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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이트 Jul 22. 2019

멧 선생 다녀가다.

비 맞은 벌개미취

 옆 밭 고구마 알이 들기 시작하자 그동안 잠잠하던 멧돼지의 습격을 받았다. 산속에 있는 밭도 아니고 돌담으로 둘러져 있고 집 옆에 있는 밭에까지 대담하게 들어오다니 놀랄 일이다. 진입로가 유일한 통로인데 노루망으로 막아 아래에는 돌을 놓아뒀더니 그걸 밀치고 밑으로 들어온 흔적이 있었다. 크고 무거운 돌로 바꿔서 눌러 놓았다.


우리 집 옆 밭에는 세 사람의 고구마가 심어져 있다. 밭주인인 동료와 산 중턱에 사는 이웃 그리고 나까지 조금씩 떨어져서 심었는데 집 바로 옆에 심은 우리 고구마만 피해를 입지 않았고 두 사람의 고구마는 뿌리가 파헤쳐지고 두둑에는 구멍이 뚫어져 있었다.


멧돼지를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고구마를 껍질은 까서 남겨놓고 알맹이만 먹은 걸 보니 입맛도 꽤 고급진 것 같았다. 후각이 발달하여 큰 고구마만 골라서 헤집어 놓았다. 귀촌 카페에서 멧돼지나 고라니에게 피해를 입은 사진과 글을 많이 보았지만 실제로 현장을 보니 마음이 먹먹하였다. 특히 땡볕에 앉아 고구마 고랑의 잡초 줄기를 하나하나 손으로 뽑아왔던 동료를 생각하니 얼마나 낙심할까 싶어 아직 소식을 전하지 못했다. 이웃 언니는 저렇게 들쑤셔 놓으면 고구마도 덜 달릴뿐더러 맛이 없다고 하면서 작년에 산 중턱에 심은 고구마를 하나도 못 건져 마을에 내려와 심었더니 여기까지 멧돼지가 왔다고 낙담을 하였다.


다음날 이웃 언니는 멧돼지가 자신의 밭에 심은 옥수수를 모두 자빠뜨려 놓았다고 사진을 보내왔다. 옥수수가 익어가기 시작하니 신통하게 알고 와서 뿌리째 뽑아 밭 전체를 절단 내었다고 했다. 전망 좋은 산 중턱에 자리 잡은 집이라서 멧돼지를 종종 목격하기도 하는데 겨울에는 수선화나 백합 같은 알뿌리 식물도 파헤쳐서 먹어치운다고 한다. 이웃 언니는 이젠 농사를 다 지었다고 거의 포기한 듯했다. 땅콩과 옥수수를 이렇게 키우기까지는 두둑을 만들어 모종을 심고 액비를 만들어 뿌려주고 하루에 두 시간씩 물주는 수고와 벌레에 쏘여 가며 풀 뽑는 고생을 해야 한다. 가족들 먹일 생각에 애지중지하며 거의 다 키워 수확할 날만 기다리는 작물을 하룻밤 사이에 망쳐놓으니 속상한 마음이야 어찌 다 말로 할까?


사 먹는 농작물과는 비교 불가이다. 일찍 심어 벌써 수확한 나의 옥수수는 최고의 당도와 탱탱한 식감으로 자칭 옥수수 킬러라는 이웃들에게 먹여본 결과 엄지를 받았다. 입 안에서 한 알씩 터지는 옥수수의 싱그러운 단맛은 별로 옥수수를 좋아하지 않던 나까지도 '내년엔 더 많이 심어야지.'라는 결심을 하게 만든다. 옥수수를 바로 따서 물만 넣어 압력밥솥에 십 분간 삶아 뜸을 들인 후 먹으면 맛있다. 옥수수를 따고 나서 하룻밤 지나면 당도의 30%, 이틀 밤 지나면 50%가 줄어든다고 하니 즉시 따서 먹는 옥수수의 맛은 안 먹어보면 모른다. 늘 아쉬운 듯이 옥수수가 부족하니 내년에 남편에게 두둑을 길게 만들어 달라고 해서 왕창 심어 옥수수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실컷 먹이고 싶다.


농사는 급한 나의 성격에 안성맞춤이다. 심은 뒤 석 달이면 수확이 가능하니 꽃씨를 심어서 다음 해에나 꽃을 볼 수 있는 꽃밭보다 훨씬 적성에 잘 맞는 것 같다. 이런 급한 성격을 고치려고 부단히 노력하나 타고난 성향이라 그게 잘 안된다. 남편이 가끔 나의 물불 안 가리는 급한 점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니 그럴 때마다 속으로 '곰처럼 느려 터진 마누라랑 한번 살아봐야 속 터지는 걸 알지.'라며 생각한다. 나는 여우는 못되고 그럼 저돌적인 멧돼지? 응?


수확철인 요즘이 무척 즐겁다.


이 맛있는 옥수수가 다 먹고 이젠 없다.
늦게 캔 감자라 큼지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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