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ll Evans - walz for debby
'세상에서 가장 큰 소음은 침묵이다.' 델로니어스 몽크가 한 말이다. 하루키의 책을 읽다 보면 자주 등장하는 재즈 피아니스트다. 술에 취한 손님은 침묵이다. 아 가끔은 코 고는 소리나 술에 취해 흥얼거리기도 하지만, 적당히 술에 취한 손님들은 대부분 말이 없다. 분위기를 깨야 할 필요가 없어진 관계이기에 운전하는 내내 침묵은 이어진다. 가끔 말을 걸어오시는 분들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무거운 공기에 짓눌린 침묵이 차 안을 가득 채우고 주차를 할 때까지 이어질 때가 많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콜을 잡았다. 강남에서 인천 청라로 가는 콜이었다.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출발합니다."라는 말로 운행을 시작했다. 역시나 조용한 침묵이 한동안 흘렀다. 이른 퇴근시간이었음에도 강남을 벗어나는 데만 해도 꽤나 많은 시간이 흘렀다. 가끔 들리는 깜빡이 소리나 브레이크 소리 나 엑셀 소리가 들릴뿐 차 안은 무척이나 조용했다. 한참의 침묵을 깨고 손님이 나에게 물었다.
"재즈 좋아하세요?"
"네, 좋아해요. 그런데 잘 몰라요. 요새 많이 찾아서 듣고 있어요."
손님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시고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낮은 베이스와 함께 피아노 소리가 들렸다. 빌 에반스의 'my foolish heart'였다. 나름 재즈를 좋아하고 찾아 듣는 나이지만, 재즈를 듣고 좋아하는 사람을 주변에서 많이 보지 못했다. 음악을 틀어 놓고는 음악을 제외하고는 또다시 조용한 침묵이 흘렀다. 오롯이 음악에 집중하며 잠시나마 꽉 막히는 도심의 도로를 떠나는 기분을 느꼈다. 어색한 침묵을 걷어내 주어서 고마웠고, 음악을 틀어주며 그 음악에 집중할 수 있게 내어준 시간마저도 고마웠다.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손님이 차에서 하차하기 전까지 나에게 해준 말은 "재즈 좋아하세요?" 이 한마디였다. 재즈 좋아하세요라고 물어봐준 손님도 처음이었다. 대부분의 손님들은 그냥 본인의 취향의 노래를 틀고 가끔은 따라 부르며 흥겹게 집으로 돌아가시곤 했다. 본인의 차인 데다가 술까지 한잔 걸쳤으니 무슨 상관이겠냐만은 차라리 그럴 때 조용한 침묵이 더 나은 경우가 많다. 노래가 싫다기보다는 함께 잠시나마 공간을 공유하며 서로의 이익을 위한 동행이라지만 그렇게 음악을 틀어버리는 순간 갑과 을의 관계가 되어버리는 것 같아서 슬플 때가 있기 때문이다. 빈말이라도 나에게 재즈를 좋아하냐 물어준 손님이 고마운 이유이다. 설사 재즈를 극혐 한다고 하여도 그러한 손님의 질문과 그 속에 담긴 배려는 딱히 좋아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장르의 음악도 기분 좋게 들을 수 있게 만들어준다. 그렇게 한 시간이 넘도록 난 내가 몰랐던 빌 에반스의 곡들을 듣게 되었다. 제목도 모르는 곡이었지만, 분명 빌 에반스였다. 몇 곡을 듣고 나니 한곡이 다 끝나갈 무렵이 되면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곡도 나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까지 하게 되었다. 난 'walz for debby'라는 곡을 가장 좋아한다. 빌 에반스가 당시 4살이던 조카 데비에게서 영감을 받아 만든 곡인데, 조용히 음악을 듣다 보면 귀여운 꼬마 아이가 천진난만하게 놀이터를 뛰어노는 것을 보고 곡을 만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좋은 노래를 들으며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배려해준 손님에게 내가 좋은 노래를 알려 줄 수 있다면 아마 이곡을 알려드렸을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재즈 에세이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앨범 왈츠 포 데비는 cd 말고, 옛날처럼 몸을 사용하여 LP로 듣는 것이 좋다. 이 앨범은 한 면에 세곡이 들어있는데, 한 면이 끝나면 일단 바늘을 들고 물리적으로 한숨을 돌려야 비로소 본래의 왈츠 포 데비라는 작품이 된다고 생각한다."라고 말이다. 나에게 어떤 곡을 좋아하냐 물었다면 난 주저 없이 왈츠 포 데비를 추천했을 것이다.
음악을 들으면서부터는 막히던 도심을 벗어나 한가한 고속도로로 접어들었고, 어느샌가 석양이 아름답게 저물어가는 청라 인근의 높은 아파트에 도착해 가고 있었다. 안전하게 주차를 마치고 손님에게 말을 건넸다.
"좋은 음악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고, 제가 더 감사하죠."라는 말이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돌아왔다.
손님에게 들려주진 못했지만, 손님과 헤어지자마자 이어폰을 꽂고 왈츠 포 데비를 틀었다. 입추가 지나며 한결 시원해진 아파트 놀이터에는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미끄럼틀에서 술래잡기를 하는 아이들, 그네 하나에 두 명이나 올라타서는 곡예처럼 그네를 타고 있던 아이들이 한 여름의 시원한 밤을 즐기고 있었다.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지만, 저마다 얼굴에는 행복이 가득했다. 아직은 여름인지라 그러 어둡지 않은 늦여름의 밤 내 귀에서도 왈츠 포 데비가 흘러나왔고, 내 눈앞에서도 왈츠 포 데비가 펼쳐지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면 항상 곤히 자고 있는 귀여운 5살짜리 우리 딸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 오늘은 귀여운 우리 딸을 보러 일찍 퇴근해야겠다고 생각하고는 곧바로 버스정류장으로 달려갔다. 왈츠를 추는 댄서의 발걸음처럼 가벼웠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 그렇게 하늘도 붉게 번져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