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이란 무엇일까? 모든 생명은 생존을 위해 두려움을 느낀다. 높이에 대한 두려움, 소리, 어둠에 대한 두려움은 긴 시간, 진화를 통해 이어져 내려온, 태어나면서부터 지니고 있는 천부적(天賦的) 두려움이다. 이외에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 은 외부적, 환경적 요인으로 경험에 의해 내면화된 위험의 신호들이다.
나는 5살 때, 세발자전거를 끌고 어머니와 시장에 가곤 했다. 시장은 나에게 있어서 온갖 신기한 것들로 가득한 곳이었다. 어머니가 장봐 둔 짐을 세발자전거 뒷칸에 싣고 집으로 향하곤 했는데, 그날은 유독 눈에 반짝거리는 쇠붙이가 내 호기심을 자극했다. 가지고 싶다는 소유욕이 나를 지배하는 순간, 어느새 나는 강하게 반짝거리는 쇠붙이를 움켜쥐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시뻘건 피가 내 손바닥에서 줄줄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움켜진 것은 식칼이었던 것이다. 아픔은 이 사물이 무엇인지 인지한 순간 찾아왔다. 그 고통 덕분에 누군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나는 식칼의 용도와 위험을 단번에 파악했다.
우리는 위험에 대해 알지 못하면, 두려움 또한 느끼기 어렵다. 우리 머릿속을 지배하는 대부분의 두려움들은 위험에 대한 경험으로부터 나온다. 안전불감증도 근본적으로는 위험이 제거된 사회에서 위험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에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자는 무모하고,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자는 용맹한 법이다. 그렇게 무모함과 용맹함은 비례한다.
그렇다면 왜 두려움이 필요할까? 중심세계에서 ‘두려움’ 이라는 단어는 부정적인 언어로 인식되고, 터부(Taboo)시 되어 왔지만, 두려움은 생존에 위협이 되는 사고를 예방할 수 있도록, 우리 스스로에게 위험을 알려주는 신호등 역할을 한다. 파쿠르 훈련을 통한 지속적인 두려움 체험은 내가 예측하고 통제할 수 있는, 수용가능한 위험(Risk)인지 아니면 내가 관리할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난 천재지변처럼 수용할 수 없는 위험(Danger)인지 분간할 수 있는 자기판단능력을 향상시켜 준다. 즉, 두려움은 내가 ‘나’를 관찰하는 ‘거울’ 이다.
그러나 두려움에도 종류가 있다. 앞서 언급한 자기판단능력을 향상시켜주는 두려움은 실존적 두려움이다. 반면에 내 자신을 억압하고, 통제하고, 규정짓고,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게, 한계를 극복할 수 없게 만드는 두려움이 있다. 나는 이것을 ‘망상적 두려움’이라 부른다. 사실 이 두려움은 가짜다. 정확하게는 위험의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환상 속의 위험으로부터 야기된 두려움이다. 이런 ‘가짜 두려움’은 파급효과가 거대해서 순식간에 정신과 몸을 지배해 버린다. 특히 현실적으로 당연하게 할 수 있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망상적 두려움으로 인해 일찍이 포기하거나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게 된다. 이것이 위험을 극복하기 위한 자기확신의 단계를 가로막는 가장 큰 '적' 이다.
왜 망상적 두려움은 우리를 지배하는가? 신체적 경험 없이 생각이 많을수록, 정신적 풍요 없이 물질적으로 가진 것이 많을 수록 망상적 두려움도 커진다. 파쿠르가 신체 뿐만아니라 정신수양에 매력적인 이유는 몸으로 다양한 장애물과 상호작용하면서 그 과정 속에서 시행착오를 겪고, 자연스럽게 실제하는 위험들을 배우기 때문이다. 실제하는 위험 감수는 두려움에 대한 현실적인 접근으로 이끌어 준다. 이 독특한 과정을 우리는 '브레이킹 점프(Breaking Jumps)'라 부른다.
브레이킹 점프는 파쿠르 창시자들과 어깨를 견줄만한 2세대 트레이서 스테판 비그로(Stephane Vigroux)에 의해 개념화되었다. Stephane Vigroux 브레이킹 점프는 다음 5가지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1. Identify - Call of the Jump : 내가 도전할 것을 찾고, 정의하는 단계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도전을 선택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장애물이 여러분을 부르는 것이다. '나를 극복해봐!' 애초에 자기자신에게 맞지 않는 수준의 도전은 두려움이라는 감정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거대한 그랜드 캐니언 절벽 앞에 서 있는 자신을 상상해보라. 높이 때문에 떨어질까봐 걱정과 불안은 있어도 도전해야할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다. 반대로 자기자신에게 알맞은 도전거리는 될것 같으면서도 무서운, 애매한 경계선상에 있다. 내가 왜 이 도전을 해야하는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 떠올리기도 전에 장애물이 나를 부른다. 이유는 없다. 어느새 이 도전을 해내고싶은 마음으로 가득해진다.
2. Familiarization : 두려움 때문에 어떤 도전을 바로 성취해 내기란 쉽지 않다. 우리가 망설이게되는 이유는 내가 나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전을 앞두고 재미있는 현상이 벌어지는데 많은 훈련자들이 도전할 장애물과 비슷한 거리, 높이, 형태를 찾아 똑같이 연습해 본다. (동시에 장애물의 재질, 접지력, 안정성 등 위험요소 확인이 이루어진다) 예를들어 두려운 건물 사이 점프를 하기 전에 자기 발로 거리를 재보고, 맨땅에서 똑같이 뛰어보는 것이 대표적이다. 자신의 점프 능력, 기술 수준이 이 도전을 해내기에 충분한지 현실적으로 실험해 보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내 수준을 정확하게 인지하게되고, 비슷한 환경에서 연습해 보면서 도전할 장애물과 익숙해진다. 친밀화 단계에서는 자신의 수준이 아니라 판단되면 미련 없이 다른 장애물을 찾으러 간다. 반대로 충분히 가능하다 판단되면 오직 남은 것은 정신적인 장애물 '두려움'을 극복해내는 것이다.
3. Decision Making : 거의 90% 사고와 부상은 결심의 단계에서 발생한다. 그만큼 결심은 쉽지 않은 단계인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매 순간 흔들리기 때문이다. 한 예로 러닝 프리시전(Running Precision: 달려서 멀리 점프 후 건너편에 균형잡아 착지하는 기술) 도전을 앞두고 많은 사람들이 달리는 도중에 멈칫하거나, 이미 점프한 상태에서 몸이 공중에 뜬 후 두려운 나머지 착지할 자세를 못잡고 몸을 풀어버려 부상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 처음 첫발을 내딛을 때에는 분명 확신을 가지고 시작했겠지만 두려움 때문에 마음 속에 의심이 들어서고, 결국 자신있게 점프했으면 당연하게 되었을 도전이 실패하고 마는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결심은 절대로 흔들리면 안된다. 흔들리는 순간 실패는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다. 굳건한 결심을 해야하는 순간 나 스스로에게 암시하는 주문이 있다. "두려울 수록 전력을 다한다!"
4. Do it : 실행의 단계. 브레이킹 점프에서 가장 높은 실행의 수준은 평정심의 경지이다. 미야모토 무사시가 말하는 '무심(無心)'과 일맥상통한다. 도전을 앞두고 두려움에 떨던 내 모습이 어느덧 씻은 듯이 사라지고 아무런 생각, 아무런 마음도 없는 '무념무상(無念無想)'의 세계로 진입한다. 이 단계에서 파쿠르 훈련자는 고도의 집중력이 응집된 완벽한 '몰입(Flow state)'의 상태를 경험한다. 반면에 가장 낮은 수준의 실행은 속된말로 '질러버려' 처럼 두려움을 다스리지 않고 무시한 상태로 몸을 내던지는 행위다. 이들은 마치 내일은 없는 사람처럼 자신을 위험한 도박에 내던진다. 결국 수많은 부상과 사고로 그들의 운동 수명은 매우 짧다. 파쿠르 철학 중 'Etre et Durer(To be and to last)' 처럼 우리는 도전에 대해 한 순간 불꽃처럼 밤하늘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뿌리깊은 나무처럼 길고 긴 가치있는 캠패인으로서 접근해야 한다.
5. Feedback : 도전 후 찾아오는 성취감에 젖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피드백이다. 피드백은 자기 스스로 무엇이 잘 되었고, 무엇이 개선되어야 하는지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얻은 정보를 토대로 보다 나아지기 위해 다시 한번 더 실천에 옮긴다. 파쿠르 철학에 'Once is never'는 '한번 성공한 것은 한게 아니다'라는 의미로, 적어도 연속 세번 이상은 성공해야 비로소 내것이 된다는 뜻이다. 9명의 파쿠르 창시자 중 한 분인 데이비드 벨(David belle)은 훈련 중 다음 문장을 즐겨 사용했다.
"첫 시도는 해보는 것이 중요하고(Do it), 두번째는 잘 하는 것이 중요하다.(Do it well) 마지막 세번째는 잘할 뿐만 아니라 빠르게 할 수 있어야 한다.(Do it well and fast)"
두려움을 깼다면 이제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반복이 필요하다. 그러나 두번째 시도부터는 더이상 브레이킹 점프가 아니다. 두려움도 이전과 같지 않고 두번째 시도부터는 기술적인 요령과 동작의 완성을 위한 '연습'이기 때문이다. 두려움이 말한다. 세상은 지식과 이론으로는 담을 수 없는, 오직 경험 세계에서만 느끼고, 배울 수 있는 ‘실체’가 있다고. 그리고 그 실체를 알게 된 순간, 인간은 아무도 정의, 개념, 언어화하지 않은 것을 시도해보려는 창조의 영역으로 가까이 다가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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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코메티의 '걷는사람' 의 발 배치(Foot placement)는 일직선이다. 마치 위험한 얇은 레일(Rail) 위를 균형잡아 이동하는 것 처럼 말이다. 그래서 건명원 옥상의 레일을 똑같이 걸어 보았다. 얇은 난간은 인간이 걸어가는 삶의 길이요, 그 삶의 길을 걷는 인간은 떨어질까봐 두려우면서도 균형을 잡으려 안간 힘을 쓰는, 온갖 불안함과 역경을 짊어지고 걸어나가는 인간의 모습 그 자체다.
얇은 레일 위에서 마음은 두려움으로 흔들린다. 마음이 흔들리니, 몸도 같이 따라서 흔들린다. 두려움은 나를 '시험' 하는 과정이다. 준비된 사람은 '나' 스스로 그 두려움을 극복하지만, 준비되지 않은 사람은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을 외부에서 찾으려 한다. 두려움 앞에서 포기하거나, 도망치거나, 남을 먼저 시켜보고 따라하거나, 보조나 도움을 요청해 보지만, 결국은 그 방황들이 소용 없었음을, 오직 내가 스스로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두려움은 나의 '거울'이다. 두려움 앞에서, 초라한 나의 모습을 발견한다. 두려움 앞에서는 그동안 내가 '나'를 정의했던 좋은 직업, 좋은 외제 차, 좋은 집, 좋은 옷, 좋은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는 그대로의 '나' 만 존재한다. 자만이 사라지고 겸손이 들어선다. 내가 나의 '수준', '한계'를 알게 된다. 그래서 균형잡아 걷는 움직임 '레일 웍(Rail Walk)'은 파쿠르 수련자들이 종종 '움직임 명상' 으로 수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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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요일에는 수원에 있는 옛 서울대 농대 캠퍼스에서 촬영을 진행했는데 이곳은 폐건물이 많아 평소 사진, 영상 마니아들에게 꽤나 알려진 장소다.
촬영을 진행하면서 여러 도전들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기숙사 폐건물 지붕 점프였다. 옥상에서 반대편 지붕을 보자마자 든 생각은 지난 수년간 해오던 익숙한 거리와 높이였기 때문에 쉽게 해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었으나, 막상 지붕위에 올라서니 예상치 못한 위험이 가득했다. 지붕 재질은 본래 미끄러지지 않도록 사포처럼 작은 모래 알갱이들이 접착된 판넬이었다. 그러나 오랜시간 방치되어 발을 디딜 때 마다 모래 알갱이들이 부슬부슬 떨어져 내렸다.
더군다나 도약지점은 경사진 내리막이라 평소보다 몸을 더욱 앞으로 기울여야 점프가 가능했다. 바로 발 밑은 5층 높이 낭떠러지임을 감안하면 연습이 불가능한 실전이었다. 뿐만 아니라 지붕 끝 모서리는 삐그덕 거리는 철판으로 마감처리가 되어 있었는데 도약공간을 마련하는데 방해가 됐다. 최대 점프를 수행해 내기 위해서는 발 앞꿈치를 지붕 혹은 옥상 모서리에 걸쳐 점프하는데, 흔들거리는 철판마감 때문에 앞꿈치 걸치는 도약방법이 무서워졌다. 지붕 끝에 서자 나도 모르게 두 다리가 긴장되고 떨렸다. 그 와중에 건너편 착지할 옥상을 보자 옥상이 나를 유혹하기 시작했다. "그냥 뛰어! 엄청 쉬운 점프야!" "날봐! 거리도 가깝고 높이도 너가 자주 뛰어내리던 높이야." "점프하고 나면 이걸 왜 무서워했지? 라는 생각이들걸? 너도 알잖아?" "너가 발딛고 있는 곳은 그냥 무시해! 목표만 보고 점프해버려!"
옥상의 유혹에 넘어갔다면 나는 이 글을 쓰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아무리 착지할 곳이 쉬워도 지붕 끝에 두발을 딛고 있는 도약점에 집중해야한다는 것을... 도약점은 시간적으로 '지금'이고, 공간적으로 '여기'다. 그 둘이 만나 출발하는 것이 '시작'이다. 아직 오지도 않은 장미빛 '미래' 때문에 시작을 놓아버리는 태도는 '자만'이고 '방심'이다.
'Premeditatio Malorum' (프레메디타치오 말로룸)
- '최악의 상황을 예상하고, 대비하라
스토아 철학자들의 'Premeditatio Malorum' (프레메디타치오 말로룸) - '최악의 상황을 예상하고, 대비하라' 처럼, 이럴 때 일수록 최악의 위험을 상상하여 미리 대비해야 했다. 특히 불확실한 위험으로부터 내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두려움에 휩싸여 벌어지는 '허구적인 위험 시나리오'가 아니라 경험과 맞물린 '실제 위험'을 예상하고 제어할 필요가 있다. 대개의 경우, 실제 위험보다 자신의 상상이 만든 두려움이 크기 때문에 도전하지 못한다. 실제 위험을 알기 위해서는 위험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필요한데 나의 수준과 상태(메타인지), 장애물과 주변환경, 예상되는 사고의 결과(타박상~사망 등), 예상되는 사고의 발생할 확률 등을 고려해 한다.
여러 위험 시나리오들 가운데서도 가장 두려웠던 것은 제자리 점프 시 지면 반발력에 의해 지붕 커버가 벗겨지거나 모래 알갱이 때문에 미끄러져 낭떠러지 앞으로 고꾸라지는 것이었다. 이를 제어하기 위해 도약지점의 지붕 커버의 모래 알갱이들을 빗자루처럼 손으로 털어서 깔끔하게 제거했다. 지붕 끝의 철판 마감은 이리저리 살펴본 결과 심리적으로 두렵지만, 물리적으로 점프에 큰 위협요소는 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준비가 되자 촬영을 앞두고 나는 나의 원칙에만 집중했다. "도전의 주인공은 다른 어떤 것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다. 그러므로 점프의 시작과 끝은 카메라가 아니라 내가 결정한다." 2019년, 첫 브레이킹 점프(Breaking jump)는 이렇게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