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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입문 Jun 16. 2024

핑그색 자전거

자전거 입문기 #1

핑크색 자전거 


내 첫 자전거는 핑크색 자전거였다. 아버지가 '무남독녀 외동딸'을 위해 불쑥 사온 자전거였다. 세 발 자전거도 탔을테고, 다른 자전거도 있었을지 모르지만 내 기억에 남은 첫 자전거는 이 자전거다. 충격적인 '핑크색' 프레임, 대담한 '흰색' 타이어. 당시의 나를 사로잡... 진 못했다. (핑크색은 예나 지금이나 못 견디겠다) 디자인뿐 아니라 기능도 충격적이었다. 이 놈의 자전거. 도무지 앞으로 가질 않았다. (자전거의 기본 기능 아닌가?) 분해서, 눈 뜨자마자 자전거를 가지고 집 앞으로 나서서 연습을 계속했다. 몇 발 밀면 앞으로 가는 가 싶더니 픽 옆으로 넘어졌다. 넘어지고, 또 넘어졌다. 7살, 그 짤막한 다리로 최선을 다해 열심히 페달을 밟았다. -어른으로 눈으로 봐도 경사다 싶은 '경사각 7도'로 올라갈 때 느끼는 다리의 묵직함과 비슷- 정말 힘들게 밟고 있는데도, 앞으로 2-3미터 간 다음엔 힘 없이 푹 쓰러졌다. 연습하던 공터엔 자갈도 있어서 보호대를 차고 나가도 팔꿈치, 무릎 근처가 까지는 걸 방지할 수 없었다.  


아버지의 강력한 교육 방침이 있었다. 혼자 탈 수 있을 때까지, 의존하게 만들지 않겠다. 홀로 타게 하겠다. 바람직하지만 덕분에 많이도 넘어졌다. 핑크색 자전거가 긁힌 것보다, 훨씬 더 망가져 오는 딸을 보는 어머니의 심경은 자전거를 내다 버리기 직전이었다. 이쯤 되자 슬슬 아버지도, 자전거를 습득한다는 게 꽤나 어려운 일이라는 걸 느끼기 시작했다. "이게 그렇게 어려운가?"


자전거 타기, 가르칠게 하나 없긴 하다. 딱 세 가지만 하면 된다.


- 의자에 앉는다.

- 핸들을 잡는다.

- 페달을 밟는다. 


 고작 이 세 가지를 해 내지 못했다. 세상천지 모두가 잘하는 일을 못 해낸 것이다. 뭐 그렇게 대단한 운동신경은 없어도, 그래도 제법 뭔가 타는 거엔 재능이 있다 믿고 있었는데... 이 아이 정말 운동신경이 없는 게 아닐까? 이 정도 의심이 들만도 했다. 하지만 나름 아버지도 무남독녀 외동딸을 혼자 내보낼 만한 근거는 있었다.


스키를 타는 어린이


당시의 나는 스키를 탈 수 있었다. (생각보다 괜찮은 근거 아닌가?) 스키를 처음 배울 때도 어마무시하게 넘어지긴 했다. 눈밭에 누워있는 시간이 타는 시간보다 길 정도였다. 침대 축구가 아니라, 침대 스키다. 다리에 근육이 없으니 스키가 눈을 밀어내는 저항을 버틸 수가 없었다. 그게 길러질 때까진 데굴데굴 넘어질 수밖에 없었다. 


'산꼭대기까지 굳이 이상한 그네를 타고 올라와선, 왜 이렇게 넘어져야 하는거지?' 그렇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7세 아동은 저항했다. 나름 강력하게. 스키는 3가지를 붙여야 정확하게 장착되었다고 볼 수 있다. 길쭉한 젓가락 같은 스키, 스키에 붙어있는 단단한 고정장치, 그리고 깁스처럼 단단한 스키화다. 스키에 붙은 고정장치를 병뚜껑 딸 때처럼 콱 재껴서 눌러야 스키화가 착하고 들러붙는다. 갑자기 풀리는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서 그냥 쓱 스치듯 눌러서는- 그러니까 앵간한 힘을 주지 않고서는 빠지지 않는다. 어른의 힘으로 뒤에서 힘차게 발로 밟는 세기로 눌러야 빠진다. 

저 핑크색 부분을 폴대로 콱 찍어야 열린다.

7세 어린이 팔 힘으론 풀기가 어렵다. 렌탈 샵 앞에서 아버지에게 풀어달라 부탁을 해야 풀 수 있었다. 얼마나 분했는데 눈 밭이 가득한 산 중턱에 가로로 딱 서서는 폴대로 그 고정장치를 정확하게 가격해서 빡 눌러서 혼자 분리했다. 발 하나가 자유로워지자 나머지 발을 푸는 건 일도 아니었다. 양발을 힘차게 풀어재 끼고 자유를 얻은 어린이는 스키를 눈밭에 팍! 팍! 꽂아 넣었다. 뒷모습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새초롬하게 타박타박 혼자 걸어내려 간다. 이렇게 꽂아 놓으면 알아서 가져오겠지 싶었던 모양이다. 혼자 내려 보낸 척해도 어딘가 뒤에 있겠지 싶었을 것이다. 그렇게 내려가자 패트롤 아저씨가 다가왔다.


"어디 다쳤어? 괜찮아? 스키는?" 

(스키가 없으니, 어마어마한 충격에 날아갔다가 아픈 채로 걸어가나 싶었던 게 아닐까?)


대답이 가관이었다. 손가락으로 뒤에 스키를 가리키곤

"아니요. 스키 안 타요! 감사합니다."(인사성은 바른 어린이였다.) 

 

 그러곤 계속 내려갔다. 얼굴은 넘어지고 엉엉 울어서 퉁퉁 부었고, 표정은 뾰로통한 그대로였다. 눈물도 참 짭조름했던 기억이 난다. 눈 밭에서 울면 되게 차갑고, 되게 서러웠다. 다신 안 탄다는 마음으로 한걸음 한걸음 팍팍 내려갔다. 잘 걸어가니 특별하게 패트롤 썰매는 탈 필요 없지만, 조그마한 아이가 혼자 내려가니 신경 쓰이던 패트롤 아저씨도 뒤에서 슥슥 따라오며 내려왔다. 거의 다 내려가자마자 어머니가 날 바로 찾아냈고, 엉엉 울어서 멍한 머리통을 부여잡고 숙소로 들어갔다. 


다음 날 아침, 전 날 다신 안 탄다던 부츠를 이미 또 신고 있었고, 내 발엔 마음에 안 드는 젓가락이 붙어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부는 산 중턱의 기이한 그네(리프트) 위였다. 뭐지? 벌써 정상에 다 와간다. (당시 기준엔 정상으로 기억하는데, 분명 초보자 코스였던 게 분명하다. 그러고 또 타냐면서 옥신각신 실랑이는 있었지만, 새벽녘에 몽롱한 어린이를 깨워서는 또 종일 티켓을 끊고, 올라가고 있었다. 모로 가든 그냥 또 가보기로 한 모양이었다.  


전 날 패배로 가득한 나의 하산 길은 아버지에겐 다른 기억으로 남았던 모양이다. 묘한 승리의 기록으로. 이번엔 저 딸내미가 혼자 넘어지고 나서 뭘 하려나, 조금 떨어진 언덕 위에서 구경하고 있었다. 한참을 넘어져서 못 일어나고 있길래 머리를 박은게 아닐까, 이번엔 엎고 내려가야 하나 싶던 참이었다. 웬일인지, 머리가 띵한 모양인지 한참을 못 일어나던 딸내미가 별안간 벌떡 혼자 일어났다. 그러더니 어른 길이의 반도 안 되는 짤막한 폴대를 번쩍 들어 올리더니 뒷발꿈치에 있는 고정장치를 향해 힘차게 내리꽂는다. 혼자 못 뺀다며 맨날 빼달라고만 생떼만 부리던 일이었다. 그걸 어쩐 일인지(성질이 나서 아니겠는가) 힘차게 혼자 빼내고, 심지어 스키 정리마저 완벽하게(그냥 놔두면 미끄러져 내려가서 위험하단 말을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하고 내려갔다. 타박타박 내려가는 게 걱정돼서 스키를 둘러매고 가는데, 패트롤 아저씨가 다가가는 게 보였다. 무섭진 않으려나? 했는데, 스키장에서 중앙에 가깝던 걷는 길을 꺾어서 구석진 곳으로 내려간다. 대충 내려가는 길을 잡은 어린이가 패트롤 아저씨에게 무어라 손짓하곤 하고 인사를 한다. 패트롤 아저씨가 알았다는 듯 끄덕이고 멀리로 내려간다. 양쪽발을 스스로 자유롭게 만들고, 지 혼자 타박타박 걸어내려 가는 딸내미를 어이없어하며 구경했다. 


다른 동네 어린이들은 다 부모님들에게 딱 붙어있는데, 혼자 타박타박- 뒷모습을 보니 웃기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사실 내심, 어젠 못 하던걸 해 내서 다소 대견했다. 그러니 더더욱 포기하게 만들 순 없었다. 아버지는 스키를 짊어지고, 내려와 다음 날 아침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난다는 듯 자연스럽게 다시 리프트를 탔다. 이상하게도 나는 그다음 날 스키를 타고 내려올 수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어젠 안 되던 것이 오늘은 가능했다. 그냥 그랬다.  


7세 아동의 스키는 대략 이런 일들을 해야만 한다. 스키 부츠를 신고, 스키에 장착하고, 폴대를 쥔 다음 리프트 권을 지하철 타듯이 찍고, 정상에 올라 스키 기초 하강 자세(A자)로 내려온다. A턴이 아닌 11자 턴도 대충 되어서 여하튼 저는 코스를 따라 내려온다. 달리긴 못해도 대략 이 정도의 과업을 해낸 어린이였다. (꽤나 으스대며 자랑하고 싶다) 자랑은 차치하고서 이 정도면 홀로 자전거를 탈 수 있다 주장하는 아버지의 의견도 상당히 신빙성은 있어 보인다.  


뭔가 이상하다.


그렇다. 그 수십 가지를 해냈는데 단 3가지 일만 하면 되는 자전거를 못 탈리가 없다. 나름 타당한 의견이 아닌가? 내 생각에도 그렇다.  '가르칠 게 없는' 정도의 과업임에 분명했다. 스키 턴도 하는데, 자전거 페달을 못 밟을까? 웃기게도 못 밟았다. 아버지가 밀착 과외를 하기 시작했는데도 몇 발 못 가서 파닥 넘어졌다. 


"뭔가 이상한데..." 


아무리 그래도 몇 주 동안, 다리 힘도 충분히 길러진 거 같은데 왜 안 나가는 거지? 아버지가 잠깐 자전거를 달라고 했다. 쓱, 올라타 보더니 아차하고 머리를 탁 친다. 


"아이고 미안해. 딸. 일단 들어가자-"


"엉? 왜?"


하여간 아버지는 작전상 후퇴라며 자전거를 들고 냉큼 들어갔다. 뭐라 설명하기도 민망하다. 범인은 타이어였다. 타이어에 공기가 안 들어간 것이다. 냉큼 후퇴한 후, 자초지종을 어머니에게 전달했다. 큰 방에서 큰 소리가 난 건 말할 것도 없다. 그다음 날인지, 그다음 주였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하여간 자전거가 거의 깃털처럼 가볍게 앞으로 나갔던 기억이 난다. 


그냥 갑자기 앞으로 달려 나갔다. 어른이 된 지금 버전으로 말하자면, 자전거를 타다 오토바이를 탄 기분과 비슷할 거 같다. 여태 공기 빠진 타이어로 몇 미터씩 앞으로 나가는 훈련을 하다 갑자기 공기 빵빵하고 멀쩡한 타이어가 있는 자전거로 힘차게 페달을 밟으니 얼마나 가볍게 슝슝 나갔을까?

7세 아동의 세상에선 좌절이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자전거를 못 탄다' 하고.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무엇이 바뀐 지도 정확하게 모르지만 '난 자전거를 잘 탄다. 보조바퀴도 없이.'로 변했다. 당시엔 타이어가 바람이 빠지고, 그래서 앞으로 못 나가고 뭐 이런 걸 이해를 못 하던 때였다. 그저 어젠 못 탔는데, 오늘은 잘 타게 되었다. 정도였다. 나는 자전거를 잘 탈 수 있었다.    


그것은 정말 내 탓인가?


일하다 보면 문득  나의 7세 아동 시절의 슬픔과 비슷한 괴로움에 빠지게 된다.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탓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탓을 한다. 당시의 나의 세상에 '자전거 탓'과 '내 탓' 중에 알 수 있는 게 '내 탓' 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 탓'을 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자전거 바퀴 탓'이었다. 아무 것도 몰라서, 주변의 어른들을 의심 하지 못했다. 바퀴는 구멍이 난 채로 나갔고, 그걸 체크할 줄 모르고 못했다. 일부러는 아니었다. 그들도 내 작은 자전거를 타보지 않고선 모양만 봐선 알 수 없었다. 하얀 화려한 바퀴라 뭐가 찌그러진 게 잘 보이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새 자전거가 바람이 그렇게 쉽게 빠지리라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든 기계는 싫어하는 엄마는 자전거가 문제가 있을 거라 생각해보지 못했을 테고, 스키 탈 때 많이 넘어진 걸 본 아버진 이번에도 제법 넘어지겠지 싶었던 모양이었다. 


누구도 큰 잘못은 없는데 나는 내 탓만 하게 되었다. 따지고 보면 '자전거 바퀴 탓'을 몰랐던 모두의 탓일지도 모른다. 타보지도 않고 자전거 탓만 하면 안 되겠지만, 타고 수 없이 많이 넘어지면서 자전거 탓을 한번 안 했다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가 있다. '내 탓' 소용돌이에 빠져있는 이가 있다면, 부디 가끔은 자전거 '바퀴' 탓일 수 있다는 의심을 해 보면 좋겠다. 


더이상 자전거가 핑크색은 아니지만


#자전거 입문기의 시작


미니벨로를 타다, 로드를 타거나, 빌린 자전거를 타다 내 자전거를 타면 가끔 그 날이 떠오른다. 핑크색 자전거가 깃털 처럼 앞으로 나가던 그 날이. 내 다리가 깃털처럼 가볍게 앞으로 돌아가고, 자전거가 바람보다 더 빨리 나가던 날이었다. 그 날이 나의 자전거 입문 날이다. 야구보다 오래 한 운동이 있다고 하면 자전거가 맞을 것 같다. 


남들은 무시하는 작은 미니벨로를 가지고, 멋이 없다지만 짐 받이도 달았다. 로드바이크 보단 20인치 미니벨로가 즐거웠다. 일과 달리 나의 인생은 효율보다 즐거움이 우선인가보다. 자주 멈춰 서니 멈출 곳에 세울 킥 스탠드가 필요하다. 여행을 하고 싶으니 작은 자전거로 바꾸었다. 잃어버려도 괜찮으니 비싸지 않아도 좋다. 운동을 극한으로 하고 싶은 게 아니라, 안전하고 재미있게 어딘가 다니고 싶다. 조촐하게 가벼운 텐트도 실었다.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그렇게 무린 하지 않는다. 나에겐 떠날 자유가 있다. 국토종주를 꿈꾼다. 세계일주도 꿈꾼다.

나의 자전거 입문기를 시작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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