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일 차> 마지막 운행

johnny mathis - chances are

by 도미니꾸
sunnyㅇ.jpg

끝을 정하지 않고 맞이하는 마지막은 언제나 생소하다. 뭔가 그럴싸한 멋진 엔딩을 꿈꾸며 영화를 시청하지만, 모든 영화가 멋진 결말을 맞이하지는 않는다. 엄청난 기대로 시작했던 영화도 애매모호한 뒤끝을 남기며 끝나는 경우도 있고, 이게 뭐지 하는 마음으로 시작했던 영화도 끝을 향해 달릴수록 집중하게 만들며 끝내주는 엔딩으로 마무리하는 경우도 있다. 완전한 마지막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매듭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을 정하는 많은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건강이었다. 본업을 병행하며 투잡을 하기란 사실 보통 정신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정도 각오를 안 한 것도 아니지만, 몸이 아프다 보니 본업은 본업대로 지장이 가고, 부업도 지장이 가게 되었다. 일은 일대로 못하게 되었고, 가족들에게 눈치가 보일 정도로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기 힘든 지경에 이르다 보니 자연스럽게 마지막을 떠올리게 되었다. 상황이 크게 나아진 것도 아닌 터라 마지막을 떠올리는 게 맞나 하는 의문이 떠나질 않지만, 더는 몸이 버텨주질 못할 것 같았다. 추운 날씨도 한 몫했다. 전업으로 하는 것도 힘든 날씨인데, 나처럼 맨몸으로 뛰어다니며 일을 하는 것이 너무 비효율 적이었다. 차라리 그 시간에 육아에 지친 와이프를 대신해 집안일을 도우며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마지막 운행은 힘들지 않았다. 더군다나 강남에서 내가 사는 지역까지의 운행이었기에 따로 집으로 가는 것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기에 더 편하게 느껴졌다. 마지막이라고 딱히 특별한 에피소드는 없었다. "수고하셨습니다."라는 손님의 마지막 말과 함께 나의 마지막 운행은 허무하게 끝이 났다. 주차를 하고 집으로 걸어가는 길 피자 한판을 주문해서 들고 집으로 갔다. 그냥 무언가 사서 집으로 가고 싶었다. 아내와 아이와 피자를 나눠먹으며 작은 행복을 느꼈다. 대리비로 받은 3만 원으로 피자 한판을 사도 돈이 남았다. 열심히 뛰며 번 돈으로 피자 한판을 사서 가족들과 맛있게 먹을 수 있는 행복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몸이 아프면서 가족에게는 가족에게, 또 나 스스로에게는 스스로에게 너무 많은 피해를 끼쳤다. 금전적인 도움이 안 되었던 것은 아니지만, 몸과 마음이 너무 아팠다. 몸이 아프다 보니 정상적인 사고를 하기 어려워지고 그렇게 내 몸과 마음은 지쳐갔다. 내가 결정한 마지막은 새로운 시작을 위한 매듭이다. 몸이 힘들어 그만둔다라는 말을 멋지게 포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위한 어쩔 수 없는 마지막인 것이다.





위스키는 오래 숙성된 위스키일수록 맛과 향이 풍부해진다. 그래서인지 가격 또한 12년 산 보다 30년 산 위스키가 훨씬 더 비싸다. 단순히 맛과 향이 풍부하기 때문에 비싼 가격을 인정받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오래 숙성된 위스키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이유는 바로 시간이다. 달모어 30년 산을 먹어본 적이 있다. 확실히 12년에 비해 그 향과 풍미는 깊고 짙었다. 12년의 시간보다 30년의 시간을 묵힌 위스키는 인고의 시간에 대한 보상이다. 내 눈앞에 있는 달모어 30년을 깨버렸다면 이 위스키를 다시 먹기 위해서 우리는 30년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30년은 정말이지 긴 시간이고,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시간이다. 생명도 없는 위스키라는 술 한병도 저렇게 가치를 부여받는데, 심지어 하나의 소중한 생명을 가진 인간이 이렇게 무의미하게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은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공기처럼 일상에서는 제대로 인자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시간이다. 모두에게 주어진 것이지만,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시간은 천차만별이다.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시간은 무의미하게 흐르기도 하고 의미 있게 흐르기도 한다. 성공(?)한 사람들 대부분이 말하는 시간의 중요성을 난 위스키와 대리운전을 통해 배웠다. 한정적인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는 개인의 선택이고 자유이지만, 마지막에 다다른 시점에서 그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에 따라 우리네 인생은 천지차이가 될 것임이 분명하다. 나에게 경제적으로 심리적으로도 많은 위안을 주었던 시간이었지만, 이제는 좀 더 귀한 게 시간을 보내야겠다는 다짐이 내 결론이었다. 마지막을 떠올리게 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이제는 차근차근 어떻게 귀중한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을 것인지 고민해볼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귀하게 사용할 것인지 계획할 예정이다. 나의 대리운전은 이렇게 끝날 것이다. 다른 사람을 집으로 안전하게 운전해 모시는 일은 이제 끝이다. 남의 가족들은 나를 통해 행복한 시간이 많아졌겠지만, 정작 나는 늘 아이의 자는 모습만을 보며 그리워했고, 지친 몸을 이끌며 아이와 제대로 놀아주지도 못하며 시간을 낭비했다. 손에 쥐어진 얼마의 금전적 보상으로 나와 가족의 소중한 시간을 맞바꾸었다. 하루하루 성장해가는 아이의 모습을 놓치는 것도 모자라 소홀해질 수밖에 없는 무능한 아빠를 탓하며 시간을 흘려보내기엔 아직도 남은 시간이 많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는 부쩍 아빠를 찾으며 나의 퇴근시간만을 기다린다. 복도를 달려와 나에게 안기며 "아빠, 얼마나 보고 싶었다고요."라고 말하는 아이가 내 전부다. 녀석을 위해선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남은 시간을 나의 가족을 위해 어떻게 가치 있게 보낼 것인가. 긴 밤 난 또 깊은 생각과 고민으로 보내겠지만, 내 손을 꽉 쥐고 잠든 아이의 옆에서라면 난 좋다. 이렇게 난 대리운전을 통해 값진 경험을 했고, 가족의 소중함과 시간의 중요성을 되짚을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또 어떤 경험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오히려 마지막에서 시작을 찾을 수 있을 거란 기대감에 두근거린다.


keyword
이전 29화28일 차> When October Go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