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조리원 생활
/생후8일/
돌도미가 태어나기 한참 전 일이다.
카페에서 이야기를 하던 중에 아내가 종이에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뭐 적어?" 물어보는 나의 질문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갑자기 악상이 떠오른 천재 음악가 같았다.
다 적었는지 나에게 종이를 건네주었다.
"한번 읽어봐"
'喜穩' 뜻 모를 한자가 적혀있었고, 한자를 모르는 나를 위해 밑에 한글이 적혀 있었다.
'기쁠 희, 평온할 온' 적혀있는 대로 읽어봤다.
"희온"
"어때? 아기 이름이야" 아내의 얼굴을 보니 이미 희온이라는 이름이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며칠간 아내와 함께 고민했던 아기의 이름이 정해지는 순간이었다.
"응, 좋다. 김희온"
오늘 퇴근 후에 주민센터에서 출생신고를 했다.
이것저것 적을게 많았던 출생신고서에 '희온'이라는 이름을 적었다.
돌도미는 이렇게 희온이가 됐다.
/생후9일/
아이의 웃는 모습을 보니 어느새 나도 덩달아 웃고 있다.
큰일 났다. 이미 딸바보다.
/생후10일/
하루하루 성장하는 네 모습이 신기하면서도 대견하다.
그런데 희온아. 시도 때도 없이 걸려오는 수유 콜에 엄마는 조금씩 미ㅊ.. 아니 지쳐가는 것 같아.
나중에 크면 엄마한테 잘하렴.
/생후11일/
볼살이 통통하게 차오르는 네 모습이 너무 사랑스럽다.
빵떡이 같은 네 모습도 사랑스럽다.
/생후12일/
요즘 조리원에서 출퇴근을 하고 있다.
조리원 근처에 회사가 있어서 천천히 걸어도 10분 만에 도착할 수 있다.
출근도 금방 하고 퇴근도 금방 해서 좋은데 뭔가 이상하게 불편한 느낌이 든다.
그냥 기분 탓이겠지.
/생후13일/
희온이 사진을 보는 사람마다 놀란다.
머리숱이 왜 이렇게 많냐고.
그런 사람들에게 말한다.
"등에도 털이 엄청 많아요. 원숭이를 낳았나 봐요."
/생후14일/
조리원 선생님들이 희온이는 참 순하다고 한다.
밤에 친구들이 울어도 잘잔다고. 많이 보채지도 않고 참 순하단다.
희온아.
넌 누굴 닮은 거니?
엄마 아빠 둘 다 한 고집 하기에 걱정 많이 했는데. 고마워 :)
(집에서도 이렇게 순하고 건강하게 잘 지내자)
/생후15일/
볼 때마다 자더니
오랜만이야! 눈 뜬 희온아
/생후16일/
요즘 네가 그렇게 잘 먹는다면서?
엄마 팔목에 핏줄 보니깐 알겠다 야.
/생후17일/
어느새 늠름해진 눈빛.
잘생겼다. 우리 딸.
/생후18일/
왕엄지발가락을 보니 내 딸이구나 싶다.
유전자라는 게 이렇게 무서운 거구나.
/생후19일/
방귀 뀔 때면 신생아가 아닌 것 같다.
방귀 소리도 어른처럼 우렁차고,
안 뀐척하는 네 모습을 보니 소름이 돋았다.
너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면서
사실 다 알고 있는 거지?
/생후20일/
집에 가기 이틀 전.
겁이 나지만 이제 집에 가고 싶은 마음도 든다.
'희온아 준비됐니?'
(조리원 선생님들 말에 따르면.. 희온이가 요새 좀 보챈다고 한다.. 집에 갈 때 돼서 왜 그러니.. TT)
/생후21일/
"잘할 수 있겠지?"
서로에게 물었다.
두 사람이 살던 집은 한 명의 식구가 늘어서 세 사람이 사는 집이 되었다.
갓난아기 한 명이 늘었을 뿐인데 짐은 배로 늘었다.
안 그래도 좁은 집이 희온이 짐으로 가득 찼다.
조리원보다 우리 집이 편할 거라는 생각은 1시간을 넘기지 못했다.
오래 집을 비워둬서 공기가 차가운지 집에 오자마자 무한 딸꾹질을 시작했고,
아빠의 유리멘탈은 산산조각 나 버렸다.
어디 돌까지 키워주는 조리원 없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