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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꿈 Jul 30. 2021

3화. 마을 장승제

그해 여름 못다 한 이야기



외지인들이 마을로 들어올 때 나루터 상류 물길이 돌아 나오는 모래톱을 지나면 큰 느티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서 마을 장승제가 열렸다.


멀리서 바라보면 아름드리 자란 느티나무는 마치 지붕처럼 마을 어귀를 차지하고 있었다. 지나는 사람들에게 그늘을 만들어주기도 하고, 그 밑에 놓인 평상은 한여름이면 마을 노인들의 휴식처가 되어주었다. 어른들은 거기에 장기판이나 윷놀이판 같은 것을 둬 소일거리가 없는 날엔 더위를 피하며 시간을 보기도 했다. 한여름철에는 주로 장기판을 많이 사용했으며 날씨가 선선해지면 멍석이나 덕석에 윷판을 그려놓고 윷놀이를 즐기기도 했다. 아이들은 어깨너머로 배운 장기로 어른들과 장기 대결을 펼치기도 했다. 흥미를 끌었던 것은 단이와 어른들이 장기 대결을 하는 이었다. 아이들과 구경하는 어른들은 누가 이길지 내기를 걸기도 했다. 내기 장기를 둘 때는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이 괜한 참견이나 훈수를 하면 큰일이 났다. 대결이 끝날 때까지 장기 수를 읽으며 조용히 지켜보거나 승부와 관련 없는 말만 해야 했다. 장기 두는 사람 중에 한쪽이

"장군이요!" 하면 다른 쪽에서 

"멍군이요!" 하고 바로 응수했다. 아이들은 서로 주고받는 '장군이요 멍군이요'와 같은 말에 추임새를 넣듯이 장단을 맞추기도 하고 같은 말을 따라서 반복하며 재미를 더하기도 했다.


단은 장기 대결에서 어른들을 가볍게 물리치고 아이들이 내기에서 이기도록 해주었다. 장기에 진 어른들은 멋쩍게 웃으며

"야, 단이 장기 실력 대단한데."라고 하며 대견스러워하기도 하고, 또 옆에 있던 노인은

"단이는 학교에서 공부도 그렇게 잘한다며."라고 치켜세워 주기도 했다. 그러면 아이들은

"축구도 잘해서 시합이 있으면 다들 단이랑 같은 편 먹으려고 줄을 서요."라고 하며 맞장구를 치기도 했다. 장기 대결이 끝나고 어른들이 막걸리나 주전부리 같은 것을 시켜 먹기라도 하면 아이들은 꼽사리 끼어 하얀 거품이 올라오는 사이다 같은 음료를 얻어 마시기도 했다. 그 맛은 꿀맛이었다. 사발에 따라 준 사이다를 흘리지 않고 마신 후 쪽쪽 핥아먹는 모습이  때는 굶은 개구쟁이들 같았다. 그런 자잘한 일들이 느티나무 밑에서 이루어졌고 언제나 훈훈하고 정겨운 추억을 아이들에게 심어주었다.


마을 수호신 같은 느티나무 옆에는 마을을 지키 키 큰 장군처럼 장승이 서 있었다. 한 쌍의 나무 장승에는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이라는 글이 각각 새겨져 있었다.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보아온 조금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무섭기도 한 장승은 마을을 표시하는 기둥으로 알고 자라왔다. 장승이 서 있는 곳에서 조금 뒤쪽으로 가면 돌무더기로 돌탑을 쌓은 것도 보였다. 산과 강과 바다가 접한 곳에 있는 모래톱 마을에는 예부터 자연의 영향 아래에 놓여 있어서 미신이나 신앙심에 의존하며 살아온 흔적들이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장승제는 장승에게 지내는 마을제의 하나였다. 어떤 마을에는 장승뿐만 아니라 솟대를 세워놓은 곳도 있었다. 미신으로 가느다란 나무 위에 새를 깎아 앉힌 솟대를 만들어서 동네 입구에 장승과 함께 세워 잡귀를 물리쳤다. 흔히 장승들은 길가 쪽에는 천하대장군을 세우고 안쪽으로 지하여장군을 세워 서로 눈을 마주 보게 했다. 마을에는 당산의 산신제와 같이 엄숙히 진행하는 마을 공동 제사도 있었지만 떠들썩하고 잔치 분위기를 내는 마을 장승제 같은 행사도 있었다. 아이들은 잔치 분위기를 내는 장승제를 더 좋아하기도 하고 그런 행사를 기다리는 아이들도 많았다. 그런데 올해 장승제는 예전과는 사뭇 달랐다. 잔치 분위기는 고사하고 당산에서 지내는 산신제보다 더한 엄숙함이 엿보였기 때문이다. 장승제를 하는 날 마을 어른들은 검정 갓과 흰색 두루마기를 갖춰 입고 술과 떡, 과일을 비롯해 평소에는 좀처럼 먹기 어려운 돔이나 조기 등 비싼 생선도 정성껏 준비하였다.


며칠 전부터 온 천지에 무서운 병이 돈다는 소문이 파다하더니 마을에 들어오는 잡귀를 물리치기라도 할 양으로 마을 공동제를 지내는 것 같았다. 역병 같은 전염병이 위쪽에서 점차 남도 지방으로 내려온다는 연통이라도 받은 것일까. 장승제가 열린 다음 날 단은 친구들과 함께 장승이 서 있는 곳으로 가보았다. 그곳에는 청년들과 마을 어른 몇 사람이 서성이며 고민이 있는 것처럼 심각한 표정으로 웅성거리고 있었다. 늘 지나다니다 앉아서 쉬곤 했던 평상도 보이지 않았다. 마을 어귀 느티나무 아래에 있던 쉼터 역할을 했던 평상과 장승 주변에 널브러져 있던 물건들이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마을 입구는 새끼줄을 쳐서 마을로 드나드는 사람들을 통제하기도 했다. 모래톱 마을 아이들은 어른들이 하는 말이나 귀동냥으로 들어 읍내에는 늦은 밤에 통금이 있다는 것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작은 시골 마을 입구에서 통금을 실시하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졌다. 사람들이 띄엄띄엄 다니는 외진 마을에 대낮에도 새끼줄을 쳐서 감시한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 중에 눈치가 빠른 사람들은 모두 이상한 낌새를 채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오고 가는 나그네들도 군데군데 모여 작은 소리로 수군거리는 모습이 곳곳에서 보였다. 모래톱 마을에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마을 사람들이라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되어 가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마을 구석구석에는 너나 할 것 없이 이상한 기운이 감도는 것을 더욱더 느낄 수 있었다. 마을 분교에 다니는 아이들도 다들 눈치를 챈 것 같았다. 쉬는 시간이 되어 교무실 앞을 지나가다 보면 선생님들도 한데 모여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마을에 무슨 심상치 않은 일이 조만간 벌어지기라도 할 것 같았다. 마을 입구를 지나던 아이들은 느티나무 근처에 우뚝 서 있는 장승을 다시 쳐다보았다. 장승이 장승제를 치른 뒤에 보니 표정이 달라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전에는 마을 입구를 표시하는 기둥쯤으로 알았던 그 장승이 아니었다. 갑자기 우뚝 선 장승이 마을을 내려다보며 지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장승의 표정도 우스꽝스러운 것이 아니라 마을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무섭게 노려보는 것 같기도 했다. 강 건너편 절 입구에 그려진 무서운 형상을 하고 톱니바퀴처럼 칼날이 날카로운 장검을 찬 무사들이 떠올랐다. 낼모레면 곧 방학을 맞게 된다는 아이들의 들뜬 기분은 장승제를 지내며 차분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제 마을을 나가는 사람도 마을로 들어오는 사람도 마을 어귀 느티나무 아래에서 허락을 받은 뒤 출입이 가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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