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의 일기에 이렇게 썼다. '도무지 올라가지 않는 이 기분, 뭔가 획기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겨울부터 시작된 우울감이 사라지지 않고 봄까지 이어지니 몸이 아픈 것만큼이나 마음이 힘든 것도 견디기 쉽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아무 일없이 평탄한 일상에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불평을 만들어내는 자신이 어쩐지 뭔가 불길하긴 했다. 마음이 괴로울 때 들으면 좋다는 법륜스님의 강좌까지 들었는데 아래의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경제적으로 성공을 거둔 어떤 여자가 다 이루고 나니 허탈하고 사는 재미가 없다는 상담에 법륜스님의 처방은 이러했다. 자신의 부에 감사할 줄 모르고 그렇게 불평을 하는 마음은 불행을 가져온다면서 "있어봐, 교통사고가 나서 다리가 부러지든지, 갑자기 암에 걸리는 수가 있어. 그러면 지금 그 마음은 온데간데 없어질 테니까 기다리면 돼."
경제적으로 성공했으면 남에게 베풀든지 봉사를 하면서 지금 가진 것에 감사와 기쁨을 가지라는 결론이었는데 처방은 독했지만 상담을 신청한 그 여자분도 웃으면서 수긍했던 내용이었다.
나도 우연히 지난 일기를 들쳐 보았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무 일없이 평안한 날들의 연속이었는데(턱관절 장애가 있긴 했지만) 갱년기 우울이니 빈 둥지 증후군이니 하면서 혼자 우울의 바닥을 치고 있던 중에 당뇨 전 단계 진단을 받고 나니 일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별 탈 없이 이어지는 일상에 감사를 모르고 살다가 날벼락을 맞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든 셈이다.
진단 후부터는 건강한 식단과 운동의 일상화로 무척 바쁜 하루를 보낼 수밖에 없었는데 처음에는 마음이 몹시 힘들어서 혈당이 널뛰기를 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당이 치솟기 때문에 정보를 얻기 위해 가입한 당뇨 카페의 배너만 봐도 혈당이 올라갔다. 거기서 어떤 회원이 비 오는 날 걷는 게 좋다고 했는데 이유가 강둑을 울며 불며 걸어도 그걸 보는 사람들이 없어서라고 했다.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운동해야 하는 사람은 운동선수 아니면 당뇨환자일 것이다. 밥숟가락을 놓고 나면 오르는 혈당을 주저앉히기 위해 삼시 세끼 식후에 걸어야 하는 운명이 바로 당뇨인 것이다. 그야말로 '운동이 밥이다'. 그런 현실을 알고 난 후 내 마음은 암에 걸린 걸 알았을 때보다 더 힘들었다. 암은 수술과 항암이라도 하고 완치 진단을 받을 수도 있지만 당뇨는 평생 철저한 관리가 필요하니 나같이 의지가 약한 사람이라면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죽을 수도 있는 암은 충격이 더 강력한 건 맞지만 당뇨는 서서히 빠져드는 늪 같은 기분이었다. 결코 발을 담그고 싶지 않은 끈적한 혈당이라는 늪에 빠지지 않기 위해 나는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아침에는 샐러드와 계란 반숙, 그리고 통밀빵을 먹고 공원을 걸은 후 요가나 점핑 수업을 받으러 간다. 점심에는 야채를 먼저 먹고 단백질 반찬을 현미밥과 짜지 않은 나물과 먹는다. 그리고 실내 자전거를 삼십 분 탄다. 오후에는 좀 쉬었다가 저녁을 먹고 낮은 야산인 집 앞의 공원에서 오르막길을 걷고 온다. 집에 올 때는 십오층의 아파트 계단을 두 칸씩 하루에 두 번 오른다. 엡에 기록된 수치를 보면 매일 만이천 보 정도 걷는 셈이다.
삼시 세끼 운동을 하니 요즘처럼 습하고 더운 여름엔 땀이 많이 나서 샤워를 세 번씩 하게 된다. 그런데 오전의 공원과 저녁 어스름의 공원은 사람도 별로 없고 나무가 울창해서 시원한 데다 새소리까지 들리니 기분이 상쾌하다. 당뇨가 아니었으면 결코 몰랐을 세계였을텐데 어쩔 수 없이 시작하게 된 운동이지만 차츰 하체 근육도 생기고 배에는 복근이 가운데 수술 자국까지 보태서 111자가 되었다.
먹는 것도 신경 써서 식재료를 주문하고 매일 시장을 보니 건강한 식단으로 골고루 차린 식탁은 가족들에게도 환영받는다. 진작 이렇게 할 걸 뒤늦은 감이 있지만 게으르고 무지했던 내가 이렇게 변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주말에 시골집에 갈 때는 내가 먹을 밥과 반찬을 잔뜩 준비해서 아이스박스에 넣어서 간다. 남편은 텃밭의 농작물로 만들어서 같이 먹으면 되니까 별로 어렵진 않다. 외식도 하지 않고 끼니마다 열심히 식사 준비를 해서 먹고 온다.
한동안 잔디의 풀을 뽑지 않았더니 잡초가 기승이다. 차분히 앉아 풀을 뽑기엔 너무 덥고 모기도 많아 여름엔 시골집 관리가 쉽지 않다. 텃밭과 꽃밭은 장마철을 지나자 풀밭이 되었다. 깻잎을 좀 따 보려고 했더니 깻잎 열 장에 모기 한 방씩 물려서 따다가 말았다. 어차피 서리가 내리면 하루아침에 누렇게 말라죽을 풀들이니 그때까지 참으면 되는 일이다.
옆 밭은 풀이 사람 키만큼 자라 세렝게티가 따로 없어서 들어갈 수가 없다. 그래도 수염이 말라 익은 옥수수를 따야 하니 비장한 마음으로 풀을 헤치고 간다. 옥수수는 남편이 맛있게 먹고 있다.
농작물을 본격적으로 수확하는 시기가 되어 시골집으로 가는 마음이 즐겁다. 오이, 가지, 토마토, 고추, 부추, 상추, 방아잎 등을 따서 가져오면 일주일의 좋은 반찬거리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