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이 몽롱해질수록 너의 모습은 선명해져 가는데
난 네 곁에 남아 있어야만 했다.
우리의 만남이 예전처럼
편안하지 못하겠지만
난 널 떠날 수 없었다.
이제 난
내 곁에 네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만족해하며 행복하다 느껴야 한다.
내가 널 사랑하기에
널 구속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널 사랑하기에
내 자신을 구속할 수 있었다.
시간이 자꾸만 자꾸만
앞으로 흘러간다.
그 앞엔 분명 길이를 알 수 없는
낭떠러지가 있는데
시간은 멈출 줄 몰랐고
난 그 속에서 허우적대며
물길을 가르려고 하지만
처음부터 내겐 벅찬 일이었다.
나의 운명을 거스를 수 없다면
흐르는 대로 흘러가는 수밖에
그러면 더 이상의 슬픔도
더 이상의 아픔도, 그리움도 사라지겠지.
이것이 나의 마지막 모습인가.
술의 노예가 되어
옛 추억을 그리워하며
쓴웃음과 노여움으로
얼룩진 나의 모습이 처량하여
다시 한잔의 술을 마신다.
초췌해 보이는 거울 속 나의 모습을
초점 없는 눈동자로 노려보며
역겨운 나의 모습에
구역질을 해댄다.
정신이 몽롱해질수록
너의 모습은 선명해져 가는데
난 너의 모습이 선명해질수록
너와의 이별을 망각하게 되어
흐뭇한 미소를 띄운다.
아침이 되어
정신을 가다듬고
지난밤의 일을 떠올리려 하지만
너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너의 모습을 떠올리려 해도
떠올릴 수 없다.
눈이 내린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시기한 양
그것들을 죄다 덮어 버리고 자신의 위용을 자랑하며
세상을 하얗게 만들어 버렸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름다운 눈보다
눈으로 인해 하얀 옷을 입어 버린
시청 앞의 크리스마스트리를 아름답다 했고
눈 덮인 겨울 산이 아름답다 했다.
단지
사람들은
동네 아이들이 만든 입 없는 눈사람을
힐끗힐끗 쳐다 볼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