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인이 반려자가 됐다
새 식구로 말티즈와 푸들의 믹스견인 말티푸를 루이란 이름으로 맞아들인 지 2년이 돼 간다. 왼손 주먹만 하던 아이가 이제는 오른쪽 팔뚝관절 아래만 하게 몸집이 컸다. 그래도 체구가 조막만 해 안아 들면 가슴에 쏙 들어온다. 천성이 소심하고 예민해서 작은 소음에도 온몸을 떨며 침대 아래나 소파 아래로 몸을 숨긴다. 체질이 약해서인지 하루에 한 끼 이상은 먹지도 않는다. 가족이란 인연을 맺은 후 일 년여 동안에는 몸이 허해 감기며 기관지염이며 배탈에 설사까지 달고 다녀서 힘들게 했다. 갓난아기를 키우는 정성 이상의 관심과 노력을 쏟아주어야 했던 기간이었다. 산책을 나가면 주인의 다리밑만 돌며 다른 아이들의 곁에는 가지도 못하고 겉돌기만 하던 녀석이 이제는 쫄랑거리며 앞서 가기도 하고 다른 견종들에게도 서슴없이 아는 체를 한다. 배앓이를 하는 횟수도 줄었다. 정기적으로 가는 병원행 말고는 응급으로 찾아가는 병원행이 거의 없어졌다. 볼수록 대견하다.
가족이 된다는 것은 그 생명 자체를 전부 다 온전한 상태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이로움과 해로움을 따지면 참된 가족이 될 수 없다. 가족이란 옳고 그름의 가름대상이 아니어야 한다. 처음 가족의 구성원이 되었을 때에는 작고 여린 생명체를 돌보아 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부담스러웠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내가 돌봄을 받았던 것 같다. 침대에 누우면 옆자리에 몸을 말고 같이 눕는다. 텔레비전을 보면 소파 위로 올라와 무릎을 베고 누워 함께 화면을 보며 꼬리를 살랑거린다. 현관문을 나서면 외출하는지 먼저 알고 문 앞에서 기다린다. 정년이 얼마 남지 않은 직장에서 하루를 마감하고 퇴근을 할 때면 엘리베이터 소리만 들려도 현관 앞에 나와서 훌쩍훌쩍 쪼그만 몸통을 흔들며 반겨준다. 사랑스럽기가 말이 필요 없다. 이렇듯 나에게 끝도 없는 애정을 퍼부어 주는 루이에게서 받는 정서적인 안정감은 값으로 메길 수가 없다. 어느 날 집으로 들어온 복덩이가 맹목의 사랑으로 나를 돌봐주고 있는 것이다.
루이는 이제 반려견이 아니라 조건 없는 신뢰와 사랑으로 나를 나답게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가족이다. 밥을 먹을 때도, 잠을 잘 때도 함께다. 내가 있는 곳에 루이가 있다. 루이가 가는 곳에 내가 같이 간다.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는 행복도움 상태가 뿌듯하다. 루이에게서 생활의 평온감을 선물 받는다. 그렇다 보니 내가 동행해 주는 반려견이 아니라 반대로 나를 돌봐주고 있는 루이에게 내가 반려인이 되었음을 느낀다. 역할입장이 바뀐 주객전도다. 아무렴 어떤가 이심전심으로 서로의 존재에 기대어 살아갈 수 있다면 최고의 관계다.
루이와 함께 더 많은 시간을 많은 장소에서 제약 없이 누리고 싶다. 단지 반려견과 함께 갈 수 있는 곳이 제한적인 것이 아쉽다. 반려동물 천만 가구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제한구역이 너무나 많다. 유명 관광지나 국립공원에 반려견 금지 표지판이 입구에 매정하게 세워져 있다. 숙박시설도 부족해서 멀리 함께 여행을 가기엔 허용된 범위가 극히 제한적이다. 반려동물 동반 가능한 숙소와 식당등은 추가 비용을 만만치 않게 지불해야 한다. 물론 일부 몰지각한 이들이 질서를 지키지 않아 눈살을 찌부리게 하고 있다는 것은 개탄스럽다. 하지만 제도적 장치가 더 확대되어 루이와 함께 어디든 마음 놓고 부담 없이 여행을 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다린다. 핏줄로 연결된 형제자매보다 끈끈하다. 오랜 시간을 알고 지낸 친구들보다 믿음이 간다. 매일 얼굴을 마주하는 직장동료들보다 나를 잘 알아주고 믿어주는 반려견에게 딸린 반려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