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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이트 Oct 22. 2016

오늘은 이사하기 좋은 날

평생을 두고 꿈꾸었던 장면이었다.


세간살이를 싣고 시골집으로 이사 가는 꿈이야말로 직장 생활을 견디게 하는 유일한 것이었다.


셋집에서 백 미터쯤 떨어진 새 집으로 이사하는 건 내가 그려왔던 장면과는 좀 차이가 있지만 어쨌든 오늘은 이사하기에 딱 좋은 날씨였다.


단풍이 들락 말락 하는 가을산은 더 풍성한 색을 기대하게 하고 아직 초록인 들판은 싱그러운 향을 뿜어내고 있었다.


아침에는 좀 선뜻하게 추웠으나 해가 오르자 곧 기온은 올라가서 입었던 겉옷을 벗고 활발하게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뭔가 부탁할 일이 있을 땐 남동생만큼 부리기 좋은 사람은 없어서 어제 급하게 남동생에게 연락하여 트럭과 인력을 확보할 수 있겠냐고 물으니 돈만 주면 부하 직원들을 모아서 오겠다고 한다.


점심이나 거하게 사 먹일 요량이었는데 남동생은 나쁜 상사가 될 수 없다는 이유로 일인당 십만 원씩을 줘야 한다고 해서 그럼 두 명 정도 데려오라고 했는데 냉장고를 들려면 세 명은 있어야 한다면서 건장한 장정 셋을 데려 왔다.


남편은 허우대는 멀쩡하나 고관절 골절을 치료한 바 있고 남동생 역시 헌칠한 키에 허리디스크 환자이다.


나는 조금만 동동거리면 드러누워야 하는 체력이고 보니 우리 셋은 말 그대로 무용지물일 뿐이어서 켈리를 함께 수강했던 분이 한참 연하의 남편을 데리고 와서 일사불란하게 일을 진행할 수 있었다.



냉장고 세탁기 소파 침대가 가장 큰 것일 뿐 나머지는 자질구레한 짐인데도 끝도 없이 나오는 잡동사니에 나는 슬슬 지쳐가기 시작했다.


20개월 동안 지낸 흔적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꼼꼼하기만 해서 진도가 더딘 남편과는 딴판인 다른 집 남자들은 시키지 않아도 마무리까지 깔끔하게 끝내줘서 속이 시원했다.


남동생은 두 시간 정도 머물다가 빨리 가야 한다며 나더러 돈을 내놓으라고 재촉했다.


아침도 굶고 조경 작업을 지켜보느라 지쳐 있던 남편은 마지못해 돈을 꺼내 주고는 내게 짜증을 냈다.


남편 꼴을 보아하니 어서 밥부터 먹여야 해서 빨리 점심 먹으러 가자니까 또 재촉한다며 까칠하게 반응한다.  


설렁탕 한 그릇을 다 먹고 나니 일 잘 하는 사람들의 도움으로 걱정했던 이사가 빠르게 해결되어 다행이라며 남편은 웃었다.


남자는 그저 밥부터 든든히 먹여놔야 탈이 없는 법이다.



새 집에 들어갈 땐 밥솥이 먼저 들어가야 한다고 들어서 나는 아름다운 동행 암 카페의 회원이던 이 준 전기밥솥을 소중하게 안고 제일 먼저 집으로 들어갔다.


꼭 믿어서라기 보다는 상병의 고마운 마음을 간직하고 싶어서였다.


우리 집에 올 때마다 백운봉을 보며 절을 하고 합장을 하는 상병이 할머니 같다고 놀렸는데 어쩐지 똑같이 할머니 같은 내가 자연스럽게 생각되었다.


원래 오늘은 카페의 오랜 회원들과 집들이까지 하기로 했지만 다들 암환자이다 보니 약속은 밤새 안녕이 될 때가 많아서 미리 잡은 일정은 꼭 무산되고야 마는 징크스가 있다.


심지어 얼마 전까지 시드니에서 살다가 나주로 간 회원은 오늘 모임을 위해 나주배를 미리 부치기까지 했는데 바짝 마른 입안을 배로 와삭와삭 씹으며 미안하게 먹었다.


내가 이처럼 애정 하는 암 카페 아름다운 동행에는 집을 지을 것이라고 언질만 했을 뿐 집 짓는 일에 관한 일은 브런치에만 올리고 있다.


남의 집 구경이야 늘 즐거운 일이겠지만 뜻밖에 암에 걸려 어쩔 줄 모르는 회원들에게 너무 염치없는 일인 것 같아 나름대로 배려해서 하는 것인데 사람들은 우리가 집을 짓자 의외로 시기하는 눈치가 보인다.


건축업에 종사하는 남편의 친구들은 남편이 집을 지은 데 축하와 질투를 함께 보내와서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도 마누라가 안 아프고 집 안 짓고 싶다."


아프다는 마누라를 꼭 팔고야 마는 남편이 가소로워 몰래 비웃었다.


집 짓겠다고 내가 먼저 나섰을 땐 급한 나의 성격부터 고쳐야 한다고 속을 박박 긁을 땐 언제고 지금은 기분이 무척 좋아 보이는 남편이 그저 밉살스럽게 보인다.


그런데 집을 다 짓도록 마음고생을 안 한 탓인가!


세상일은 공평한지 나는 요새 방향을 잃은 배처럼 마음 둘 곳이 없어 속을 끓였더니 입 안이 모두 헐어서 항암 할 때도 못 겪어본 구내염에 시달리고 있다.


매운 것도 뜨거운 것도 견딜 수 없어서 저녁은 고구마라테로 대신했다.


인생, 너 참 잘났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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