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 접근 전략이 얻은 수확

두 번째 결혼기념일에 이혼하기 15.

by 리얼라잎

나는 점차 남편과 아이가 만나는 횟수와 시간을 늘려갔다. 명분은 차고 넘쳤다. 남편을 어르고 달래려는 목적으로 틈틈이 그에게 아이를 보여주어야 했고, 나는 재택근무를 하는 동안 부모님 대신 아이를 봐줄 사람이 필요했으며, 나의 친정 부모님께 최대한 여유 시간을 드려야만 했다. 그립던 '우리 집'에서 아이가 남편과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나는 노트북을 가져가 일을 하거나 책을 읽었다. 내가 나의 시간을 갖는 동안 남편과 아이는 뽀뽀하고 장난치고 깔깔 웃어대며 행복한 소음을 쉴 새 없이 만들어 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그 만남의 시간이 꽤나 좋아져서, 어느 순간부터는 아이보다 내가 더 그 만남의 시간을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 순간, 그 시간이 좋다고 한들 우리가 다시 함께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안 그래도 깨진 유리그릇이었던 우리 관계는 내가 집을 나와 본격적으로 이혼을 진행하면서 더욱 산산이 부서져 급기야는 하얗게 가루가 되었다. 이런 관계를 돌이키다니, 불가능한 일이었다. 깨진 유리 조각을 붙여도 이전의 모습을 되찾을 리 만무하거늘, 하물며 유리가루를 붙이랴. 심지어 우리에게는 돌아갈만한 '제대로 된 이전 모습' 조차 없었다. 이제 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최대한 좋게 이혼해서 아이를 위해 자주 왕래하며 이혼은 했지만 사이좋은 엄마, 아빠의 모습을 아이에게 보여주는 것뿐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아이를 핑계로 점점 더 자주 '우리 집'을 오가며 지내는 몇 주 동안 나와 남편의 관계는 한결 편해졌다. 최대한 자주 아이를 보여주려는 나에게 남편은 고마워했고, 나는 내가 필요할 때마다 남편이 기꺼이 아이를 봐주니 고마웠다. 함께 살지 않으니 서로 부딪힐 일이 없어 이전의 전투 모드에서 느끼던 분노는 사그라들고 서로에 대한 안쓰러움과 고마움만 남았다. 남편은 별거 후 몸고생으로 비쩍 마른 나에 대해, 나는 별거 후 마음고생으로 부쩍 수척해진 남편에 대해 안타까워하고 미안해했다. 나는 아이가 남편과 다시 만나는 날까지 며칠간 있었던 아이의 재미있는 에피소드에 대해 만날 때마다 남편에게 이야기해 주었고, 그는 내 이야기를 들으며 한껏 웃으며 즐거워했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자 나는 하루에도 수십 장씩 생성되는 아이의 사진과 동영상을 매일 밤마다 남편에게 전송해 주면서 시시콜콜한 아이의 성장 일기도 매일 함께 전했다. 우리는 매일 밤 아이의 사진과 그날의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며 즐거워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혼을 진행하며, 우리에게는 드디어 평화가 찾아왔다. 나의 '새벽 뇌'가 귀띔해 준 전략이 엄청난 성공을 거둔 것이었다. 사이좋은 관계가 무르익었을 때 나는 전략대로 남편에게 '소송은 하지 말자', '조정으로 빨리 해결하자', '양육권은 주장하지 말아 달라' 부탁했다. 그는 내 새벽 뇌의 예상대로 일전에는 아이를 하루아침에 못 보게 되어 극단적으로 생각했던 것이지 양육권을 주장할 마음은 없었다고 말하며, 다시 조정 신청이 가능한지 변호사를 통해 알아보겠다고 했다. 그리고 더하여 나는 남편에게 '우리 집'도 나와 아이에게 양보해 줄 수 없을지 조심스레 물었다. 나는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야 하니, 나와 아이가 '우리 집'에 살게 해달라고, 나와 남편 중 누군가가 단칸방에 살거나 부모님 댁에 얹혀살아야 한다면 그것이 당신이 되는 편이 아이의 생활 면에서 낫지 않겠느냐고 설득했다. 나와 싸울 때만 제외하고는 언제나 나에게 양보하고 힘든 일을 자처하는 남편은 순순히 그러마 했다.


남편의 대답에 나는 정말이지 고마웠고, 뛸 듯이 기뻤다. 나는 의기양양하게 가족들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하며 내 수정된 접근 전략이 성공한 것에 대해 얼마간 생색을 내기도 했다. 그런데 그 극적인 협상 타결 후 상당한 시간이 흘렀는데도 남편이나 남편 측 변호사로부터 어떠한 진행 사항도 들을 수 없었다. 그러는 동안 나의 친정 빌붙기 살이는 거의 반년이 다 되어갔다. 나의 부모님은 부쩍 지쳐계셨고, 벌써부터 아픈 곳이 눈에 띄게 늘어가고 있었다. 당장 나조차도 친정에 얹혀사는 생활에 너무도 지쳐가고 있던 터라 더는 잠자코 기다리기만 할 수는 없었다. 어느 날 나는 남편에게 서둘러 이혼을 마무리 지어 나의 이 어려운 상황을 좀 해결해 달라 촉구했다. 내 말을 들은 남편은 한참 대답을 피하다 어렵사리 대답했다.

"나... 00이랑 같이 살고 싶어."

기나 긴 기다림 끝에 들은 예상 밖의 어처구니없는 대답에 나는 또 몇 달 만에 피가 다시 거꾸로 솟구침을 느끼며 남편을 거세게 몰아붙였다.

"뭐? 뭐라고? 또다시 양육권 얘기를 하는 거야? 우리 그때 얘기 잘 끝난 거 아니었어?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남편은 괴로워하며 말을 이었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니야. 그냥 나는 00이 없이 살 수 없을 것 같아. 평생 00이 옆에서 살고 싶어. 정말 그러고 싶어."

나는 말문이 탁 막혔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남편은 말이 없었다.

“양육권을 갖겠다는 건 아니고 아이랑 살고 싶다, 이게 무슨 뜻이야? 이혼하기 싫다는 말 밖에 더 돼? 나랑 산다고? 우리가 함께 산다고? 우리가 함께 살 수 있다고? 하! 벌써 잊은 거야?”

나는 기관총을 난사하듯 날 선 질문을 우다다 쏟아냈다. 질문이라기보다는 다그침이나 훈계에 더 가까웠다. 나는 그 질문을 가장한 가르침을 통해 남편에게 우리는 결코 함께 살 수 없는 종류의 특별한 인간의 종류임을 일깨워주었다.

“그렇지, 우린 같이 살 수 없지…”

남편도 결코 그것을 잊은 것은 아니었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 속 기억을 지우는 장치를 이용한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어찌 그 사실을 잊을 수 있겠는가. 다만 남편은 이혼 절차에 종지부를 찍음으로써 아이와 매일을 함께하는 삶이 평생, 아니 적어도 오랜 기간 동안은 불가능해진다는 사실에 안 그래도 유약한 마음이 한층 더 흐물 해진 것일 뿐이었다. 나는 그동안 혼신의 힘을 다해 억눌러왔던 '친정에 빌붙어 사는 애 딸린 이혼녀의 삶'의 서러움에 대한 울분을 터뜨렸다.

“지금 세월아 네월아 시간 끌고 있어도 당신은 힘들 것도 없겠지. 오히려 너무 좋지 않아? 혼자 이 넓은 집에서 놀고먹고 쉬다가 때 되면 내가 애 데려와서 보여주니까 아쉬울 것도 없을 거야. 살림이나 육아는 일절 없이 애랑 며칠에 한 번 몇 시간 놀아주는 게 다인 사람이… 지금 뭐라고? 그동안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지금 나와 우리 부모님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한 번 상상이라도 해봤어? 당신은 어쩜 그렇게 한결같이 이기적이고 무책임할 수 있어?”

남편은 심히 괴로운 표정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 정말 미안해. 너무 내 입장만 생각했다. 알겠어. 이번엔 진짜 변호사한테 얘기할게.”

'이번엔'.

남편은 분명 '이번엔'이라고 했다. 내가 남편과의 마지막 '이혼 협상' 이후로 마침내 이혼이 성사되고 그리운 '우리 집'에 딸과 둘이 입성하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동안 남편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채 그저 고민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집 나온 6개월을 하루같이 종종거리며 잠도 몇 시간 자지 못하고 노력하면서도 아이와 부모님에 대한 죄책감으로 일분일초도 마음 편할 날 없이 살고 있는데, 그는 말소리가 웅웅 울려대는 넓은 집에서 혼자 편히 지내며 '고민'이라는 것을 했다는 것이다. 나는 하루하루가 철인 3종 경기를 뛰듯 힘겨운데, 휑뎅그렁한 집에 고고히 홀로 앉아 '망설임'이라는 극강의 사치를 부리는 중이었다는 얘기였다.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내다보며 혼자 생각에 잠긴 남편의 모습을 상상하다 급기야 분통이 터진 나는 남편에게 한 바탕 더 해대려다 행여 그의 심기를 거슬러 다시 소송으로 치닫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에 참기로 했다. '내가 어떻게 이끌어 낸 평화 협정인데', 하며 가까스로 정신을 추슬렀다.

“빨리해. 제발.”

나는 내 입에서 더 많은 말들이 터져 나오지 않도록 짧게 얘기를 끝내고 돌아섰고, 남편은 미안함과 괴로움과 체념과 결심이 뒤섞인 표정으로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우리 집'을 나선 후 나는 도무지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쓸렸다. 남편의 미안해하면서도 괴로워하는 마지막 표정을 보니 조만간 내 모든 부탁을 들어줄 것만 같아 안심이 되는 한 편 아이와 함께 살고 싶은 마음으로 괴로워하는 아이 아빠가 그 모든 나의 부탁을 들어줌으로써 평생을 괴로워하며 지내게 되겠지 하는 생각에 안타까웠다. 그리고 남편의 결심으로 인하여 곧 우리의 관계가 정말 '끝'이 나고 진정 '남'이 될 것이라 생각하니 처음으로 슬픔이라는 감정이 물색없이 달려들었다. 남편의 괴로워하면서도 나와 아이와 우리 부모님을 위해 애써 체념하고 결심한듯한 그 마지막 표정이 우리의 이 지긋지긋한 싸움을 끝낼 것이라는 것을 내 영혼이 직감했기 때문이었으리라.

나는 도무지 정의할 수 없는 다양한 감정들을 느끼며 섧게 울고 또 울었다. 그리고 그렇게 한 참을 울고 나니,나는 분명 복잡해 보였던 그 감정 다발에는 실로 단 한 가지 감정만이 존재함을 알아차렸다. 그것은 오직 슬픔 하나였다. 진정으로, 나는 그저 슬펐다.

참으로 나의 마음이란 놈은 알다가도 모를 녀석이었다. 드디어 내가 그토록 원하는 것을 모두 얻어냈다 확신한 그 순간에, 나는 무엇이 그렇게도 슬펐던 것일까?


그렇게 나의 수정 접근 전략은 대성공을 거두었고,

승리의 기쁨에 도취되어야 할 나는 좀처럼 감당할 수 없는 슬픔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이제 우리는 정말 곧 끝이 날 터였다.


꿈에도 바라던 일이 일어나려는데,

나는 왜 그렇게도 슬픈지 도무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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