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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엘라 Jan 22. 2022

수십 번의 눈 내리는 날

우울증 치료 이야기

   수면제 약 기운에 스르륵 잠든 새벽 내내 하늘에서는 조용히 눈이 내렸다. 가려놓았던 빛 막이 창을 돌돌 말아서 창밖을 바라보니 새하얗게 변한 바깥 풍경이 펼쳐졌다. 눈 오는 풍경이 무지 반가웠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송이들이 마치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처럼 반가웠다. 바깥 풍경을 보기 전까지만 해도 정말 일어나기가 싫었는데, 바깥 풍경을 보자마자 옷을 챙겨 입고 병원에 내부의 작은 정원으로 나갔다. 사진을 몇 장 찍고 반가운 눈을 맞이했다. 눈 내리는 풍경을 보며 지난 과거의 기억들을 곱씹었다. 
 
   엄마 장례식이 끝나고 하늘에서 눈이 내렸다. 엄마는 추운 계절에 세상을 떠났다. 그냥 그날에 우연히 눈이 내린 것 일뿐인데, 하필이면 '그날' 눈이 내려서 눈 내리는 풍경이 슬프게 느껴진다. 나는 이상하게도 매년 '11월 13일' 엄마의 기일에 대해 뭔가 알 수 없는 기대를 했다. 그 날짜가 되면 왠지 기적적으로 엄마가 살아서 돌아올 것 같다는 이상한 기대를 걸었다. 그 막연하고 근거 없는 낙관주의로 한해를 버티고 살다가, 당연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 또다시 실망을 했고 풀이 죽은 채로 그 해를 마무리했다. ‘엄마가 좀비도 아니고 어떻게 살아오나?’ 머리로는 당연히 알지만 도대체 이런 기대를 저버릴 수 없었다. 
 


   생각해보니 지난 몇 년간은 눈 오는 것을 끔찍하게도 싫어했다. 나의 유학의 시작은 운 좋게도 부모님의 경제적 지원이 있었지만, 미술학교에 입학한 이후로는 계속해서 알바를 하며 학업과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한국에서도 다양한 종류의 알바를 해보기는 했지만, 외국에서 정말 내 ‘생계’를 전적으로 책임지는 상황 속에서 일을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렇게 지난 3년간 버거킹 주말 알바를 했다. 알바를 시작한 이후로 나의 삶은 ‘월.화.수.목.버.거.킹’이었다. 그때쯤부터 끝없는 달리기를 하는 지루한 기분을 느꼈다. 그 햄버거 가게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내가 가야만 하는 장소였다. 눈이 펑펑 내리는 날에는 발목까지 쌓인 눈을 밟고 문밖을 나서야 해서 눈 오는 날이 정말이지 극도로 싫었다.
 


    밤 12~1시에 알바가 끝나고 집까지는 줄곧 걸어서 돌아갔다. 일하는 곳의 위치는 걸어가면 약 40분 정도의 거리였다. 유일한 교통수단 버스의 막차시간은 저녁 9시 30분에 끝나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막차시간 이후에는 아르바이트생들이 알아서 요령껏 퇴근해야 했다. 나는 알바하는 첫해 1년은 매번 동료들에게 자동차를 얻어 타기를 부탁했었고, 2년 차에는 전동 킥보드를 구매해서 출, 퇴근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전동 킥 보드에 떨어져서 크게 다칠뻔한 것이 계기가 되어 전동 킥보드 타기를 주저하게 되었다. 그래서 결국 3년 차에는 걸어서 집으로 돌아갔다. 매번 동료들에게 부탁하고 그 친구가 끝날 때까지 30분~1시간을 더 기다리는 것도 지쳤고 걷기 운동을 겸한다는 생각으로 늘 40분을 걸었다. 하루 종일 서서 일한 날은 발바닥이 마치 감자가 으깨진 것처럼 으깨지는 듯한 피로감을 느꼈다. 특히 눈이 온날 밤에는 길이 얼어서 정말 조심조심 걸어야 했다. 내딛는 걸음 하나하나 긴장을 놓치면 안 됐다. 아차 하면 넘어질 수 있는 그야말로 '살얼음판'이 펼쳐지는 길을 걸었다. 그래서 알바하는 날 눈이 내리면 깊은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그렇게 걸어서 집에 도착하면 정말 피곤에 찌든 상태로 몹시 지치는 기분을 느꼈다. 


   흉흉한 밤거리의 풍경은 아주 어둡고 적막하다. 차가 한두 대 지나다니고 사람이 거의 아무도 없다. 가끔씩 자전거를 타고 배달을 다니는 우버(Uber) 음식 배달원들만 슥슥 나를 스쳐 지나갔다. 프랑스의 밤거리를  동양 여자가 혼자서 걸어 다니면 위험하다는 것은 당연히 알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는 '될 대로 돼라'의 심정이었다. 그 길을 걸어갈 때 늘 뭔가 세상에 내 쳐진 기분이 들었고 더 이상 살고 싶지도 않으니 만약 집에 가다가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것이 내 운명 일거라고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나 자신을 방치하는 옳지 못한 생각의 방식이었다.)
  


   외국에서 빈털터리로 살아보면서 자신의 삶을 책임지며 사는 것이 생각보다 더 고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기본적인 생계에 지장이 생기니까 창작을 계속하고 싶은 욕구가 서서히 줄어들었다. 내 안에 열정이 사라지는 것이 스스로 참 부끄러웠다. 돈이 궁핍한 만큼 ‘나’라는 사람의 가치 ‘창작’의 가치를 스스로 낮게 평가했다. ‘난 뭘 해봤자 다 망할 거야, 난 잘하는 게 없어, 나에게 좋은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내가 내 삶은 이미 잘못되어 수습할 수 없어’라는 부정적인 생각을 할 때가 많았다. 그런 생각을 하기보다는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돈을 벌지 고민하는 게 더 나은 생각이지만 당시의 나는 철저하게 비관적으로만 생각했다. 그렇게 서서히 3년간 패스트푸드점 알바를 하며 무기력, 냉소주의, 자기 회의의 감정에 빠졌고 더불어 우울증까지 나를 바닥으로 끌어내렸다. 계속해서 내 생각의 방향은 삶을 포기하는 방향으로만 흘러갔다. 수십 번의 눈이 오는 날들을 보내고 녹아내리는 눈처럼 흐릿해진 사람이 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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