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0년 전 사소한 약속이 준 낭만

낭만에 대하여

by 빈공간의 미학

1. 여행의 시작

8월 22일 금요일 저녁 10시. KBS 다큐멘터리 3일 : 어바웃타임 '10년 전으로의 여행 72시간'을 시청했습니다.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따뜻함과 설렘을 느꼈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그 이야기를 공유하고 싶어졌습니다. 이야기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2015년 8월 15일 7시 48분. 안동역에서 카메라 감독은 두 명의 여대생과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내일로 여행중이었던 여대생들은 카메라 감독에게 "10년 뒤에도 같은 일을 하고 계실 건가요?"라고 물었고 먼저 "10년 뒤 같은 시간에 이 자리에서 만나자"는 제안을 합니다. 카메라 감독은 기꺼이 화답하며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하며 만남을 기약합니다. 이 사소한 약속은 10년의 시간이 흘러 2025년 8월 15일 7시 48분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방송으로 기록된 영상이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기 시작했고, 그때 소녀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촬영팀이 떠나는 72시간을 기록합니다.

2015년 8월 15일. 10년 뒤를 약속하다

2. 불확실성이 주는 매력

도대체 이 사소한 약속이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설렘을 안겨줬을까요? 우리는 일상에서 너무나 많은 것들이 예측 가능하고 계획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내일 몇 시에 일어나고, 어떤 일을 하고, 누구를 만날지 대부분 정해져 있죠. 계획하지 않으면 과연 삶을 영위할 수 있는가에 대한 생각마저 듭니다. 그런데 촬영팀은 어떤 약속도 계획도 없이 10년 전 그 장소, 그 시간을 향해 달려갑니다. 1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그 소녀들이 어떻게 변했을지, 약속을 기억하고는 있을지, 실제로 나타날지 아무도 알 수 없었습니다. 이런 불확실성은 우리에게 묘한 설렘을 줍니다. 마치 복권을 긁기 전 순간처럼, 모든 가능성이 열려있는 상태의 매력 말이죠. 많은 분들이 일상의 계획을 벗어난 불확실성이 주는 설렘을 함께 느낀 것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3. 순수했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

10년 전 안동역에서의 그 소녀들과의 약속은 계산이나 손익을 따지지 않던 순수한 시절의 상징인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가 누군가와 10년 후 만나자고 약속하면 무슨 생각부터 드시나요? "그냥 인사치레라고 생각하자", "10년 뒤에 이 사람은 기억할 수 있을까?", "나왔는데 허탕 치면 어떡하지?", "그때 너무 바쁘지 않을까?" 이런 다양한 현실적 고민들을 떠올릴 겁니다. 하지만 그 소녀들의 약속에는 그런 계산이 전혀 없었습니다. 단지 오늘의 추억을 기억하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만 있었을 뿐입니다. 시청자들은 그 모습에서 자신들의 순수했던 시절을 떠올렸을 겁니다. 조건 없이 친구가 되고, 거창한 꿈을 꾸고, 무모한 약속도 서슴지 않던 그 시절 자신들의 모습 말이죠.


4. 시간의 무게와 변화에 대한 감각

10년이란 시간은 너무 짧지도, 너무 길지도 않은 묘한 시간입니다. 10년이면 중학생이 대학을 졸업하여 사회인이 되고, 20대와 30대는 자신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전환점을 여러 번 경험하게 됩니다. 시청자들은 아마 소녀들의 10년에 대해 수많은 상상을 했을 겁니다. 이 험하고 때론 잔인한 세상을 잘 헤쳐나가서 멋진 모습으로 나타나주길 바라는 기대감도 있었을 겁니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지난 10년을 회상하며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는 것을 실감할겁니다. 동시에 본인이 10년이란 시간을 헤쳐오며 꽤 잘 살았다는 안도감도 느꼈을 겁니다. 시간의 무게와 변화에 대한 감각이 사람들로 하여금 이 만남에 기대를 걸게 한게 아닐까 생각되네요.


5. 디지털 시대의 아날로그적 낭만

요즘은 SNS로 언제든 연락할 수 있고, 검색 한 번이면 누구든 찾을 수 있는 시대입니다. 아무개의 집으로 전화하여 "OOO, 집에 있어요?"라고 묻거나 "OOO아, 몇 시에 우체국 앞에서 만나"하는 시대는 전설의 고향 정도에 나오는 신화가 되어버렸습니다. 이 프로그램의 약속은 철저히 아날로그적이었습니다. 연락처 교환도 없이, 그냥 "그때 그 시간에 그 장소에서"만 의지한 약속이었죠. 이런 불편함은 더 큰 의미를 만들었습니다. 물리적으로 쉽게 연결될 수 있다는 의미는 심리적으로 쉽게 끊어질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언제든지 연결하면 되니 연결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죠. 시청자들은 이 프로그램의 아날로그적 방식에서 잃어버린 낭만을 발견했을 겁니다. 디지털 시대의 편리함과 효율성에 가려진 아날로그 시대의 의미와 진정성을 떠올린 거죠.


6. 우리 안의 약속을 지키고 싶은 마음

그래서 그 소녀들과의 만남은 성사되었을까요? 그건 방송을 통해 한번 확인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그 과정 자체가 설렘과 행복이거든요. 결국 제가 이 프로그램에 몰입했고, 많은 시청자들이 이 서사에 몰입했던 이유는 우리 모두 마음속 깊은 곳에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현실에서는 수많은 약속이 깨지고, 만남이 흐지부지되고, 인연들이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일들을 경험합니다. 그런 경험들이 지속될수록 우리는 냉소적이 되고, 사람에 대한 믿음과 세상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립니다. 10년 전 안동역 약속은 우리 마음속 냉소와 세상에 대한 조소에 균열을 만들었습니다. "혹시 정말로 지켜지는 약속도 있을까?", "변하지 않는 마음도 있을까?" 하는 희망을 불러일으킨 거죠. 그 희망이 바로 우리가 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느꼈던 기대감과 낭만의 정체였던 것 같습니다.

2025년 8월 15일. 만남이 성사될지 기대하는 시민들의 모습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