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고 나와 나 자신에게 물었다. 너는 어느 시절로 돌아가고 싶니? 과거30대 나의 화려했던 시간을 추억하는동안 그 스스로 미화를 거듭했던이유였을까. 언제 나에게 그토록 멋졌던 시간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그때 그 시절 전성기는 추억 속에서 '넘사벽'이 버렸다.
이따금씩 찾아오는 혼자가 좋았다. 무엇보다 혼자 있는 시간에는 부지런해졌다. 외로움을 생산적인 에너지로 승화시키고, 성취하는 시간으로 즐겼더라는 표현이 옳다. 지난 내 삶을 가만히 돌이켜 보면생에 대전환을 맞이하고, 한 단계 도약하는 점프가 이루어질 때마다 나는 늘 혼자였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연애의 휴식기를 좋아했고, 이별은 그다지 슬픈 일이 아니라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덕분에 혼자 있는 시간을 만끽하고 새로 시작을 할 수 있는 에너지를 채울 수 있었다.
여러 시험을 준비하고 합격했을 때마다 그러했고, 주어진 한 달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책을 쓰는 과정도 그러했다. 서른 중반, 일에 집중해 좋은 성과를 내는 시간에도 외로움은 일상에 자리한 절친 같은 존재였다. 어쩌면 극한 고독 속으로 의도한 채 밀어붙이고, 그 속에서 생산적인 창작의 결과를 만들어 냈는지도 모른다. 달리 말하자면 외로움이라는 나약한 감정을 방패로 삼아, 실은 내면에서 엄청난 집중력을 만들어냈던 것이 아니었을까.나는 그런 일련의 과정들을 매우 즐기는 사람이었다.
물론, 출산 이후로 이 모든 것은 완벽하게 끝이 났다. 아이러니하게도 꼬물거리는 아기와 함께 하루 종일 지내는 시간은너무나 바쁘면서도 무척이나 외로웠고, 당연하게도 창의적인 그 어떤 것도 생각나지않았다. 글을 한 줄 읽을 수도, 쓸 수도 없었던 고갈된 영혼... 그랬다. 그래서 나 같은 유형의 사람에게 차분히 집중할 시간을 갖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불행한 일이고, 혼자 있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일이었던가를 깨닫게 되었다.
현실은 부모가 되었다는 무거운 책임감을 내던지고 도망칠 수도 없었다. 그렇게 아기와 함께 하는 일상에 물들어가듯 둘이 살고 셋이 사는 생활에 점차 익숙해졌다. 물론 그 고통에 끝은 있었다. 한 살, 두 살, 세 살, 네 살... 아이가 자랄수록 나는 점차 회복되었고, 이젠 이처럼 글을 쓸 수 있는 혼자만의 시간도 허락되었다.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에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아이'라는 소중한 존재와 공생하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은만 다섯 해가 다 되도록 부단히 진행 중이다.
그와 같이 일상을 공유하는 시간들 속에서 이따금씩 한계를 마주할 때도 있다. 엊그제 일요일이 그러했다. 모처럼 나와 아이 오롯이 둘이서만 보내야 했던 하루였다. 늦잠을 자고 일어나 목장길을 잠시 산책하고 와서아이는 마당에서 물놀이를 하게 하고 난대학원 기말고사로 제출해야 할 리포트를 시작하기로 계획했다.
아이는 '더울 때는 물놀이가 최고지~'라고 그 스스로 말하며, 샌들을 벗고 수영복을 입은 앙증맞은 몸으로 하얀 목욕통에 입수했다. 난 그동안 신나는 동요 메들리를 마당 한가득 울려 퍼지도록 틀어놓고, 여러 과일을 깎아 아이 곁에 놓아두는 등 약 30여분 동안 '아이로부터 나를 자유롭게 하기 위한' 모든 세팅을 마쳤더랬다.
이제 다 됐다, 숨을 내쉬며 물놀이를 하는 아이 옆 파라솔 의자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찾아둔 자료를 한참 형광펜을 칠하며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햇살이 눈부시게 빛나는 단독주택 시골 마당의 일요일 오전은 꽤나 평화로웠다. 맨발을 따스하게 간질이는 햇살 아래 더없이 싱그러운 유월의 녹음으로 둘러싼 풍경은 아름다웠다. 목가적인 정적과 흙냄새에 뒤섞인 시골 공기, 집 주변을 둘러싼 식물들이 뿜어내는 생명력 넘치는 에너지는 쉼 없이 울려 퍼지는 동요 리듬에 맞춰 우리 주변을 리드미컬하게 부유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파라솔 그늘 아래 읽는 '건축과 인간 행태' 수업의 과제를 수행해 내기 위한 POE 조사에 대한 연구논문은 더없이 흥미로웠다. 건축학이라는 학문에 눈뜨며 새로운 지적 자극에 매료된 나는 여러 영문/국문 자료를 읽느라 집중했기에 아이에게 시선을 주지 못한 건 당. 연. 했. 다!
그렇게 약 10여 분 집중했을 즈음이었다. 아이가 엄마를 가만히 둘 리가 없다. "엄마, 물 마시고 싶어요"라고 해서 물도 한 컵 가져다주고, 수박도 한 입 베어 물게 해 주고 온갖 수발을 다 들어가며 자료를 계속 읽어나가는데,
아이는 말했다.
"엄마, 이제 그만 물 뺄까?"
그 물을 채우기 위해 준비했던 만큼의 30분조차도 나를 가만히 두지 않는다니... 아이의 물놀이를 엄마가 옆에서 하릴없이 지켜봤더라면 아이는 그 스스로의 놀이에 몰입했을 것을, 어쨌거나 엄마가 다른 일을 하는 것이 싫다는 표현으로 들렸다. 세상에 청개구리도 이런 청개구리가 없다. 조금만 참았으면 좋았겠지만 어쨌든 나는 폭발했다!
집중력을 흩뜨리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내가 육아를 한다니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모르는 나 초보 엄마는 폭발했던 것이다. "엄마가 무엇인가를 집중해하고 있을 땐 엄마를 좀 가만히 내버려 둬. 어떻게 너는 엄마가 계속 너만 바라보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니?"라고아이에게 말했다. 그러자 예상치 못했던 아이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이제 곧 다섯 돌을 바라보는 아이는 나의 기세에 전혀 눌리지 않았다. 되려 차분하고도 너무나 또렷하게 말했다.
"알았어! 엄마를 가만히 내버려 둘께.
그런데 엄마, 내 옆에 있을 땐 엄마도 일하지 마!!!!"
머리를 쿵하고 맞은 듯이 말문이 콱 막혔다. '대든다'는 행동도 대견했지만, 아이의 바람이 너무나 솔직해서였다. 그런 나를 노려보고 씩씩거리고 있는 아이를 바라보다 그만 웃고 말았다. 또 실패다. 근사한 엄마는 되지 못했다.
아이와 함께 하는 대화는 힐링이라고 느낄 때가 있다. 아이의 독특한 시각과 저 작은 머리에서 떠올렸을 감성과 표현들을 경험하노라면 사회생활 그 어디에서도 느껴볼 수 없는 새로운 감각을자극한다. 아마도 이것이 더 늦기 전에 아이 하나 세상에 내어놓고 키우는 것이 나의 la belle epoque를 만들어 내는 기적이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나의 la belle epoque는 더 이상 원하는 많은 것들을 누리고 해 보았던 나의 30대 과거를 추억하고 그리워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분신과 같이 세상에 나온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들이 전성기로 기록될지도 모른다는 불확실성에 대한 확실성을 짐작해 본다.
어느 시절로 돌아가고픈지 스스로에게 물었던 질문에 대한 답은 아마도 Present가 아닐까.
나는 틀림없이 출산 이전의 내 여유로운 생활로 돌아가고 싶을 거라고 내면의 대답을 짐작했더라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는 이전의 내 모습 어느 것 하나 다시 돌아가서 되돌리고 싶을 만큼 미련이 없었다. 나름대로 매 순간을 후회 없이 지나왔기에 나의 대답은 바로 지금 현재, 이 순간이 소중하고, 머물고 싶은 La Belle epoque다.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혼자만의 시간! 외로운 시간은 분명 생산적이며, 창의적인 활동을 만들어 주는 것이 분명하기에 나는 집에 일찍 오라는 아이에게 말해줬다.
"엄마는 혼자 있을 때 많은 일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늦게까지 사무실에서 할 일이 많아. 그걸 시하가 이해해줬으면 좋겠어"
"응, 알았어"
"시하야 엄마 갔다 올게"
"응, 알았어. 엄마 갔다 와"
이렇듯 의젓하게 말하다가도 엄마의 모든 관심을 독점하고 싶은 아이의 심리를 이해하는 줄타기를 한다.
내 시간을 내가 집중해야 하는 일을 위해서 온전히 쓰고 싶은 엄마,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는 초보 엄마와 그런 엄마의 관심을 받기 위해 머리를 써야 하고, 또 이해해주어야 하는 만 4세 아이가 공생하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의 시간들이다.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육아로 만들어지는 라 벨 에포크는 Present!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