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글 에세이
약비님이 오신다
웬만히 바람이 불고 비가 오면 고즈넉해져 한껏 감상에 젖어든다. 그러나 그런 호사를 누리는 시간이 언제였는지 가물가물이다. 비가 오는 날이 줄어들고 오는 양도 많지 않아 물이 마른 댐과 저수지를 볼 때마다 기후변화의 폐해가 일상에 미치는 현실을 안타까워해야 했다. 지역에 편중되는 비가 좁은 한반도에서도 심해졌다. 어느 곳에서는 물난리가 날 정도로 많은 비가 오고 다른 곳에서는 제한급수를 염두에 두고 물절약에 온 역량을 동원해야 하는 가뭄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처한 날씨의 극과 극이다. 비가 오는 풍경을 보며 사색에 젖어드는 호강을 누리지 못한 것이 꽤나 오래되었다. 섬지역에서는 일주일에 하루 급수를 하고 나머지는 목마른 날을 견뎌야 하는 고통의 시간을 살고 있는지 이미 오래되었다. 강수량이 생존을 두렵게 하는 위기를 섬주민은 살아내고 있는 것이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부착된 절수방법과 동참을 호소하는 안내문을 볼 때마다 착잡함에 불안한 날들을 시작한 지가 반년이 넘은 듯하다. 이제 비는 정서적 감성을 끌어올리는 바라봄의 수준이 아니라 삶의 질을 결정하는 생존의 지경이 되었음을 인지하지 않을 수 없다.
어제 오후부터 비님이 오신다. 풀썩거리며 먼지를 날리는 대지가 젖어들고 있다. 평년보다 일주일이나 열흘을 더 일찍 핀 벚꽃은 이미 꽃비를 쏟아내기를 끝내고 내리는 비를 맞이하고 있다. 보통의 비가 아니다. 약비다. 꽃마리의 꽃빛깔이 비를 머금자마자 투명해질 듯 선명해진다. 복사꽃 향기가 분홍의 색깔을 농밀하게 감싸고돈다. 비릿한 배꽃의 냄새가 과수원을 벗어나 멀리 퍼진다. 생명을 살리는 비를 맞이하며 감사의 묵념을 한다. 살이의 팍팍함을 이유로 적절한 날씨의 고마움을 잊고 살아왔다. 지겨운 싸움만을 죽을 듯해대는 정치판에 쏠렸던 관심은 얼마나 쓸모없는 정신의 낭비였던가. 은행문을 들락거리며 두꺼운 서류에 서명을 해대며 얻어내야 하는 삶의 수단이 주인공이 된 돈의 구함은 얼마나 궁핍한 가치였던가. 누군가의 일탈이나 누군가의 성공사례를 나열한 가십거리에 흥분하거나 부화뇌동했던 시간은 얼마나 가벼운 처신이었던가.
대지를 살리는 비, 산을 푸르게 해주는 비, 사람의 갈증을 풀어주는 비가 온다. 비는 모든 생과 무생물을 지속가능하게 하는 원천인 것이다. 한번 사는 삶을 쓸모없이 백해무익한 정치인이나 정치단체에게 관심을 쏟아 지나치게 지지하거나 배척하는데 쓰지 말라고, 가진 것에 만족하고 분수에 없는 부귀를 탐하지 말라고, 지금과 지금의 경계를 양심껏 귀히 여기라고 비님이 내린다. 나를 반성하고 성찰하게 해주는 비님이다. 존재하는 모든 생명을 살리는 약비님이 오신다. 찬양할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