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의 꿈 | 데니스 존슨

by Erica


모든 것을 잃은 겨울 뒤에도


다시 한 발 내디디며 살아내는 인간의 삶



모두가 죽어버린 땅에
벌써 새싹과 꽃이 지천으로 올라와 있는
광경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EA%B8%B0%EC%B0%A8%EC%9D%98_%EA%BF%88.jpg?type=w773




서점에서 우연히 마주친 책 한 권이 발걸음을 붙잡는 순간이 있다. 수많은 책들 사이에서 나를 멈추게 하는 건 결국 제목과 표지가 건네는 첫인상이다.


데니스 존슨의 『기차의 꿈』은 꽤 밝은 컬러를 사용했음에도, 그 이면에서 배어 나오는 묘한 슬픔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화사함 속에 숨겨진 고요한 슬픔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 표지가 품고 있는 그 긴 침묵의 이유가 궁금해져, 홀린 듯 책장을 넘겼다.




간단 줄거리


20세기 초 미국 서부 개척 시대를 배경으로, 거대한 역사적 변혁 속에서 지독한 개인적 비극을 견뎌낸 철도 노동자 로버트 그레인의 일생 이야기이다. 어느 날 갑작스러운 대화재로 사랑하는 아내와 딸, 그리고 보금자리를 한순간에 잃은 그는 절망하여 무너지는 대신, 비극이 휩쓸고 간 잿더미 위에 다시 오두막을 짓고 평생을 홀로 살아간다.




책 속으로


이틀 뒤 그는 옛집, 아니 이제는 새 집이 된 그곳에 돌아와 그동안 일을 하느라고 미처보지 못한 광경을 비로소 보았다. 봄기운이 완연해져서 밝은 햇빛과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져 있고, 모이 계곡에는 검게 탄 산을 배경으로 초록색 풀이 아주 많이 돋아 있었다. 주위의 땅이 치유되는 중이었다. 불탄 자리에서 나는 잡초들과 방크스소나무가 허벅지 높이까지 자랐고, 소나무 꽃가루가 살짝 겨자색을 띠는 안개처럼 바람에 실려 계곡을 떠다녔다. 만약 그가 새로 돋아난 이 식물들을 뽑아버리지 않는다면, 공터가 숲으로 변해버릴 것 같았다.


봄에는 모든 것을 잃은 사람들 몇 명이 가족과 함께 돌아와 모이 계곡에서 다시 시작해 보려고 했다. 그레이니어는 미처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다가, 5월에 강가에서 야영하면서 잒시질로 무지개송어를 잡고, 캐나다인들이 모렐이라고 부르는 아주 향기롭고 희귀한 버섯을 찾아다녔다. 불길이 휩쓸고 간 땅에서 솟아나는 버섯이었다. 여러 날 동안 북쪽으로 나아가던 그레이니어는 옛 집에서 소리를 지르면 들릴 만한 거리까지 온 것을 깨닫고 자신과 글래디스가 물가를 오갈 때 항상 이용하던 골짜기를 올라갔다. 모두가 죽어버린 땅에 벌써 새싹과 꽃이 지천으로 올라와 있는 광경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책장을 덮으며


"모든 것을 잃은 겨울 뒤에도,

다시 한 발 내디디며 살아내는 인간의 삶"


로버트 그레인의 삶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평생을 고독과 노동 속에서 늙어간 그의 뒷모습은 어쩌면 쓸쓸해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책장을 덮는 순간 마음엔 연민보다 경외심이 먼저 남았다.


그는 모든 게 타버린 잿더미 위에 다시 오두막을 지었다. 아내와 딸이 사라진 영원한 겨울 속에서도 매일 아침 도끼날을 세우며 숲으로 향했다. 그에게 노동은 단순히 먹고살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무너진 마음을 지탱하는 가장 정직한 '치유의 의식'이었을 것이다. 비명이 터져 나올 것 같은 고독의 순간마다 묵묵히 나무를 베고 길을 닦으며 제 존재를 증명해 낸 셈이다.


우리 삶에도 예고 없이 불길이 들이닥칠 때가 있다. 공들여 키운 꿈이 재가 되고, 소중한 것들이 끊어지는 폐허의 시간들. 그때 이 책이 보여준 '숭고한 반복'을 떠올려본다.


대단한 성공이 없어도 괜찮다.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하루를 시작하고,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해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잘 살고 있는거라 생각한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행복한 남자 | 서머싯 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