. 여섯 살 때에 남들처럼 미술학원에 다닌 적은 있지만 그마저도 잠시였고, 스무 살이 되던 해에 성적에 맞춰 경영학과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1학년 1학기를 보내고 나니 학과 공부가 나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고,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우연히 길에서 중학교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셨던 미술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내가 미대에 갈 줄 알았는데 의외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는 미술을 따로 배운 적은 없었지만 누구보다 미술에 진심으로 다가갔던 아이였다. 다른 과목 숙제는 하루 전날 하더라도 미술 숙제만큼은 오랜 시간 공을 들였었고, 선생님께서는 나를 좋게 기억해 주셨던 것 같다.
선생님과의 만남 이후로 내 마음속에는 깊은 여운이 남았다. 잊고 있던 내 관심사를 떠올리며 미술대학에 가보기로 마음먹었다. 휴학 신청을 하고 무작정 입시 미술학원에 등록했고, 그렇게 20대의 절반 동안은 그림을 새로 배우는데 시간을 쏟았던 것 같다. 하지만 예중, 예고 출신 친구들 사이에서 입시의 문턱을 넘는다는 것이 쉽지 않았고, 다시 학교로 돌아와 서양화과에 복수전공 신청서를 내고 합격했다. 그 당시 나는 상심이 매우 컸다. 주변에서는 학위가 두 개가 있는 것이 더 비전 있지 않냐며 위로했지만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한 것에 대한 좌절 때문에 자존감이 바닥에 내려앉은 기분이었다. 현실을 탓하기도 해 봤지만 내 실력을 더 갈고닦으라는 뜻이라고 생각하며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세상을 탓하기보다 세상을 내 편으로 만드는 것이 좋겠다는 마음으로 매일 그림을 그렸다.
이러한 수련의 과정을 겪으면서 그림 그리기에 대한 나만의 노하우를 터득하게 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꾸준히 그림을 그린 친구들은 자연스럽게 체득되어 어떻게 잘 그리게 되었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지만, 나는 막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막연한 사람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공감할 수 있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얻은 것들을 토대로 그림을 좋아하지만 선뜻 시작하기 어려워하는 많은 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고 싶은 마음이다. 작가를 꿈꾸는 비전공자들과 그림이 마냥 좋아 그리기 시작한 어린아이들까지 누구나 그림 그리기에 도전할 수 있다. 나는 학창 시절 특별한 재능이 있어 주목을 받던 아이도 아니었고 입시학원에서 눈에 띄는 실력자도 아니었다. 좋아하는 마음과 스스로에 대한 확신만으로 용감하게 도전했을 뿐이다. 아직 세상은 열려있고 기회는 준비된 자를 위해 기다리고 있다. 내 안에 숨겨놓았던 열정을 꺼내 지금 시작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