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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얼라잎 9시간전

두 달 만에 만난 아빠와 딸

두 번째 결혼기념일에 이혼하기 15.

남편이 '감히' 아이를 내게서 데려가려고 한다는 생각에 미쳐 날뛰던 나는 결국 두 달 만에 남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욕설, 비방, 협박 등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나는 텍스트로 남편을, 적어도 그의 영혼이라도 말살하고자 했다. 아무리 자기가 아이의 아빠이고, 아이를 보지 않고 사는 삶이 고통스럽기로서니 그동안 나와 아이의 관계를 지켜보며 아이에게 엄마라는 존재가 어떤 의미인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인간이 아이를 엄마에게서 떼어놓으려는 생각을 했다는 자체로 나에게 그는 더 이상 인간 대접을 해줄 의미도 가치도 지니지 못한 금수에 지나지 않았다. 남편 자신조차 사는 동안 그의 아버지보다는 어머니에게 크나큰 의지를 해왔다는 것을 나도 너무 잘 알고 있던 터라, 그런 그가 아이에게서 엄마를 빼앗을 궁리를 한다는 사실에 나는 불에 타오르듯 분노했다. 역시 나는 사람을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이란 작자는 아이의 불행보다 자신의 고통을 앞세우는 그런 극도로 이기적인 인간이었던 것이다. 나는 새삼 내가 그런 작자와 이혼을 진행 중이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남편에게 전송한 메시지를 시작으로 우리는 두 달 만에 또 격렬한 싸움을 했다. 오랜만에 다시 싸움의 지옥을 경험하게 되니 이혼을 결심한 것이 내가 태어나서 한 일들 중 가장 잘한 일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내가 태어나서 한 일 중 가장 잘못한 일이 이 남자와 결혼한 것이라는 확신도 물론이었다말 한마디 섞는 순간 지옥행 급행열차에 탑승하게 되는 사람과, 그것도 아이까지 함께 키우며 살아야 한다고? 목을 쳐라.




나는 깜깜한 이른 새벽에 영감이 떠오르거나 어려운 문제에 대한 실마리를 얻고는 한다. 

소송에 대한 공포와 분노로 반쯤 나간 정신과 남편과의 메시지 혈투로 인해 과잉 분비된 아드레날린 덕분에 나는 평소보다 더 이른 새벽에 일어났다. 한 겨울이라 새벽의 빛깔은 칠흑과 같았다. 한껏 초췌해진 몸과 마음으로 책상에 앉았다. 새벽에 가만히 앉아 생각을 마음껏 풀어두면 드넓은 초원에 방목된 초식동물마냥 자유롭게 초원을 누비며 풀을 뜯어먹는다. 이 뇌가 뛰놀며 풀 뜯어먹는 시간에 드는 생각은 정말이지 하나도 버릴 게 없다. 배부르게 먹고 뛰놀며 한껏 너그러워진 생각이 나에게 마디 툭 던졌다.

'남편한테 애를 보여주면 좀 누그러들지 않겠어? 그리고 생각해 봐. 아직까지는 조정을 안 하겠다고만 했지, 직접 소송을 걸어온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당장은 이혼에 합의할 생각이 없어 미뤄둔 것일지.'

참말로 그럴듯한 생각이었다. 퍽 위로가 되는 생각이었다.

'그래, 하루아침에 애가 사라져 두 달을 못 봤으니 그 인간도 정상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고 있을지도 몰라. 누구보다 아이를 끔찍하게 아끼던 사람이잖아. 아이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잖아. 내가 먼저 호의적으로 돌아서서 자주 아이를 보여주고 아이가 수시로 남편 집을 오가게 되면 남편도 끝까지 양육권을 요구하지는 않을 거야. 아무리 내가 그 사람을 싫어한다 해도, 사실 그렇게까지 애한테 모질게 굴 수 있는 사람은 절대 아니야.'

머릿속이 맑아졌다. 역시 생각이라는 건 새벽에 해야 한다.


아침이 밝았다. 나는 가뿐한 마음으로 아침을 먹으며 친정 부모님께 내 결심을 전했다.

"나 00 아빠한테 애 보여주려고."

조금은 놀란 표정으로 엄마가 물었다.

"왜 갑자기?"

“지금 애 아빠가 순순히 합의를 안 하는 게, 아무래도 애를 못 봐서 눈이 뒤집혀 그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일단 애를 있게 되면 마음이 조금 누그러질 거고, 나한테 고맙기도 할 거고. 애만 언제든 있을 같다는 생각이 든다면 굳이 양육권 달라고 소송까지는 안 할 같아. 왠지 그럴 것 같아."

“... 그래. 다른 건 다 모르겠고, 00 아빠가 애가 얼마나 보고 싶겠니, 엄마는 그것만 생각하면 너무 가슴이 아프고 눈물이 난다... 애한테 그렇게 지극 정성이었는데..."

엄마는 아이를 못 보고 몇 달을 지내고 있을 딸바보 사위 생각에 끝내 밥상머리에서 눈물을 보였다.

코까지 빨개져서 우는 엄마를 보니 아이를 신줏단지 모시듯 애지중지 아끼던 남편의 모습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마음이 저릿했다. 집 나온 후 처음으로 남편이 그동안 얼마나 괴로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아이가 돌이 한참 지나도록 몸에 상처 한 번 나지 않도록 돌본 공로의 팔 할은 남편이었다. 어찌나 아이를 소중히 다루고 아이의 작은 움직임에도 촉각을 세우고 벌벌 떠는지 한 여름의 솜사탕이 녹을세라 한겨울의 눈사람이 바스러질세라 조심하듯 했다. 그 모습을 떠올리니 전 날 밤까지만 해도 살의를 느꼈던 남편이 별안간 한없이 측은하고 가엾이 느껴졌다. 그랬다. 지금 여기에 다다르기까지, 독하고 모질었던 건 온통 나였다.

순간 휘몰아쳐든 죄책감으로 나는 서둘러 식탁에서 일어섰다.

아빠는 언제나 그렇듯, 침통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출근 전 아이를 챙기는 내 뒷모습에 엄마가 덧붙였다.

"이유가 뭐든, 좋은 마음으로 해라. 꼭 좋은 마음으로.”


아니, 나에게 좋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나는 소송까지만은 가지 않으려고, 아이의 양육권을 놓고 다투는 상황만은 막아보려고 잠시 작전을 변경한 것일 뿐이었다. 그런데 막상 아이를 보지 못하고 지낸 두 달 동안 남편이 느꼈을 고통을 떠올리니 갑자기 그가 안쓰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지금 아이를 못 보게 된 당사자가 그가 아니라 나라는 가정만으로도 나는 숨이 턱 막히고 눈앞에는 별이 반짝이는데, 이런 심정으로 남편은 대체 어떻게 두 달이라는 시간을 버텨왔을지, 그 고통이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나는 출근길에 서둘러 남편에게 아이와 시간을 보내게 해 주겠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전혀 예상치 못했을 호의에도 그는 놀라는 기색 없이 언제나 그렇듯 덤덤하게 반응했지만, 속으로는 얼마나 기쁘고 설레었을지 알만했다. 나는 다음 날이 재택근무를 하는 날이니 내가 남편의 집으로 아이를 데려가서 집에서 남편과 아이가 노는 동안 일을 하겠노라 했다. 결코 아이만 혼자 남편에게 보낼 수는 없었다. 남편이 아이를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릴 같은, 변호사가 심어준 두려움 때문이었다. 나는 서재방에 들어가서 일을 하는 것도 불안하니, 식탁에 자리 잡고 거실에서 노는 남편과 아이를 지켜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 아이와 나는 두 달 만에 '우리 집'을 다시 찾았다.

나는 남편과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굳은 표정으로 인사도 없이 집 안으로 들어섰다. 남편도 너무 오랜만에 만난 아이를 안고 감격하느라 나 따위와 어색함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아이는 오랜만에 만난 아빠 품에 안겨 어색한 듯 웃었다. 남편이 아이에게 연신 물었다.

"잘 지냈어? 아빠 안 보고 싶었어?"

그 반복되는 물음에 나는 또 마음이 저려왔다. 그 물음이 내게는 남편 본인이 아이가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는 말로 들렸기 때문이다. 감격스러운 부녀의 상봉을 못 본 체하려 나는 서둘러 거실로 파고들었다. 나와 아이의 짐이 상당 부분 빠지긴 했지만 크고 작은 가구와 소품들은 모두 그대로였다. 그럼에도 휑한 느낌을 감출 없는 집에서는 말할 때마다 빈집처럼 소리가 웅웅 울렸다. 거실을 둘러본 후 식탁에 앉은 순간

'아, 나 여기서 살고 싶다.'

라는 마음이 불쑥 들었다. 정말이지 나는 간절히 그 집에서 살고 싶다 느꼈다. 셋이 함께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냥 그 집이 나의 삶의 터전이길 바랐다. 친정 부모님의 집이 아니라. 무척이나 깔끔한 남편 덕분에 언제나 깔끔한 그 집, 내 취향과 생활 패턴을 완벽하게 반영해 정리, 정돈하여 꾸며놓은 그 집. 그 집에 있는 모든 것들은 작은 소품 하나까지 온전히 내가 고르고 배치한 것들이었다. 내가 집을 따뜻한 분위기로 꾸며놓았던 탓인지, 그저 전적으로 취향이 반영된 집이었던 탓인지, 또는 가까이 살며 집에 정이 들었던 탓인지, 내가 그토록 그 집이 그리웠는지 모르겠다. 그 집에서 보낸 날들 중에는 하루도 그리워할 만한 날이 없었음에도 말이다.


딸아이는 남의 집에 처음 방문하는 것처럼 어색한 미소와 낯섦을 만면에 장착하고 아장아장 걸어 다니며 집을 찬찬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남편은 아이가 집에 온다고 아이가 가지고 놀던 장난감들을 거실에 죄다 늘어놨더랬다. 아이는 매일 가지고 놀던 장난감들을 그새 모두 잊어버리기라도 했는지, 모두 처음 보는 신기한 것들인

"우와~~~"

하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아이의 그 모습을 보자니 또 심장에 쥐가 난 것 마냥 가슴께가 저릿했다.

그동안 떨어져 있던 시간을 만회하기라도 하려는 듯 남편은 뛰다시피 종종거리며 온 집안을 누비는 아이를 졸졸 쫓아다녔다. 아이의 모든 말과 손짓과 '응응(아이가 무언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내는 소리)'에 하나의 빠짐도 없이 반응해 주었다. 내가 신나게 노는 아이를 쳐다보는 척하며 흘끗 훔쳐본 남편은 조금 야위어 있었다. 두 달 전엔 없던 새치가 조금씩 보이는 듯도 했다. 사람이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으면 머리가 하얗게 새기도 한다던데, 하는 주워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아이와 혼신을 다해 놀아주는 남편을 보며 

'아이에게 하는 것의 만, 아니 10%만 나한테 했어도 내가 너와 이혼하는 다시 생각해 봤을 텐데 말이야' 

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생각도 했다. 그간 함께 꾸미고 함께 살던 집에서 셋이 함께 웃고 있지만 우린 이제 남이구나 생각하니 그동안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도무지 뭐라 정의할 없는 슬픔이 몰려왔다.


나는 남편과 아이가 노는 동안 식탁에 앉아 업무를 하면서도 남편의 움직임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혹시라도 남편이 아이를 데리고 휙 나가버릴까 봐 몇 시간 동안 화장실도 한 번 안 가고 자리를 지켰다.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 애를 보여주시면 안 돼요.'라는 변호사의 싸늘한 조언을 되새김질하며.


그렇게 몇 시간이 흘러 아이가 저녁을 먹을 시간이 되었다.

"00아, 우리 이제 할머니 할아버지 집으로 가자!"

내가 애써 경쾌한 목소리로 아이에게 말했다. 남편도 아이에게

"우리 아기 배고프니까, 얼른 가서 밥 먹어야지!"라고 하며 나의 복귀를 거들어 주었다.

내가 그 집에서 사는 동안 아이는 언제나 지척의 할머니, 할아버지 집으로 탈출하고 싶어 했다. 아이는 현관 디딤돌에 앉거나 서서 손가락으로 현관문을 가리키며 나가자며 조르기 일쑤였다.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 가자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런 아이의 모습을 볼 때면 남편은 항상 서운한 기색을 내비치곤 했었다. 하지만 이제 그만 할머니 집으로 돌아가자며 아이를 현관으로 데려와 신발을 신기려는 나에게 아이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냐는 듯 고개를 좌우로 세차게 내저으며 있는 힘껏 손사래를 쳤다. 마치 

'아니, 얼마나 오랜만에 돌아온 집인데, 어딜 또 간다는 거야?' 

하는 표정이었다. 순간 너무도 당황한 나는

"그럼 엄마 혼자 갈게~~ 잘 있어 00!"

해보았다. 아이는 나의 이 말을 듣고는 고개를 돌려 나를 빤히 쳐다보다 곧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빠바이~"

아이가 처음으로 말한 '빠바이'였다. 헛웃음이 나왔다. 생전 처음으로 한 말이 이렇게 반갑지 않은 건 처음이었다.

그리고는 다시 아빠 쪽으로 고개를 돌려 다시 저쪽으로 놀러 가보자며 거실 쪽으로 손가락질을 했다. 내가 아이를 두고 백 번을 나가도 아이는 관심조차 보이지 않을 분위기였다. 나는 남편과의 협동 작전을 통해 아이와 함께 어렵사리 현관문을 벗어났다. 남편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아이에게

"아빠, 해봐!"

했다. 두 달 동안 아빠라는 말을 실수로도 하지 않았던 아이는 기다렸다는 듯

"아빠아~ 아빠아~ 아빠아~ 아빠아~ 아빠아~"

하고 몇 번이나 말했다. 아이는 그동안 정말 그 말을 일부러 하지 않았나 보았다. 배고픔 때문인지 속상함 때문인지 속이 마구 쓰려왔다. 아마 배고픔은 아니었을 것이다.

여차저차 긴 회유 끝에 얼결에 할머니, 할아버지 집으로 돌아온 아이는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자신이 들어온 곳이 할머니 집이라는 것을 알아채고는 방금 막 닫힌 현관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도로 나가겠다고 엉엉 울어댔다. 아주 오래, 서럽게도 울어댔다. 당황한 나를 비롯해 할머니, 할아버지가 들어오라고 아무리 애원을 하고 달래 봐도 허사였다.




그날, 그 순간을 회상하자면, 먼저 장면이 무척이나 어둡다. 실제로 친정집 조명이 그렇게 어둡지는 않았을 텐데, 그날 그 장면만은 그저 잘 기억나지 않는 꿈처럼 무채색으로 흐릿 깜깜하다. 아마 내 마음이 그랬을 것이다. 시각적으로는 아득한 기억인데 그때 느꼈던 감정만은 총천연색이다. 당황스러움과 일종의 배신감, 회한, 막막함, 씁쓸함, 원망, 죄책감 등을 나는 야무지게 한 번에 느꼈다.


나는 나와 부모님, 우리 셋은 모두 다 힘이 들지언정 이 아이 하나만큼은 이곳에서 서로 미워하는 둘이 아닌 서로 사랑하는 세 사람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행복하게 자랄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그날 다시 아빠 집으로 돌아가겠다며 손가락으로 현관문을 가리키며 목놓아 울던 아이의 그 모습을 본 후, 그 굳건하던 믿음이 한순간에 무너졌고, 앞으로 누구보다도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나의 자신 만만함도 함께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더불어 나의 억장도 함께. 

나의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던, 감격스러운 부녀 상봉의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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