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들의 신앙

by 해원

일곱 살 콩이는 심장병을 앓고 있다. 의사는 아이의 심장에 멈추지 않는 옹달샘처럼 물이 고인다고 했다. 그 물이 차오르면 아이는 숨을 헐떡이며 발작을 일으킨다. 약제보조학을 공부할 때 익혔던 CPR 시술로 아이의 꺼져가는 숨을 되살려낼 때마다, 나는 이 작은 생명줄이 내 손에 있기라도 한 것 같은 중압감을 느낀다. 실상 내가 배운 지식이나 상식은 그 아이의 생사에 미미한 영향도 못 미치는 데 말이다.


평생 약을 먹어야 한다는 선고를 받고 약을 먹인 그 날, 콩이는 거실 바닥에 배변 실수를 했다. 난생 처음이었던 실수에 아이도 나도 당황했다. 축축하게 젖은 아이를 안고 ‘괜찮아. 괜찮아질 거야.’ 라며 울먹이는 내 뺨을 아이가 핥아주었다. ‘엄마가 있으니 괜찮아요.’라고 대답하는 것 같았다. 존재는 있어도 능력은 없는 나를 콩이는 그렇게 위로해 주었다.


사실을 고백하자면, 콩이가 아프기 전 나는 이 녀석들을 다른 집에 보낼 생각을 했었다. 길 위에서의 자유를 사랑하는 내게, 차 멀미가 극심한 두 녀석은 자동차 여행의 발목을 잡는 무거운 족쇄가 되는 때문이었다.

하지만 콩이는 내게 목숨을 건 저항이라도 하듯, 다른 집으로 떠나기 며칠 전 죽을 것처럼 아프기 시작했다. 그 지독한 병증은 나를 두려움과 죄의식의 올가미로 강하게 결박했다. 녀석은 나를 떠나지 않기 위해 나의 자유에 제 생명을 던진 것이라 생각되었다. 스스로 아픔을 선택함으로써, 구세주라고 믿는 나의 품속에 영원히 머물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그 때의 일은 지금도 아이에 대한 미안함으로 가슴을 후비지만, 콩이는 그 죄책감 마저도 사랑의 이름으로 핥아 주었다.


내가 외출을 하면 콩이는 그 길을 응시하며 한없이 기다린다. 잠시동안의 부재에도 영겁의 기다림처럼 법석을 떨며 반겨준다. 나는 그게 콩이의 기도라고 믿는다. 나를 유일신으로 여기는 아이의 간절한 기도로 받아들인다.

어느 날, 지인에게 녀석들을 맡기고 나들이를 한 적이 있었다. 좀 늦은 시각에 귀가했을 때 둘은 나란히 현관문 앞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종일 아무 일 없이 잘 놀았다는 지인의 얘기였다.

신기하게도 콩이는 내가 대처할 수 있는 상황에서만 발작을 일으켰다. 어떻게 그걸 통제할 수 있는지, 내가 없으면 절대로 발작을 일으키지 않는 게 참으로 놀라웠다.


그날 한밤중, 내 목덜미에 기대 잠들었던 작은 몸이 바둥거리면서 컥컥 숨 넘어가는 소리로 나를 깨웠다. 습관처럼 콩이의 심장 부위를 마사지하며 인공호흡을 했다. 그러나 그날 따라 발작은 좀처럼 멎지 않았고 몸이 뻣뻣하게 굳어갔다. 내가 응급처치를 중단하는 즉시 실오라기 같은 숨 줄이 끊어져 버릴 것 같았다.

내가 불어넣는 숨을 통해 간신히 호흡을 이어가며 작은 생명체는 몹시 고통스러워했다. 내 혼을 불어넣듯 온 맘으로 인공호흡을 하면서도, 이게 끝이구나 느껴져 작별인사를 했다. ‘그래, 이렇게 고통스럽기보다는 편안히 잠드는 게 낫겠다. 너를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제발, 건강하게 다시 태어나 씩씩하게 살 수 있는 천국이 너에게도 허락되기를 기도하마.’

아이를 보듬어 안고 얼마나 울었을까, 눈물을 닦아주는 촉촉한 혓바닥이 한쪽 뺨에 느껴졌다.

내 눈물에 뒷덜미를 잡혀 돌아온 걸까? 콩이는 내 뺨을 알뜰하게 닦아냈다.


내가 없던 그 낮에 아이는 종일 경련과 싸웠을 것이다. 아직은 엄마를 떠나지 않겠다고, 엄마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죽을 힘을 다 해 견뎠을 것이다. 그 놀라운 통제력은 나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사랑의 힘이었으리라. 죽음의 문턱에서도 나를 놓지 않겠다는 처절한 매달림의 힘이 아니면 어찌 살아 남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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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두 번씩, 평생을 먹어야 한다는 약: 청진기와 체온계도 구비해 둔다

콩이의 사투를 보면서 나는 예전에 키웠던 차돌이의 기억을 떠 올리곤 했다. 내 품에서 서서히 식어가던 작은 몸의 감촉이 지금도 생생하게 되살아 난다. 내 가슴에 머리를 박고 죽어가면서 그 아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믿고 의지했던 나의 무기력함에 배신감을 느끼며 절망했을까?

그러나 그건 아닐 것이라 믿고 싶다. 병원에서 마지막 호흡을 놓던 순간까지도 아이는 내게만 매달리지 않았던가. 죽음의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아이는 끝내 나를 밀어내지 않고 파고 들지 않았던가. 그걸 생각하면 또 눈물이 솟고 가슴속의 저릿함이 온몸으로 번진다.


아이들의 죽음과 투병을 통해 내가 얻은 한 가지가 있었다. 죽어가는 나를 바라보는 하나님의 마음은 이 보다 더 아플 것이라는 깨달음이었다. 내 영혼이 죽어갈 때, 그것을 지켜보는 내 아버지의 고통은 바닥 없이 깊은 절망의 늪이라는 것을 작은 아이들은 제 크나큰 아픔들로 가르쳐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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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이는 요즘 건강을 되찾는 것같아 약을 조금씩 줄이고 있다. 기적이다. 그러나 활력이 더해갈수록 나를 독점하려 하고, 내가 보이는 곳에만 있으려는 앙탈도 더해간다. 다른 강쥐들이 내게 접근하면 아르르!! 성깔을 부린다.

나는 콩이의 종교다. 요구가 배제된, 엄마라는 존재 자체가 그 아이의 신앙이다. 그 애가 나를 독점하려는 것은 제 생명줄을 남에게 내어줄 수 없다는 처절한 생존 본능일 수도 있겠다.


반면 나는 나의 예수님을 최대한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며 그 사랑의 깊이를 넓히고 싶어 한다. 콩이와 나의 신앙은 이 대목에서 결을 달리 하지만, 내가 나의 신 앞에서 그 애보다 나은 피조물이라 감히 말할 수가 없다. 콩이는 제 생명을 걸고 제가 믿는 신을 지키고자 하는 것인데, 나는 나의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건 싸움을 해 본 기억이 없다. 그 분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린 적이 없다.


지금도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아 있고, 내 발치에 몸을 붙이고 잠든 콩이의 세상은 안도와 평화로 충만하다. 그러나 내가 주방에 커피를 가지러 가는 순간에도 반짝 뜬 아이의 시선은 질기게 나를 좇는다. 잠시 보이지 않는 그 동안에도 아이는 눈을 뜨고 내가 빨리 오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한다.

예수님도 지금 나와 함께 컴퓨터 앞에 계신다. 그러나 내가 그 분 발치에 기댄것이 아니라 그 분이 내 온몸을 감싸안고 기도 하신다. 악의 길로 내딛지 말라시며 간절하고 질긴 사랑으로 내 영혼을 싸맨다.


기도는 절대적인 믿음이고, 그 믿음은 생명과 직결되어 있다는 것을 나는 아픈 콩이를 통해서 또 배우는 것 같다. 가끔은 나도 눈을 감는 대신 똑바로 뜬 두 눈으로 나의 예수님을 응시해야겠다. 말의 성찬과 요구가 아닌, 온전한 신뢰와 감사로만 채워진 기도를 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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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 부엉 .jpg
기다림.jpg
마냥 이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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