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가뭄이 심했던 탓인지 올해는 농사가 별로 잘 되지 않았는데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동네 사람들도 그랬다고 하니 조금 위안이 된다. 고추, 가지, 토마토가 그러더니 땅콩과 고구마가 작년에 비해 수확량이 확연히 줄어서 딱 우리 집 식구 먹을 만큼만 나왔다.
고구마 모종 반 단인 오십 개를 사서 심은 수확
가을 농사는 잘 되어 알타리와 무는 씨를 뿌린 대로 모조리 싹이 나 솎아주기 바빴다. 한랭사를 씌운 배추도 착실하게 속이 차오르고 있어서 어쩌면 김장 김치를 담을 수 있겠다. 직접 키운 배추로 담은 김장은 맛이 다르다던데 나도 드디어 그 맛을 보게 되는 것인가!
헐랭이 농사는 고사하고 '되는 대로 짓는' 형편이다 보니 잘 되면 잘 되는 대로 안 되면 그만인 농사를 몇 년째 하고 있는 중이다. 핑계는 항상 있다. 주말에만 와서 돌보는 농사라 어쩔 수 없다고 속 편하게 생각하지만 그래도 다른 집에서 잘 짓는 농사를 보면 은근히 부아가 나고 욕심이 마구 생긴다.
알타리는 그런 내 마음을 달래주듯이 풍성하게 잘 자랐다. 무는 아직 성장이 더디지만 비료를 하지 않으니 다만 수확 때까지 커지기를 기다릴 뿐이다. 햇살이 따사로운 일요일 오후에 남편과 알타리를 뽑아 잔디밭에 퍼질러 앉아 다듬기 시작했다. 아직 자잘한 알타리는 밭에 남겨 두었는데 커다란 소쿠리에 가득 담긴 알타리를 손질해서 마대자루에 담아보니 무거울 정도로 그득하다.
일단 아파트로 가져오긴 했는데 저 많은 것을 어찌 김치를 다 담을까 걱정이 되어 잠이 오지 않는다. 손질해서 씻어보니 싱싱한 이파리가 살아나 더 많아 보인다. 도저히 감당이 안 될 것 같아 김치 담을 때마다 도움을 받는 이웃에게 알타리를 나눠주고 나머지를 소금에 절였다. 숨이 푹 죽고 나니 그제야 양이 적당해졌다. 한식의 달인인 이웃이 와서 익숙한 솜씨로 양념을 섞어 쓱쓱 치대 주고 가셨다.
작은 김치통으로 세 통을 만들고 나니 무겁던 마음이 가벼워지고 쓸쓸하던 가을이 조금은 덜하다. 농사는 잘 안되어도, 너무 잘 되어도 탈이다.
아직 맛이 익지 않았지만 맛있을 게 틀림 없다.
요즘 우리 집은 자연 채식 열풍이 한창이다. 지루성 두피염인 줄 알았던 첫째의 심한 증세가 건선으로 밝혀져 식이로 치료 방향을 잡고 맹렬한 기세로 실천하고 있다. 채식에 관하여 읽은 책만 여러 권에다 식이를 바꾸니 증세가 좋아져서 이제 우리 집 냉장고는 온갖 채소로 넘쳐 난다. 나 역시 아침은 샐러드를 먹기에 첫째가 채식에 본격적으로 합류하니 시장 보기와 채소 씻기를 대신해주어 훨씬 편하다.
샐러리즙을 꿀꺽 마시는 첫째가 육식의 해로움에 대해 열변을 토하니 우리 집은 당분간 고기와 유제품은 구경을 못하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나물 볶을 때도 기름을 못 쓰게 해서 맹물에 나물을 볶아서 소금간만 해서 먹는 형편이다. 채식 열혈 신봉자인 딸과 입이 짧은 남편이 한 식탁에서 먹어야 하니 주부인 나는 어느 정도까지 요리를 조절해야 할지 은근히 고민이 된다.
그래도 식구 중에 나 혼자서 건강식을 하던 차에 첫째가 채식에 가담하여 함께 하니 딸이 요리해 준 음식을 얻어먹을 수도 있고 무엇보다 혼자 풀떼기(?)를 씹고 있지 않아서 덜 외롭다. 앞으로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 현미 채식과 자연식을 즐겁게 꾸준히 해나갈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