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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마지막 간병일기

엄마의 수명이 다 됐다고 합니다

1926년 병인년 호랑이 띠에 태어난 엄마는 한 달 후면 우리 나이로 99세가 됩니다.

99세는 백수라 하고 우린 백수연을 하려고 준비 중이었습니다. 고향 마을에서 엄마는 이미 최고령 노인이고 백 살을 앞두고 있는 만큼 자손들은 정성껏 준비해 동네 어르신들과 가운 일가친척, 지인들을 모시고 잔번 벌여보자 의기투합한 상황이었습니다.

본격적으로 준비의 말들이 오고 간 일주일 후 상황은 반전이 되었습니다. 약 한 달 전부터 엄마는 원인 모를 복통이 있었고 엄마를 모셔와 원인을 알고자 병원에 모셔갔습니다. 그리고 엄마에게 아무런 치료도 검사조차 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내 집에 며칠간 엄마를 모시고 있었습니다. 하루의 거의 대부분을 주무시기만 하는 엄마를 돌보면서 처음엔 막막하기만 했는데 어느 순간 그 순간들마저 소중해 기록하고 싶어 졌습니다.

나는 작가이고 어느 순간에도 글을 쓰는 게 습관이 된 사람이니 며칠간 메모한 글을 다시 옮기고 새로 엄마를 추억하는 글을 추가하려 합니다.

엄마는 아들바라기입니다. 그 시대 어머니들이 다 그러하듯 전형적인 어머니. 저는 그 장손 외아들에 치어 사랑받지 못한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늦둥이 계집애로 태어났습니다. 그런 이유로 호적에도 태어난 다음 해 에야 오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55년간이나 끝없이 엄마의 사랑을 갈구하는 엄마 바라기입니다.

엄마와의 그런 애증관계.

내 또래 많은 딸들이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다는 것을 주변에서 많이 듣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왜,

우린 그런, 아들 밖에 모르는 엄마를 버리지 못할까요?

아들에게 모든 것을 쏟고 그 아들만 바라보고 살았으면서 왜 그 엄마를 보호하고 돌보는 것은 매번 딸들일 까요? 왜 노후에 엄마들은 유독 딸들에게 의지할까요?

딸이 최고라는 칭찬에 집단 최면이라도 걸린 걸까요? 왜  껍데기만 남은 엄마는 딸들의 몫이 될까요?


엄마를 흉보기 위함도,

아들을 탓하기 위함도,

내가 한 효도와 기울인 정성과 노력에 대한 공치사도 아닌,

 번쯤 풀어놓아야 진정한 화해를 할 수 있고 내가 받았던 상처를 치유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도 내가 받은 상처를 치유해 줄 수 없기 때문에 발설함으로써 스스로 치유하려 합니다.

엄마의 생체시간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순간이 올 때까지 저는 진정 엄마를 용서하고 이해하고 사랑과 연민으로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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