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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글 Mar 09. 2024

수동적인 외도

새글 에세이시

수동적인 외도        


본격적으로 풀벌레들이 울기 시작하고 나서 삼 일째 잠을 못 잡니다. 가을을 적응하기 위한 불면 혹은 불잠 중입니다. 눈을 뜨고 있거나 눈을 감고 있어도 눈두덩이 화끈거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불잠이라고 말해도 단순한 언어의 작명에만 머무른 것이 아닙니다. 불면과 불잠은 일면 상통이 아니겠습니까. 머리가 무겁고 눈꺼풀은 쳐지는데 눈을 감으면 온갖 상념들이 들이닥쳐 정신이 한없이 멀뚱합니다. 오늘 밤도 그렇습니다. 한증막에서 온 힘을 다해 땀을 내고 몸을 혹사시키고 왔습니다. 평소 같으면 온탕과 냉탕만 왔다 갔다 하다 지쳐 나오고 말았을 사우나에서 일부러 숨이 턱에 머무는 한증막에 들어가 모래시계가 두 번씩이나 위아래를 교대할 때까지 땀을 훑어내며 몸을 호되게 다뤘습니다. 잠이 올 것 같아 누워보니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옷을 갖춰 입고 동네를 한 바퀴 빠른 걸음으로 돌았습니다. 찬 가을 저녁이 정신을 더 말짱하게 합니다. 독한 술이라도 한잔 해봐야겠습니다. 도수가 높은 불 소주를 한 모금 마십니다. 뱃속이 난리가 났습니다. 그러나 정신은 더 또렷해집니다.

    

가을을 언제나 내 몸인 것처럼 한 몸으로 받아들일까요. 그럴 수 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나보다 가을의 거부가 심합니다. 나는 항상 가을에게 제발 받아달라고 사정을 하는 편에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잠을 일부러 청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끝까지 버티다 쓰러질 때까지 사실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버텨보려 합니다. 완전하게 하룻밤쯤 가을에게 나를 내어준다고 그리 억울할 일도 아닙니다. 해마다 이쯤 나는 여전히 잘 못 살아왔고 앞으로도 사는 동안 변하지 않을 듯합니다. 오늘은 속에다 불을 지르는 불 소주 몇 잔과 함께 날을 새보렵니다. 잘 살겠다고 다짐해 줄 사람도 없고 그렇게 살갑게 말할 필요도 사실 없습니다. 내가 나면 될 텐데 굳이 누군가에게 나를 맞추며 살 이유가 없다는 것을 살아가면서 어줍지 않게 깨닫습니다.


나에게 바라는 것이 가장 많은 이는 나뿐입니다. 타인은 나에게 나를 위해 바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불편을 덜기 위해 혹은 자신을 위해 나에게 어떤 걸 하라 마라 요구하는 것입니다. 나를 위한다는 명목은 내세우는 것뿐이지 진심이 아닙니다. 창문을 활짝 열어버렸습니다. 가을밤이 아예 침대까지 들어와 같이 누워버리라고. 오늘 진하게 가을밤과 동침을 불사해 버리렵니다. 밤새도록 나한테 왜 이리 모지냐고 투정을 하렵니다. 나로 인해 가을도 날밤을 한 번 꼬박 새우면 혹여 내일부터 겸연쩍어 도망갈지 모르겠지요. 오늘 뜨겁게 가을을 껴안고 외도를 해 보겠습니다. 누가 더 불처럼 뜨거운 체온을 밤새도록 발산할 수 있는지 본때를 보여 줄랍니다. 그런데 귀뚜라미들은 다 어디 간 걸까요. 가을밤에 맞지 않게 적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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