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없애야 보시가 가능한가?
불교 전생담에 등장하는 한 장면은 충격적이다. 전생의 보살은 굶주린 암호랑와 두마리의 세끼 호랑이를 만난다. 기력이 다해 새끼조차 먹이지 못하는 어미를 본 그는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리고 그 피로 호랑이를 유인한 뒤 스스로 낭떠러지 아래로 몸을 던진다. 그는 죽고 다음 생에 석가모니로 태어난다. 이야기는 간결하다. 생명을 건네는 자와 그것을 받아먹는 암호랑이. 그러나 그 장면은 단지 자비심의 상징으로만 남지 않는다. 너무 극단적이라 오히려 거리를 두게 만들고, 신체를 던진다는 이 비유가 과연 윤리적인가 하는 의문까지도 떠오르게 한다. 이 이야기는 정말로 보시를 위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자아에 대한 어떤 깨달음의 방식이었을까?
보시(布施)는 불교에서 수행의 첫 단계로 자리하지만 그 의미는 일반적인 나눔과 다르다. 보시는 물질을 주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모든 것에 대한 소유의 감각을 내려놓는 일이다. 특히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는 베푸는 자체에 대한 의식마저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어떤 목적도 대상도 의도도 없는 보시는 곧 자아에 대한 집착이 사라졌을 때만 가능하다. 이때 신체를 보시한다는 전생담은 단지 극단적인 헌신이 아니라 '나'라는 감각을 벗어나는 방식으로 상징한다. 이야기는 육체를 던진 행위가 아니라 자기를 내려놓은 상태를 가리킨다.
막상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몸이 사라졌다고 해서 존재가 지워지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사람은 신체만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이야기와 기억, 관계와 책임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이어진다. 누군가의 말속에, 누군가의 표정 안에, 우리는 다시 떠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불교는 자아에 대해 다르게 말한다. 나라는 것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조건 지어진 환상이라는 것이다. 연기(緣起)는 모든 존재가 상호 의존 속에 있다는 사유를 바탕으로 한다. 따라서 자아란 지킬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잠시 머물다 흩어지는 감각일 뿐이다. 그런 감각을 지키려 애쓰는 것이 고통이고, 내려놓을 수 있다면 그것이 자유에 가깝다.
불교는 무아를 말하면서도 나를 준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사실 이부분이 조금 보순적이기도 하다. 불교에서는 그것에 대한 사유를 요구한다. 존재가 없다는 말과 존재를 바친다는 말은 모순처럼 보이지만 실은 같은 자리에 선다. 나라는 것이 본래 없었음을 깨달은 자만이 그것을 내려놓을 수 있다. 그래서 보살은 몸을 던진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나의 것이라는 집착을 끊은 것이다. 무소유는 비움이 아니라 해체에 가깝고 해체는 존재의 소멸이 아니라 관계의 재구성이다. 그가 던진 것은 생명이 아니라 ‘나’라는 상념이다. 이 이야기가 주는 충격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죽음의 결정이 아니라 실체 없는 나에 대한 사유와 그에 따른 선택이다.
우리는 여전히 ‘나’를 갖고 살아간다. 이름과 역할, 책임과 가족, 소유와 감정이라는 구체적인 관계 속에서 자아는 유지되고 재생된다. 나는 무엇이고, 무엇을 소유하며, 무엇에 의미를 부여하는가라는 질문은 철학 이전에 사회의 구조이다. 그 구조 안에서 불교의 무아는 모든 것을 버리라는 가르침이라기보다는 내가 쥐고 있는 것이 정말 나인지 묻는 물음에 가깝다. 그래서 보시는 단지 주는 것이 아니라 되묻는 것이다. 이것이 내 것인가?, 나는 왜 이걸 놓지 못하는가?, 나는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가? 그 질문은 도피가 아니라 성찰의 방식이다. 자리를 양보하고, 감정을 접고, 말을 멈추는 일상적 보시는 실은 자기 해체의 사소한 연습일지 모른다. 그 연습이 쌓여 관계는 부드러워지고 고통은 줄어들며 마음은 단단해 질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여전히 나를 지키고 살아간다. 관계 속에서 생긴 역할, 책임, 이름, 소유, 그리고 그것이 나라고 믿는 감정들까지 말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조심스럽게 관리하며 하루를 산다. 이 모든 것은 없어질 수 있다. 사라지는 것은 무상하다고 부르지만 사실 우리는 그것들이 사라질까 봐 두려워하며 살아간다.
불교는 말한다. 자아란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모든 것은 조건 지어진 인연의 결과다. 내가 가진 것도 내가 이룬 것도 단 하나의 독립된 중심 없이 관계 속에 생겨난 환상일 수 있다. 그래서 진짜로 준다는 것은,그것이 내 것이 아니라고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리고 보시는 그 인정에서 출발한다.
현대의 보시는 몸을 던지는 일이 아니다. 내가 꼭 쥐고 있던 것을 내려놓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을 구하기 위함이 아닌 나를 묶고 있던 감정과 허상을 끊어내기 위한 아주 근소하게 다가가는 해탈이다. 그렇게 우리는 불교에서 말하는 보시를 통해 ‘무엇을 줄 것인가?’보다 ‘무엇을 놓을 것인가?’를 알아가게 된다. 그러다 결국 ‘나’라는 인식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라는 질문 앞에 서게 될것이다. 그것이 불교가 말하는 보시의 철학이고, 우리가 여전히 배워야 할 성찰의 언어다.
*덧붙임
저는 가톨릭 신자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통해 내가 들여다본 것은 신앙에 대한 혜석이 아니라 인간은 끝내 무엇을 내려놓을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하다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