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히 내가 뜨거웠다

1-1 애비 없는 자식

by 오구TREE

아버지가 떠났다. 대문 앞에 매달린 낯선 등불. 막내 동생은 울기만 하고 큰 누나는 그저 음식을 나른다.

“누부(*누이,누나)야, 내가 아무리 동생이라도 누부보다 힘세다. 저 가서 앉아 있어라.

일 내가 할게.”

“니 바보가. 니 이 집에 아들이다. 가만히 서 있어라잉.”


꾸벅.

”아이고야. 니가 셋째 아가. 이름이 뭐꼬?“

”김준호입니더.“

‘누군지 말도 안 해주고 내 이름만 물어보노. 그냥 대답이나 하고 치아야지.‘

얼굴도 이름도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말을 걸면

그저 아버지의 친구거나 먼 친척이겠거니 하는 게 속이 편하다.

어른과 아이란 불공평한 관계임이 틀림없다.


“하하, 아 예. 아재요. 수육도 좀 잡수이소. 초상집에서는 잘 무야 된다 안캅니꺼.“

어머니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나는 헤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결론짓고 나니 한결 자유롭다.


“이 자슥아 니는 아무리 철이 없어도 그렇지 가만히 서 있기만 하나?

어? 아, 오셨습니꺼 아재. 이쪽으로 앉으이소.”

준철이 형은 항상 나를 나무랐다. 오늘도 그렇다. 힘으로 못 이길 상대는 아니다.

그렇지만 형을 이기려 들면 안 된다고 배웠다. 이제는 더 이상 이곳에 없는 아버지로부터.


"막냉이가 아직 국민학교 댕기는데 자들은 불쌍해서 우야노.

우얄라꼬 저거 마누라한테 이 짐을 다- 지게 하냐는 말이다."

"내 말이 그 말 아이가. 이 집 안사람이 그래 점잖고 양반이라 카던데

이 험한 세상에 아 넷을 혼자 우예 키우노."

술에 취해 각자의 기억에 있는 아버지에 대해 말하던 사람들, 화투장을 탁탁 치던 아저씨들,

혼자가 아니지만 홀로가 된 어머니를 위로하던 친척들.

모두가 한 마디씩 거들었다.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우리 모두가 안다.

그러니 듣고 싶지도 않았지만 입을 막을 방도가 어디 있겠는가.


“하이고.. 이거 언제 다 치우겠노. 어무이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 방에 가서 쉬시소.

내랑 준정이랑 둘이서 하꾸마.”

준정이 누나도 평소와 똑같이 어머니부터 챙긴다.

"엄마! 그만하라고! 언니야랑 내랑 한다니까!"

어머니는 가만히 있는 법이 없는 사람이다.

그걸 알기에 이런 날마저 누이가 잔소리를 한 게다.

준정이는 역시 신경질적으로 어머니를 대한다.

이런 날이라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 이 시골 땅에 남겨진 우리들은 여전히 똑같이 살고 있다.


아버지는 사진관을 운영하셨다. 사람들은 우리 집이 부자집인 줄로 착각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전형적인 바깥양반이다. 버는 족족, 생기는 것마다 친구며 이웃에게 나눠주기 바빴다.

게다가 애초에 이놈의 김 씨 집안은 지지리도 가난한 집이었다.

아버지는 바깥양반 노릇을 하다 바깥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아이고. 아이고. 이 양반이 내가 그렇게 사진관에서 자지 말라꼬 캐도 안 듣디만

결국엔 이렇게 가네. 내보고 우짜라꼬. 내보고 우짜라꼬. 아이고-”

이런 집에 어머니는 도대체 왜 시집을 온 걸까. 엄마네는 동네에서 쌀도 퍼다 나누는 부잣집이었다는데.

풍족하진 않아도 부족하지도 않게 자란 엄마는 결국 가난한 집에 애비없는 자식들을 홀로 키우는 처지가 되었다.


"준의 어무이요, 이것 좀 가가이소. 우리 집에서 배추를 뽑았는데 마이 남아가꼬 이거 뭐 우리가 다 못 묵습니더."

호의에 연민이 곁들여진 이웃의 성의를 받아 가며 살기 시작했다.

집에 생긴 것은 배추만이 아니었다. 어디서 해 온 싸리나무인지 드럽게 아프게 생겼다.

새로 생긴 것이 있어도 걱정은 없었다.

'설마 우리 어무이가 내를 때리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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