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쁘게 살았지만 아무것도 남지 않은 하루를 돌아봤다
서울살이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오롯이 나를 위한 하루를 보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세탁소에 가서 밀린 빨래를 싹 돌렸고 돌아와 샤워를 마치고 청소를 했다. 혼자 살기에 알맞은 공간이라 청소도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예능을 틀어 놓고 잠깐 멍을 때리다가 휴대폰 알람이 울려 다시 세탁소로 향했다. 건조기를 돌리고 다시 집에 와서 어제 먹다 남은 피자 두 조각을 먹었다.
지금까지 몰랐었는데 나는 꽤 예민한 위장을 가졌었다. 먹기도 많이 먹어서 그런가보다 싶었는데 무엇이든 하루 지난 다음 남은 것을 어떻게든 조리해서 먹어도 배는 똑같이 아팠다. 식은땀을 흘려가며 비워내고 났더니 다시 핸드폰 알람이 울렸다.
세탁소에 가서 빨래들을 꺼내 집에 왔다. 멈춰 있던 예능을 다시 켜고 빨래를 갰다. 빨래를 다 개고 예능을 다 봤더니, 예약해둔 미용실 방문 시간이 한 시간 정도 남았다. 최근에 종영한 드라마를 켰다. 시간이 아까워 드라마를 보면서 모바일 게임을 하다가 책을 보다가 했다.
하루를 꽉 채워야 한다는 강박감 때문인지 하지 못했던 것들을 전부 하고 싶었다. 욕심이 많다보니 뭐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미용실 방문 시간이 다가왔다. 예약 시간보다 10분 정도 일찍 도착했는데, 예약 시간 보다 대기를 20분 정도 더 했다. 조금 기분이 나빴지만 오늘은 쉬는 날이고 사소한 것으로 기분을 망치기 싫었다.
책도 없었고, 이어폰도 없어서 아까 하던 모바일 게임을 마저 했다. 한참을 빠져 있었더니 내 차례가 되어 머리를 깎았다. 파마를 했는데 미용사 분이 파마를 오랜만에 하시는 거냐고 물었다. 오랜만에 해서 잘 말리지 않는 것 같다며 열 처리를 세 번이나 했다.
보통 두 번 정도 하는데 잘 안말리는 것 같다고 멋적게 웃었다. 어차피 모바일 게임을 계속 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관 없었다. 세 번째 열처리가 끝나고 중화제를 뿌리고, 머리를 헹궜다.
미용실에서 볼 때만 해도 잘 말렸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나와서 잠깐 걷다가 휴대폰 셀카로 얼굴을 비추니 그냥 그랬다. 그러고보면 어디서 하든 파마는 마음에 든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새로운 영화가 개봉해서 예매를 해두었는데 대충 50분 정도 붕 떴다. 집에 들렀다가 극장에 갈까 하다가 날씨가 더웠고 집에 들렀다가 나오기엔 너무 귀찮아서 바로 영화관으로 향했다. 처음 방문한 곳인 줄 알았는데 아주 오래전에 한 번 왔던 적이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영화관에 가서 예매표를 뽑고 시계를 보니 입장 시간까지 30분 정도가 남았다.
7층에 서점이 있었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면서 '서점이 여기 있었네' 했는데 서점에 들어가보니 이 곳 또한 왔었던 곳이었다. 그 때는 책을 산 게 아니라 문구류를 샀던 것으로 기억한다. 포인트 적립하시냐 그래서 등록 안됐을 거라고 하며 핸드폰 번호를 쳤더니 등록 되어 있어서 머쓱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요즘은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생각에 경제, 재테크 서적에 관심이 많아 무슨 책이 있나 둘러보려 갔는데 어떤 여자가 그 앞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내가 둘러보고 싶던 곳이었는데 옆에 서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을까봐 에세이 코너로 갔다.
표지가 예쁘고 귀여운 책들이 많았다. 인스타그램에서 봤던 재밌어 보이는 책도 있었다. 10분 정도 지났길래 재테크 코너로 다시 갔는데 그 여자가 그대로 있었다. 좀 짜증이 났지만 책이 재밌나보다 싶어 다시 등을 돌렸다. 에세이 코너에서 눈길이 가는 책을 사려다가 영화 보기 전에 짐을 들기가 싫어서 영화 다보고 와서 사자고 마음 먹고 서점을 나왔다.
영화를 보면서 팝콘을 먹고 싶었는데 아까 먹은 피자의 여파가 남아 그냥 커피를 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애초에 저렴하고 양 많은 커피를 사올 걸, 영화관에서 톨 사이즈만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4,000원이나 주고 샀다.
샷을 두 번 이상 내렸는지 진하고 썼다. 괜찮았다. 영화가 두 시간 반이나 했다. 해가 쩅쨍할 때 들어왔는데 나오니까 이미 밤이었다. 저녁을 뭘 먹을까 생각하며 집에 오다가 서점에 들르지 못한게 생각났다. 인터넷으로 사야겠다 생각했다.
저녁 메뉴부터 책을 못 산 것, 머리 한 값까지 생각해서 오늘 얼마를 썼는지 계산하다가 아무것도 못 사들고 집에 왔다. 이미 9시가 다 되어갔다. 저녁을 거르고 드라마를 켰다. 드라마를 보는데 시간에 자꾸 눈이 갔다.
출근을 앞두고 점점 늦은 시간이 되어가는 오늘이 싫었다. 아침부터 부지런하게 움직여서 뭔가를 많이 했지만 막생 생각하니 제대로 한 게 하나도 없는 것 같다.
어영부영하다가 벌써 열두시 반이 되었다. 하루를 잘 보낸 것 같으면서도 만족스럽지 못함에 슬펐다. 이럴거였으면 그냥 가족들이라도 보러 당일치기로라도 고향에 다녀올 걸 싶기도 했다.
어차피 해야할 일들을 했고 하고 싶은 것들을 했는데도 이렇게 허무하다니. 혼자여서 외로운건지, 우울한 기분이 도졌는지, 출근하기 싫어서 그런건지 이유야 갖다 붙이면 그만이지만 어떤 이유던 간에 우울하다. 또 출근을 위해 더 늦기 전에 자야한다는 사실도 슬프다.
우울한 기분은 정말 한도 끝도 없이 바닥을 치게 만드는 것 같다. 무척이나 찐득해서 빠져나오기도 쉽지가 않다. 분명 내일도 우울하겠지만 우울보다 중요한 일들이 있기 때문에 잠깐 잊을 뿐, 아마 나는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가지 않는 이상 이 속에 빠져 살지 않을까 싶다.
뭔가 많이 했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 같은 허무함만 남은 하루를 그렇게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