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로 시작해 입사로 끝나는 "타임머신 직장생활" 이야기
퇴사 D-120일 전 이야기
나도 그런 나이가 되어가고 있나 보다
출근해서 사내 게시판을 둘러보니 경조사 공지가 많이 등록되어 있었다. 아무런 근거는 없지만 보통 봄/가을에는 결혼식이 많고, 겨울에는 장례식이 많았던 것 같았는데 요즘은 특별한 패턴이 없는 것 같다.
게시판을 보고 있는 와중에 이전 회사 지인의 어머님 부고 문자가 도착했다. 무거운 마음으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고" 참석하겠다는 회신을 보냈다.
예전에 결혼식 청첩장보다 돌잔치 초대가 많아졌을 때 나도 이제 많이 늙었구나!라고 생각했었는데, 요즘 들어 부고가 많아지다 보니 돌잔치를 다닐 때가 젊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 나도 그런 나이가 되어가고 있나 보다
경조사를 분류하고 있다
회사에 공지되는 모든 경조사에 참석하기란 시간적으로, 경제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래서 우리 팀의 행사를 제외하고는 자연스럽게 참석 여부를 분류하게 된다.
평소 잘 알지 못하는 분들의 경우는? 게시판에 짧은 댓글로 축하 또는 위로의 마음을 전하고
지나다가 눈인사를 할 정도의 친분이 있는 경우는? 소정의 금액과 간단한 메모를 작성하여 전달하고
전혀 알지 못하지만 왠지 마음이 끌리는 분의 조사는 조용히 혼자 가서 참석할 때도 있다
매일 보지만 내 마음속의 MS(밉상)인 경우는? 조사는 참석하지만, 경사는 참석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위의 기준으로 이번 경조사에 참석할 2건의 리스트를 분류했다.
오늘 새벽에 돌아가신 같은 본부 소속의 김 팀장님 아버님 장례식
이번 주 토요일에 부산에서는 점심을 자주 먹는 법무팀 한 과장님 결혼식
모든 생각은 존중받아야 한다
오늘 새벽에 돌아가신 김 팀장님 아버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칼퇴근하여 강남 삼성병원으로 출발했다. 김 팀장님을 만나 조의를 표하고 식사를 하러 옆 방으로 건너왔다. 우리가 앉은 옆 테이블에서는 전혀 왕래가 없는 다른 부문의 팀장님과 그의 지인들이 경조사에 대한 열띤 토론을 하고 있었다.
저녁으로 육개장을 먹는 데 옆 테이블 대화 소리가 워낙 커서 나의 귀는 이미 옆 테이블에 넘어가 있었다. 경조사에 대한 생각이 세 명은 별 반 차이가 없었는데, 그 중 한 명의 생각이 특별했다.
특별한 그가 이야기를 시작한다.
저는 직장 후배의 경조사는 가지 않습니다. 오로지 상사의 경조사만 참석합니다.
그리고, 상사 중에도 나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상사의 경조사만 참석합니다.
제가 사원 경조사에 딱 한번 참석한 적이 있는데요. 그 친구의 아버지가 높으신 분이셨습니다.
회사는 이익집단이고, 구성원은 가족도 아니며, 내 코가 석잔데 시간과 비용을 낭비할 필요가 있나요?
그의 생각을 듣는 순간 나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는 그의 지인 대부분이 "그건 아니지!"라고 이야기 했지만 그의 의견이 강하게 틀렸다고 부정하진 않았다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들은 거의 20년이 넘는 직장생활을 했고, 산전수전을 경험하면서 그의 거친 표현에는 동의하긴 싫지만 그의 말 중 일부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여하튼 "취중진담"인지?, "취중농담"인지? 는 모르겠지만 계속 듣고 있기가 불편해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밖에는 내 맞은편에서 그 이야기를 함께 듣고 있던 양 과장님이 먼저 나와 있었다. 우린 서로 눈이 마주쳤고, 시원한 새벽바람을 맞으며 서로에게 질문했다. "우리도 저렇게 살면 사장이 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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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초간 정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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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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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큰 웃음으로 서로에게 답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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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옆 테이블의 논쟁에 대해서는 다양한 생각은 존중 받아야 한다..라는 급 결론을 내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피할 수도 즐길 수도 없는 상황
어제 새벽까지 장례식장에 있다 보니 오늘 오전은 좀 피곤하다. 나는 점심을 빨리 먹고 휴게실에 앉아 잠시 쉬고 있는데, 저 멀리 최 과장님이 어깨에 검은 기운을 내뿜으며 투덜투덜 걸어와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최 과장 : (대뜸) 법무팀 한 과장님 결혼식에 가세요?
나 : 네 저는 친분이 있어 참석합니다.
최 과장 : 저는 얼굴도 모르는데, 저희 팀장님이 갔다 오래요.
나 : 잘 모르면 안 가면 되잖아요
최 과장 : 담달에 우리 팀에 큰 계약건이 있어 얼굴도장 찍으래요.
나 : 친하게 지내서 나쁠 건 없지만, 마음 불편하면 가지 마세요
최 과장 : 팀장님께 이미 그날 스케줄이 없다고 이미 이야기했어요...
나 : (ㅋㅋㅋ) 그럼 과장님 어차피 가시겠네요?
최 과장 : 네 ㅠ.ㅠ. 팀장도 안 가면서 왜? 내가 가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나 : 음... 가기 싫은 경조사 즐겁게 가는 방법이 하나 있는데 들어 보실래요?
최 과장 :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경조사로 여행하자
저도 예전부터 가기 싫은 경조사로 전국 방방곡곡으로 많이 다녔는데요~~
신입사원 때는 팀장님이 나를 외부에 소개하여 준다고 해서 경조사에 데리고 다녔고
대리 때는 지방 경조사 기차표 발권 담당자라 어쩔 수 없이 같이 따라다녔고
과장 때는 회사 경조사 물품 부탁이 있어 전국으로 다녔고
차장이 되니 팀장님 대타로 많이 다녔습니다.
얼굴이라도 알면 다행인데, 얼굴도 모르고 친분도 없는 경조사에 가야 하는 경우는? 시간과 비용보다 모르는 사람과 함께있는 시간이 정말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대리 때 였습니다. 우리 회사에 "초긍정의 아이콘 김 과장님"을 만난 후 경조사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저는 그날도 "토요일 낮 12시 결혼식 건으로 서울< >목포 왕복 기차표 5매를 인터넷 발권"하고 있었는데, 김 과장님이 조용히 저에게 오시더니 서울로 올라오는 기차표 2개를 14:00에서 19:00으로 변경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 2장의 주인공은 김 과장님과 저라고 하시더군요.
전 별생각 없이 시키는대로 하고, 결혼식이 끝난 후 본부장님과 팀장님 2분께 서울로 가는 기차표를 전달드리고 우리 둘만 목포에 남았습니다. 결혼식 시작 전 김 과장님이 뷔페를 많이 먹지 말라고 해서 배가 고픈 상태였는데, 본부장님과 팀장님이 눈에서 사라지는 순간 김 과장님은 나의 손을 잡고 택시를 타고 목포 투어를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 코스 : "민어 횟집"에서 평생 처음 부레라는 걸 먹어보았고
두 번째 코스 : "유달산"트래킹으로 통해 배를 꺼트린 후
세 번째 코스 : "쑥꿀레"라는 콩고물이 묻어있는 쑥떡을 조청에 찍어 먹었고
네 번째 코스 : "갓바위" 절경에서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 찍었으며
마지막 코스 : "보리굴비"정식집에서 저녁 식사를 급하게 마치고 아슬아슬하게 서울행 기차를 탔습니다.
보통 지방 결혼식에 오면 "기차역/터미널/결혼식장"만 찍고 올라오는 게 다 였는데, 김 과장님을 따라 5시간 알찬 목포투어는 하고 나니 "경조사"에 오면 이렇게도 할 수 있구나.라는 생각에 "경조사"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긍정적으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김 과장님이 기차 안에서 한숨 돌리고 한마디 하셨죠... " 우리가 살면서 경조사가 아니면 전국 방방곡곡을 언제 이렇게 돌아보겠습니까?"
저도 대리님처럼 정말 가기 싫은 경조사에 억지로 참석할 때가 많았는데... 싫다! 싫다! 싫다!라는 마음으로 참석하니 제가 좋아하는 뷔페도 싫더라고요~~ㅋㅋ, 그래서 경조사 참석 자체가 즐거움이 될 순 없나? 고민하다가 찾은 방법이 경조사로 짧은 여행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남들 몰래 경조사로 여행을 시작한 초기에는 결혼식의 경우는 크게 죄책감이 없었지만, 장례식의 경우는 고인에게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조문객이 짜증 나는 마음으로 조문하는 것보다 다음 일정을 생각하며 진심으로 조문을 하는 게 고인도 좋아하지 않을까?라는 Self 합리화를 하면서 모든 경조사 참석이 즐거워졌습니다.
저는 "초긍정 김 과장님"의 말을 들은 후 전국 방방 곳곳에서 발생하는 경조사가 설레기 시작했고 억지로 참석하는 경조사는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나 : 어떠세요? 최 과장님?
최 과장 : 긍정적으로 사고하는 방법은 종이 한 장 차이네요
나 : 저도 그때 똑같은 생각을 했었습니다
최 과장 : 이번주 한 과장님 결혼식장 위치가 어딘지 아세요?
나 : 광안리 해수욕장 근처라고 하던데요
최 과장 : 그렇다면 결혼식 후 광안리 근처 맛있는 빵가게가 많다고 하던데 빵 사서 바다 보면서 먹을래요~
나 : ^^
최 과장 : 이제 저도 경조사로 여행할래요~
그럼 부산에서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