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뿌쌍 Apr 28. 2020

4세 아이의 감정이 자라는 소리를 듣다

44개월 만에 깨달았다. 육아란 대화의 완성이라는 것을!



그 모든 것은 양말 한 켤레 때문에 시작됐다



물론 문제는 나에게 있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내가 얻은 기쁨 중에 하나는 옷을 입혀가며 예쁘게 꾸며주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아침마다 아이에게 하는 '꽃단장'은 원했던 딸을 키우듯 대리 만족하는 심리가 강했다.


문제는 44개월이 다 되어가는 아이가 여전히 그 스스로 양말을 신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진지하게 두 손으로 양말을 잡고 하면 충분히 가능해 보이는데, 뜻밖에도 아이는 징징거리면서 양말 속에 발을 집어넣지도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이렇게 반응하면 결국엔 엄마가 다 해주겠지라는 생각 때문일 거라 느껴졌다.  


"다시 잘 신어보자"를 몇 번 반복하다가 화가 났다.

"언제까지 엄마가 다 해주기를 바라? 엄마가 매일 양말 신겨 주는 걸 봤으면 어떻게 하는지 알잖아. 이제 너도 스스로 신으려는 노력을 해야지"


평소 엄마가 다 해주기를 바라는 녀석이었다. 외동이라 그런가 생각도 해 봤다. 맘 카페에서 보니 이맘때 양말은 물론이고, 빠른 아이들은 바지까지 척척 입는다고 했다. 이쯤 하면 스스로 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왜 이 녀석은 의지도 노력도 없이 엄마엄마~~~ 만을 외쳐대는가, 어디까지 내가 다 해주어야 하는가, 육아라는 게 끝이 없다는 생각에 가끔은 숨이 턱턱 막혀오기도 했다.



예쁜 게 뭔가요? 책임감으로 버티고 있어요.


나에게 육아는 책임의 완성이라는 의미가 절대적이었다. 그 책임감이 모성애라면 난 기꺼이 100%라 생각했다. 내 행동에 책임을 지기 위해 저 어린 생명을 지켜내는 것이었지 사실 아이가 얼마나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지도 모르고 지나온 날들이 대부분이었다. 육아는 어깨에 올려진 무한한 무게였다.


세상 모든 엄마들이 그러할까. 출산 그 이후로, 아이를 내 품에 처음 안았던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마음이 편해 본 적이 없다. 어쩌면 예민한 성격 탓일 수도 있다. 이후 아이가 자랄수록 육아에 대한 부담이 점점 덜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출산 전의 그 새털처럼 가벼운 상태는 결코 될 수 없었다. 가끔은 아이에 대한 원망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되뇌었다. '너는 아무 잘못이 없어. 엄마, 아빠가 너를 세상에 내어 놓았으니까' 지극히 이성적으로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감정적인 깊은 늪에 빠져 드는 날들이 많. 았. 다.       




세상에 고작 양말 짝 따위 같은 이렇게 별것 아닌 걸로 화를 내는 미친 x이 있다면 그건 바로 나였다. 양말 한 켤레 조차도 신어보려 노력하지 않는 아이에게 불같이 화를 내고 돌아서니 울고 서 있는 아이가 보였다. 그러나 아이를 안아주지 못했다. 화를 낸 내 모습이 너무 부끄러워 아이 얼굴을 바라볼 수 없었다. 나는 먹던 밥을 아무 의미 없이 꾸역꾸역 입으로 집어넣었고, 아이도 혼자 눈물을 닦고 옆에 앉아 밥을 먹기 시작했다. 가슴은 통곡하고 있었지만 티를 낼 수도 없이 애써 강한 척했다.

 

어떤 연유로 우리 둘이 밥을 먹다 그깟 양말 하나 때문에 이런 폭풍이 불었는지는 모르겠다. 손발이 찬 이유로  집안에서 양말을 꼭 챙겨 신는 나는 습관적으로 아이도 양말을 신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는 신겨놓는 양말마다 어느샌가 훌러덩 벗어던졌다.


맨발이면 발이 시릴 텐데, 그럼 감기에 걸릴 텐데, 감기에 걸리면 또 병원 순례를 이어갈 텐데, 그럼 그 고생은 온전히 내 몫이 될 텐데 왜 저 녀석은 저렇게도 필사적으로 양말을 어젖히는 것이란 말인가... 뭐 이와 같은 경험에 의한  방어적인 생각들이 머릿속을 지배하면서였을 것이다. 아이에게 양말을 신고 있어야지 처음에는 좋은 말로 시작했다가 '이제는 네가 스스로 신어보자'라며 생각을 발전시켰을 것이고, 뜻밖에도 양말 한 짝조차 엄마가 신겨주기를 바라는 아이의 수동적인 모습에 실망했을 것이다.      




내일 아침 아홉 시!


밥을 다 먹고 나서 그릇들을 정리하는 동안 아이는 혼자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다. 그리고 특별함 없이 함께 씻었다. 아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천진한 모습으로 이 모든 것들을 함께 했지만, 나는 아이의 눈을 차마 마주치기 힘들 정도로 괴로운 상태였다. 그래서 아이와 잘 준비를 마치고 침대에 들어가기 전 이 묵직한 감정을 풀어내고 싶었다.


"우리 대화를 좀 할까?"


"엄마 왜?"


 "아까 엄마가 화를 내서 싫었지?"


"응"


아이의 짧은 대답에 가슴이 쿵 무너진다. 평소 속내를 잘 말하지 않는 녀석이었다.


"엄마가 화를 내서 미안해. 엄마는 네가 양말을 혼자 신으려는 노력을 않고 잉잉거리기만 하니까 화가 "


"엄마 나도 양말을 못 신어서 미안해. 하지만 엄마 난 아직 어리잖아. 조금만 더 크면 다 할 수 있어"


"그래, 미안해. 엄마가 미안해"    


라고 말하는데 눈물이 솟구쳐 오른다. 미안하다 말하며 아이를 안으려는데, 아이가 나를 밀쳐낸다.


늘 안아달라 말하던 녀석이었다. 한 번도 나를 밀쳐낸 적은 없었다. 아, 이런 게 상처인가 싶은데 그만큼 아이에게도 상처가 되었을 거라 생각했다. 그동안 엄마로서 잘못한 일들만 떠올라 점점 괴로워졌다. 아이와 함께 침대로 올라가 누워 아이를 다시 안으며


"엄마가 어떻게 하면 너의 화가 풀릴까?"


라고 물었다. 그러자 아이는 내 품에서 벗어나 돌아서 누우며 대답했다.


"내일 아침 아홉 시"


눈물 콧물을 닦아내며 일어나 아이의 돌아 누운 등을 바라보며 다시 묻는다.


"그게 무슨 뜻이야?"


그러자 아이는 나를 향해 다시 돌아누우며 말했다.


"엄마, 내일 아침 아홉 가 되면 화가 풀린다는 말이야"


"그럼 내일 아침 아홉 시가 되면 엄마 다시 좋아해 줄 거야?"


라고 묻자, 아이는 쿨하게 "응"이라고 답하며 다시 돌아누웠다.




엄마 사랑해


머리를 한 대 세게 맞은 느낌이었다. 이 녀석이 양말은 못 신어도 마음은 벌써 이렇게 다 자라 있었구나... 하는 생각에 감정이 터져 올라 버렸다. 그동안 나는 아이와 함께하는  대부분의 시간들이 똥을 싸면 닦아주고, 기저귀를 바꿔주는 그 상태 그대로 생리적인 욕구만 해결해 주면 되는 거라 착각을 했다. 아이의 감정이 이렇게나 소중하게 자라나고 있는 것은 알아차리지도 못하면서 육아는 지겹고 힘든 것이라고만 생각해 왔던 것이다. 아이의 감정을 이해하고 살펴주기보다 나의 희생과 고통을 앞서 생각했던 까닭이다. 그렇게 이기적이고 무지했던 엄마가 아이의 의연한 대처(!)에 깨달음을 얻는 순간이었다.  


그러자 어느 순간부터 아이가 엄마에게 마음을 닫아 버린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고, 겁이 나기 시작했다. 어떻게 다시 되돌릴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아이가 엄마에게 상처 받았던 지난 시간들을 극복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오열하던 흐느낌은 잦아들었고, 조용히 눈물을 닦으며 여러 생각으로 마음이 복잡한 그때였다. 아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사랑해"


그 소리에 고개를 돌려 보니 이미 아이는 곤잠들어 있었다. 그럼에도 비몽사몽 잠에 빠져들며 했던 아이의 마지막 그 한마디는 엄마를 사랑한다는 이었다. 그때 깨달았다. 모든 걸 다 감싸주는 한결같은 사랑은 부모인 내가 아니라 오히려 아이가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아이는 외로운 짝사랑을 해오는 동안,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엄마를 보며 얼마나 상심했을까, 얼마나 외로웠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아파 터져 나갈 것만 같았다. 내 안에 존재하던 이기적인 엄마가 무너지고 있음을 느꼈다. 아니 나를 다시 태어나게 했다는 표현이 다.



육아란 아름다운 소통이었음을...


그 후로 두어 시간을 잠든 아이의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눈물을 흘다. 그러면서 부모로서의 자세에 대해 여러 생각을 정리다. 그리고 하루가 다르게 아이의 감정이 자라나고 있음을, 아니 내가 상상할 수 없었던 그 이상으로 아이의 감정이 폭풍 성장하고 있음을 인정했다. 두 번 다시는 아이의 감정을 다치게 하는 그 어떤 화도 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날 밤, 아이를 대하는 나의 모든 것들은 그렇게 리셋되었다.  


그리고 난 깨달았다. 더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임을, 육아란 이토록 아름다운 소통며, 감동이고,  아이가 부모를 깨우치게 하는 것 또한 육아였음을! 더 이상 짝사랑하는 외로운 아이는 없다!

이전 06화 자식을 직접 가르쳐 보고 깨달았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