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잠을 자면서 복잡하게 얽힌 생각들을 머릿속에 문장으로 정리를 했는데 깨어나서 막상 글로 쓸려니 단 한문장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머리에 쓴 글이 잠꼬대였거나 푸념의 독백이었나 보다. 그렇지 않다면 잠 속에서의 생각들이 지나치게 많았을지도 모르겠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겹쳐 하나의 문장을 다른 하나의 문장이 덮어쓰기를 했었을 것이다. 뇌를 자극하던 기억이 백지가 아니라 먹지처럼 짙고 무겁게 머리를 짓누른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화장실에서 대변을 본 뒤에 뒤처리를 하지 않은 듯 찜찜하다. 하고자 하는 일을 시작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정지하고 있는 것 같다. 선잠을 자면서 꾸는 꿈은 대부분 악몽이었다. 악몽들을 뇌에 기록하는 것이 좋았을 리 없다. 그래서 썼다 지우고, 지우고 다시 쓰기를 반복했을 것이다. 그렇게라도 되살아난 기억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여러 해 전 있었던 일들이 생생하게 재현되기도 했었다. 있었는지 없었는지 분간이 가지 않는 일들도 머릿속을 헝클어뜨렸다. 좋은 감정을 가졌던 일들은 대게 떠오르지 않고 모호했거나 불편한 감정으로 채웠던 일들은 구체적으로 살아났다. 기억도 좋지 않은 습관처럼 꺼려졌던 시간을 자주 찾아들어가는 것이다. 나에게서 멀어진 사람들과 내가 멀리 보낸 사람들에 대한 인연의 끌림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한순간에 폭풍 속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한번 본 사람에게 무작정 끌리게 되면 맹목이 되고 만다. 내 눈만이 찾을 수 있는 매력에 빠지는 것이다. 사랑에 빠지면 그래서 말릴만한 특효약이 없다. 한눈에 반했다는 말은 사실 한순간에 정신을 놓았다는 것이다. 사람에게 팔린 정신은 단시간에 수습하기가 불가능하다. 최소한 눈을 덮은 콩깍지가 떨어질 때까지는 제정신이 아님을 인정해야 한다. 정신을 차리고 나서는 마음의 피해복구에 나서야 한다. 그러므로 사람과의 어울림도 폭풍 속의 관계다. 만나고 헤어짐에 잘 대처를 해야 한다. 보지 않으면 죽을 것 같던 사람도 감정의 틈이 생겨 멀어지기 시작하면 열정이 희미해진다. 첫눈에 반했다고 첫사랑이 아닌 것처럼 맹목의 함정에 빠졌던 사람에게서 벗어나면 또 다른 맹목의 폭풍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인연은 그렇게 예기치 않은 이어짐과 단절을 반복하면서 복합적으로 얽혀 삶의 범위를 팽창시킨다.
강력한 태풍이 올라오고 있다고 몇 날 전부터 나라전체가 들썩이고 있다. 길고 거친 장마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피해가 중첩될 것이 분명하다. 당연히 지나칠 정도로 세심하게 대처를 해야 한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태풍이 할퀴고 지나간 자리에 상흔들이 깊이 남게 될 것이다. 사는 시간의 모두가 폭풍 속의 아우성이다. 정신적인 고역이나 육체적인 고통에 처한 시간만 폭풍이 아니다. 행복했다고 믿었던 그 시간에도 여전히 폭풍의 전야에 있었을 것이다. 폭풍의 범위 내에서 인생은 흔들렸다 안정되기를 반복하면서 이어지는 것이다. 얼마나 철저히 대응을 하고 빨리 치유를 해내는가가 폭풍 속을 숙련되게 살아가는 방법이다. 인연의 비바람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주저하지 말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