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로 시작해 입사로 끝나는 "타임머신 직장생활" 이야기
퇴사 D-60일 전 이야기
텅 빈 주차장에 사람이 있다
오늘도 1시간 정도 일찍 출근했다. 회사 주차장 차단기가 열리고 여유롭게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간다. 이 시간에 출근하면 문 콕을 당하지 않는 자리에 주차할 수 있어 좋다. 룰루랄라! 차에서 내려 걸어가고 있는데 한 달 전부터 흰색 차 한 대가 같은 층 구석 자리에 시동을 켠 채 벽을 바라보고 주차해 있다. 차 안에 불이 켜져 있었지만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궁금했지만 무서워 재빨리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로 올라왔다.
충전하지 않으면 바닥이 드러난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사무실에 처음 들어올 때면 기분이 좋다. 자리에 앉아 PC를 켜도 업무 시작까지는 아직 50분이나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이 시간이 정말 소중한 시간이며 여러 잡다한 일들을 한다.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읽고, 새로운 서비스를 이용해 보고, 업데이트된 파워블로거의 생각에 공감하며, 재미있는 글들은 지인에게 선별 공유한다. 즉, 이 시간은 나를 채우는 충전의 시간인 것이다.
사실 이 시간이 소중할 수밖에 없는 계기가 있었다. 오래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주어진 일만 밤낮으로 했던 "신입" 시절이 있었다. 나를 기특하게 여긴 상사가 경력이 안 되는 나를 높은 직책의 멤버들만 참여하는 <프로모션/마케팅 TF>의 팀원으로 참여시켜 준 적이 있었다. 모든 이들이 들어가고 싶어 하는 TF이기 때문에 나는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채 첫 미팅에 참석했다. 그러나, 첫 미팅 후 나는 조용히 참석자에서 배제되었다. 이유는? 나는 그 자리에서 논의되는 이슈와 용어 중 90%를 알아듣지 못했고 질문을 받은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오늘 아침 OO신문 사설에서 이야기하는 공유경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OO서비스 beta 버전이 출시되었던데 사용해 보셨죠?
OO블로거가 리뷰한 OO제품 대박이던데, 경품으로 어떠세요?
아마존의 CF(Collaborate Filtering)을 이용한 추천 프로모션은 어떠세요?
어제 개그콘서트 OO코너에서 사용하는 카피를 사용해 볼까요?
정말 열심히 일 한 죄 밖에 없었는데 왜! 나는 왜? 바보가 되었을까? 다른 건 몰라도 "개그콘서트"까지 나의 발목을 잡을진 몰랐다. 한참을 좌절하고 고민한 결과 주어진 일을 "소처럼 하면 결국 소가 될 수밖에 없구나."라는 결론에 이르렀고 다시 사람처럼 일하기 위해 충전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부터 1시간 일찍 출근하여 나의 바닥을 메꾸는 일을 시작했다.
조금 일찍 출근한다는 이유로 말도 안 되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에서 뉴스 기사 하나 더 보려고 일찍 출근하는데, 일찍 출근하는 나를 보고 주위 사람들이 나를 성실한 사람으로 포지셔닝해 주었다.
사원 때 일찍 출근하니, 성실하다고 모범사원상을 받게 되었고
대리 때 일찍 출근하니, 일이 많은가? 보다 라고 하면서 팀장님이 업무를 줄여 주었고
과장 때 일찍 출근하니, 초심을 잃지 않았다며 회사에 귀감이 된다고 말해 주었으며
차장 때 일찍 출근하니, 건강 챙기라면서 걱정 어린 눈빛까지 받았다
나는 이 상황을 굳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고 즐기기로 했다.
주차장과의 밀회
어느 때와 다름없이 일찍 출근했다. 상사가 먼저 출근해 있었다. 이유를 물어보니 아침에 인터넷 강의를 듣기 위해 오늘부터 일찍 출근한다고 말했다. 반갑게 인사하고 자리에 앉아 PC를 켜는데 잠시 커피 한잔 하자고 해서 첫날 함께 나갔다. 그날 이후 매일매일 아침에 상사와 커피를 마시며 나의 아침시간은 상사의 "부부싸움", "가족여행", "아파트 담보대출", "말 안 듣는 아들", "층간소음"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오늘도 출근했다. 지하 주차장에 주차를 했지만 왠지 올라가기 싫다. 그래서 오늘은 저 멀리 불이 켜진 흰색 차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용기 내어 그 차 옆에 슬쩍 주차했다. 어~!? 다른 팀에 근무하는 문대리 님이었다. 자세히 보니 차 안에서 전화영어를 하고 있었다. 방해가 될 것 같아 후진해서 주차장을 한 바퀴 도는데, 반대쪽 구석에는 대학원에 다니는 김 과장님이 노트북으로 과제를 하는 듯 열공 중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의 팀장님이 우리 회사에서 일찍 출근하기로 유명하다는 공통점은 내 눈에만 보이는 건가? 그들이 아침시간에 자기 자리로 올라가지 못하는 것이 100% 공감되는 건 나만의 느낌적인 느낌인가? 그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씨~익 미소가 지어진다.
그래서, 나는 내일부터
주차장과 밀회에 빠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