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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조흐 Oct 22. 2019

추억은 추억 그대로일 때 가장 아름다운 법

구여친은 구여친으로, 구남친은 구남친으로 남겨야 하는 이유


얼마 전 제주도 여행에서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추억은 추억 그대로 남기는 것이 가장 아름답다는 것. 과거의 아름다운 추억을 회상하며 다시 그 장소에 가더라도 과거의 추억만큼 아름답지 않다는 것. 어쩌면 추억이기 때문에 내 기억 속에서 미화되었을지도 모른다. 또는 그 당시에 함께 있었던 사람 덕분에 그 순간이 더욱 소중했을 수도 있다. 


1년 5개월 전의 나는 고향집에서 머물다가 갑자기 제주도로 떠났다. 인생에 변화를 주기 위해 떠난 여행이었다. 사실 여행이라기보다는 거주하는 환경만 바꾼 채로 노트북으로 계속 일만 했다. 집에만 있으면 계속 게을러졌기에,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어렵게 결정한 선택이었다. 그렇게 제주도로 가서 초반 며칠은 친구와 놀고 나머지 시간에는 숙소에서 매일 노트북으로 일만 했다.


숙소는 제주시에 있는 게스트하우스였다. 하루의 일과는 <밥-일-밥-일-밥-일>로 매일매일 일만 하면서 살았다. 조금 특이한 형태의 게스트하우스였는데 1층은 카페 및 식당이고, 2층 위로는 숙소, 지하는 바 형태의 그런 구조였다. 나는 제주도에 머물면서 매일 일에 집중하려고 했기에 숙소 안에 카페와 식당이 모두 있는 장소를 찾아다녔다. 그러다가 가장 적합한 숙소를 발견해서 무려 2주 동안 한 장소에서 머물게 된다.


내가 머문 게스트하우스(이하 게하)는 가족이 함께 운영하는 곳이었다. 나는 매일 게하 1층 식당에서 밥을 먹고, 나머지 시간에는 노트북으로 일을 했다. 그 당시에는 돈이 많이 없는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무턱대고 제주도로 향했다. 돈이 많이 없었기에 매일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만 했다. 그래야지 내일도, 모레도 제주도에서 살 수 있었다. 내가 제주도로 향한 이유는 <일을 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집에 있으면 계속 게을러졌기에 의도적으로라도 그러한 환경에 나를 내몰고 싶었다. 이러한 내 전략은 성공적이었다. 나에게 꼭 맞는 전략이었던 것이다.



제주도 게하살이 2주 동안 있었던 일들

같은 게하에서 2주 동안 머물면서 많은 일이 있었다. 게하를 운영하는 사장님과도 친해졌고, 사장님 가족분들과도 인사를 하고 지냈다. 매일 식당에 내려와서 밥을 먹고 일을 하는 것을 보고 언젠가부터 저녁을 드실 때는 밥을 같이 먹자고 하셨다. 게하에는 사장님 가족분들과 일을 돕는 스텝들이 있었다. 매일 점심이나 저녁은 사장님 가족분들과 스텝들이 함께 밥을 먹었는데, 장기 투숙객인 나도 어느새 밥을 같이 먹게 되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사장 누나가 "밤에 보말 따러 갈 건데 같이 갈래?"라고 물어보셨다. 뭔가 재밌어 보여서 바로 같이 가자고 얘기했다. 제주도에서 여기저기 여행을 다녀보기는 했지만 제주도 현지인과 함께 어떤 활동을 해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바다에서 보말을 딴다니 그것도 밤에! 어느 장소로 갈지도 궁금했고, 보말이 무엇인지도 궁금했다. 그렇게 스텝을 포함한 총 5명이 차를 타고 출발했다. 모든 것이 다 새로웠다. 이렇게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에 너무 감사했다.


그렇게 보말을 무사히 잘 따오기도 하고, 밤에 돌아와서 보말을 바로 삶아 먹기도 했다. 또 다른 날에는 무엇인가 손질을 하는 것을 도와드리기도 하고. 밥을 챙겨주셨으니 자발적으로 설거지를 하기도 했다. 비록 제주도의 여러 관광지를 돌아다니는 것은 아니었지만, 일상의 하루하루가 소중한 나날들이었다.


사장 누나는 몇 개월 뒤에 결혼을 한다고 했다. 내가 게하에 머무는 절반 정도의 날에는 사장 누나의 예비 남편분이 제주도로 놀러 오셨다. 그분이랑도 친해져서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있으니 하루가 주말 같다는 이야기도 해주셨는데 아직도 그 말이 기억에 남는다. 이것 외에도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있지만 과거 회상은 여기까지 해보겠다. 내가 제주에서 지냈던 수많은 기억들은 모두 소중하게 남아있다.



추억은 추억이기에 아름다운 것일까?

시간을 거슬러 다시 현재로 돌아와 보자. 얼마 전 제주 여행에서 우연히 내가 예전에 머물렀던 게하 주위를 지나가게 되었다. 그래서 한 번 방문해서 1층 식당에서 밥이나 먹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막상 가려고 하니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사장 누나는 잘 지내고 있으신지. 남편분과 결혼은 잘하신 건지. 가족분들은 다 잘 지내고 계신지.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 나를 기억하실지 등등. 여러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무엇 때문에 두려움이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과거의 소중한 추억이 더 이상 소중한 추억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나를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잊힘에 대한 두려움이었을까? 여러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은 가보기로 했다. 생각만 계속하는 것보다는 일단 실행해보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기에. 


그렇게 게하 식당에 들어가서 인사를 했다. 들어가 보니 사장님 가족분들 중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셨다. 인사를 나눴는데 나를 기억하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당일에 새로 오는 스텝이 있다고 했는데, 나를 새로 오는 스텝으로 착각하셨다. 과거에 가장 많이 소통을 한 것은 사장 누나와 예비 남편분이었는데 두 분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사장 누나는 결혼을 잘하셨는지 여쭤보니 아직 결혼을 안 했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결혼은 그냥 늦게 가라고 했다는 말씀과 함께. 아마도 어떠한 이유로 인해 두 분이 결혼을 하지 않게 된 것 같았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 괜히 머쓱해져서 얼른 밥을 주문했다. 결혼을 해서 잘 살고 계실 줄 알았는데 그렇게 되었다니. 상상 속의 이야기는 더 이상 현실이 아니게 되었다. 잠시 후 밥이 나와서 맛있게 먹었다. 식당의 메뉴들을 보니 1년 반 전의 메뉴들과 함께 새로 나온 메뉴도 보였다. 식당 곳곳에는 연예인과 같이 촬영한 사진이 보였다. 내가 몇 년 사이에 많이 변화했듯이 게스트하우스와 가족분들도 과거와 달리 많이 변화해 있었다. 하지만 추억 속 식사메뉴와 맛은 그대로였다. 


밥을 다 먹으니 차 한 잔을 주셔서 맛있게 잘 마셨다. "차는 나만 주시는 건가?" 했는데 옆에 혼자 온 손님에게도 차를 건네주셨다. 절에서 오신 또 다른 손님은 고구마 반쪽을 나눠주셨다. "이것이 제주도 인심?"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 외에도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들었다. 역시 과거의 추억은 추억일 뿐이고. 추억은 추억이기에 아름다운 것일까? 지나간 기억들은 미화된다. 아름다운 추억만 남는다.



또 다른 추억에 관하여

과거에 식당 라운지의 한 모퉁이에서 노트북으로 일을 하던 것처럼 그날도 밥을 먹은 뒤 노트북을 켰다. 오늘부터 남은 제주도 일정의 숙소를 예약하기 위해서. 편도로 제주도 여행을 오기도 했고, 지인과 함께하는 날 외에는 숙소를 예약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여기 게하에서도 머물까 하다가 제주시에서 더 먼 곳으로 떠나기로 했다. 내가 머물고 싶은 숙소, 바다 앞 경치가 좋은 곳에서 며칠 지내고 싶었다. 


이번 여행 일정 중 또 다른 장소에서 지낼 때도 추억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위치는 동쪽이었는데 과거에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농협 하나로마트에서 장을 봤던 기억이 떠올랐다. 지나가다 보이길래 한 번 들어가 봤다.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하나로마트는 그때 그 당시처럼 똑같은 자리에, 비슷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과거의 기억과는 다른 감정이 느껴졌다. 나도 많이 변했으며, 지금의 하나로마트도 분명 많은 것이 변했을 것이다. 이번에도 추억은 추억 그대로 남기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로마트를 갔다가 점심으로 돈가스를 먹는데 식당 내에서 익숙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흘러나온 노래는 방탄소년단의 불타오르네(FIRE). 또 과거의 추억이 하나 떠오른다. 한창 BTS의 노래가 흥하고 있을 때 불타오르네를 따라 부르고는 했다. 소중한 사람들과 노래를 함께 따라 부르며 깔깔거리고는 했는데.. 이 모든 것이 제주도에서 있었던 추억이기에 더 잘 떠오른 것 같다.



구여친은 구여친으로, 구남친은 구남친으로

잘못하면 이번 여행은 과거의 추억을 따라 걷는 여행이 될 뻔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이 들 때마다 계획을 수정해버렸다. 이제는 추억은 추억이기 때문에 아름답다는 것을 알기에. 추억은 추억으로 남기고 싶기에. 지나간 기억들은 미화된다. 아름다운 추억만 남는다.


구여친은 구여친으로, 구남친은 구남친으로 남길 때 가장 아름다운 기억으로 간직할 수 있다. 과거에 너무 집착하면 현재를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 많은 경험자들이 웬만하면 구여친과 구남친에게 연락을 하지 않는 게 좋다고 말한다. 소중했던 추억이 현실이 되는 순간 그 반대가 되어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과거는 과거일 뿐, 현재는 현재일 뿐. 추억은 추억일 뿐. 추억은 추억이기 때문에 아름답다. 지나간 기억들은 미화된다. 아름다운 추억만 남는다. 추억은 추억 그대로 남기고 살아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구여친은 구여친으로, 구남친은 구남친으로. 


우리 옛 추억에 취해 
독한 네 사랑에 취해
너의 전화번홀 누르게 돼
아마 받지 않겠지만
미안해 
술이 문제야 문제
자꾸 너를 떠올리게 해

ㅡ<술이 문제야> 中에서


혹시 모르니 장혜진, 윤민수의 <술이 문제야>라는 노래처럼 술은 조심하도록 하자. 술에 취해 추억을 끄집어내 흑역사를 만들지도 모르니. 물론 내 얘기는 아니니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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