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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감상문] 고난과 하나님의 선교

선교적 해석학으로 본 고난의 의미

by 김모찌




# 본문 요약

고통의 문제에 답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사랑과 고난이라는 역설을 제시하신다.

고난을 논하는 일은 늘 힘겹고 불만족스럽다. 그러한 한계를 마주하면서도, 이 책의 각 저자들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이 세상의 문제와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지를. 규명해 보려는 선교적 해석학의 관점에서 고난의 문제를 다루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과 세상의 고통을 끌어안는 마음을 함양하는 데 도움이 될 작지만 알찬 책이다

사랑이 우리를 하나님과 함께하는 고난으로 초대한다. 우리는 고난 받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관계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하나님의 사랑 공동체를 무한히 확장하는 일에 부름 받았다. / 스티븐 테일러 “고난에 관한 선교적 해석” 중에서

제자들은 그냥 박해를 받는 게 아니다. 예수께서 친히 행하신 하나님 나라의 일을 세상 속에서 증언하는 역할을 감당하기 때문에 박해를 경험한다. / 이강택 “성전과 선교” 중에서

신앙 공동체의 고난은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고 세상을 회복하시는 도구다. 인간과 피조 세계의 고통과 연약함은 새 창조를 위한 몸부림이다. …. 이 모든 고난, 고통, 연약함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델이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고난, 가난, 연약함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공동체다. / 정성국 “그리스도의 고난, 가난, 연약함에 참여하는 사람들” 중에서

재난의 시대에 위로와 소망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요한계시록의 따뜻한 선교적 복음이야말로 적실한 메시지다. ….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교회당 안팎에 전하기 위해 선교 여행의 걸음을 내디딘다면, 통전적 선교의 결실은 하나님이 책임지신다. / 송영목 “고난 중 선교” 중에서

1장 고난에 관한 선교적 해석

- 하나님의 선교를 다시 정의하기

- 결론 : 함께 고난 받으시는 하나님

2장 성전과 선교

(고별설교가 보여 주는 예수와 제자들의 사명과 고난)

- 새로운 성전에 이르는 길과 성전 교제의 목적

- 그보다 큰 일?

- 큰일에 이루어지는 방법: 기도

- 제2고별설교: 15:1-27

- 참포도나무: 진정한 이스라엘

- 열매: 복음전도/선교 & 전인격적 변화

- 열매 맺는 삶의 조건: 내 계명을 지키라

- 예견된 고난과 박해

3장 그리스도의 고난, 가난, 연약함에 참여하는 사람들

(고린도후서에 나타난 고난과 하나님의 선교)

- 서론: 선교적 해석학의 관심사

- 고린더후서의 고난과 하나님의 선교

- 고린더후서의 고난이 지니는 선교적 의의

- 고난의 사역적 측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남기신 고난

- 고난의 인간적 측면: 구원의 과정으로서의 고난, 고통, 연약함

- 고난의 우주적 측면: 고통과 구속의 동반자인 피조 세계

- 고난의 코이노니아적 측면: 고통의 나눔을 통한 하나님 증언

- 고린도후서의 고난에 대한 선교적 읽기, 그 교회론적 함의

- 교회, 일상적 고난을 통해 선포하는 사람들

- 교회, 인간의 고통과 연약함을 끌어안는 사람들

- 교회, 피조 세계 전체와 함께 신음하는 사람들

- 결론: ‘그리스도의 편지’로 보냄 받은 사람들

4장 고난 중 선교

(요한계시록을 중심으로)

- 정경 내 요한계시록의 위차와 선교

- 하나님의 선교 중 고난

1. 성부의 선교와 심판

2. 예수님의 선교와 심판

3. 일곱 영의 선교와 위로

- 소아시아 일곱 교회의 선교 중 고난

1. 사도 요한의 선교와 고난

2. 소아시아 일곱 교회의 선교와 고난

3. 두 증인과 14만 4,000명의 선교와 고난

4. 새 예루살렘성의 선교와 고난

- 적용: 공공선교적 교회의 선교

1. 교회가 연대하여 고난의 잔을 마시는 성육신의 선교 에토스

2. 예수님 중심의 공공선교를 위한 이론, 선교적 예전, 실천

위 전체적인 카테고리의 내용만으로도 충분히 핵심 메시지는 파악이 가능하다.

아래에는 위 내용들의 본문 중 인상에 깊었던 구절들이다,

- 입술로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자신이 예수 안에 거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당연히 예수계서 베푸시는 새 시대의 구원에 참여하리라고 생각한다. 물론 예수를 구주라고 고백하고 믿는 것은 매우 귀한 일이다. 그러나 예수계서 하신 말씀에 비추어 보면, 믿음의 고백은 반드시 삶의 열매를 통해서 확인되어야 한다.

육신적 이스라엘은 농부이신 아버지가 기대하는 열매는 맺지 않은 채 자신들이 틀림없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착각했다. 예수의 말씀은 열매를 맺지 않은 채 믿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믿음 지상주의자들을 향한 날카로운 가르침이다.

예수계서는 열매 맺지 않는 자들은 최후의 심판 앞에서 심판하는 불을 피할 수 없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이것은 또한 산상수훈에서 예수께서 하셨던 말씀과 정확하게 맥락을 같이한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믿음의 고백은 분명 매우 소중하고 귀한 일이나,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진정한 복음은 그게 다가 아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믿는다면 그 믿음이 열매를 통해 드러나야 한다.

- 열매 맺는 삶의 조건은 참이스라엘이신 예수 안에 거하는 것이고 예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다.

예수는 그 계명을 ‘사랑’이라는 말로 요약하셨다.

제자들이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의 계명을 잘 지킬 때 비로소 그들은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사역(선교와 전도)의 열매와 인격 변화의 열매를 온전히 맺을 것이다.

그런데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씀은 당시 제자들의 상황에서는 뼈를 때리는 말씀이었다.

정적 그들은 십자가 고난의 삶이 아니라 세상의 방식, 즉 헛된 영광을 추구하며 서로 사랑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제자들이 증인의 사역을 감당할 때 세상으로부터 고난과 박해를 받게 되리라 말씀하신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매우 당연한 결과다.

세상은 먼저 예수를 미워했다.

그 예수를 세상 가운데 증언해야 할 제자들은 당연히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박해받기를 각오해야 한다.

- 고린도후서는… 바울의 고난과 연약함, 성도들의 경제적 고통이 줄곧 ‘그리스도의 고난’(1:5), ‘그리스도의 가난’(8:9), ‘그리스도의 연약함’(13:4)이라는 주제 속에서 다루어진다는 점이다.

고린도후서에서 그리스도는 고난 받으신 분이요,

자신의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교를 성취하신 분이다.

나아가 바울과 성도들은 바로 그 고난 받으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로 묘사된다.

이렇게 고린도후서 안에서는 고난, 하나님의 선교,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 보냄 받은 사람들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 놀랍게도, 약할 때 강함을 먼저 경험하신 분 또한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13:4).

십자가는 연약함의 극치다.

극도로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우며 연약한 자리가 십자가다.

연약한 모든 인간 가운데 가장 연약한 이가 바로 십자가의 그리스도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능력으로 연약한 ‘한 인간’(아담) 예수를 죽음에서 건지셔서 부활 생명으로 인도하셨다.

고통과 연약함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정직한 얼굴일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그 고통과 연약함을 하나님 앞에 들고 나아가는 가다.

인간이 고통과 연약함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 바로 그곳에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경험하는 신비스러운 통로가 된다.

바울이 자신의 고난, 고통, 연약함을 새롭게 이해하고 설명하는 해석학적 틀을 보라.

바울은 그리스도를 통해 비로소 선명하게 드러난 하나님의 선교 이야기 속에서 인간의 고난, 고통, 연약함을 해석한다.

바울은 우리 자신의 고통과 고난의 문제 ㅁㅊ 연약함이라는 텍스트를 이해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선교 내러티브를 불러와야 할 이유를 제시한다.

하나님의 선교 이야기 속에서 다시 해석해야 하는 것이 비단 고통, 고난, 연약함뿐이겠는가?

-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 일어서서 하나님의 의로움을 나타내는 그의 자녀들이 없다면 피조 세계 전체의 고통과 신음이 계속될 것이다.

여기에서 ‘피조 세계’의 범위를 자연환경에 제한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이 창조하셨으나 죄 아래 신음하는 이 세상의 모든 영역으로 그 범위를 확장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 모든 영역의 회복과 구속을 위해 친히 일하고 계시며,

당신의 목적을 위해 자녀들을 보내신다.

신음하는 피조 세계가 하나님 자녀들의 출혈은 고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고난과 고통은 우주적 현상이며,

그리스도인들은 그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

- 우리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선교에 부름 받은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모두 고난 받은 이들이었음을 기억한다.

그들이 고난, 고통, 연약함 자체를 즐긴 것은 아니다.

그들이 보냄 받은 곳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의 세력이 다스리는 곳이었다.

인간은 죄의 노예로 살면서 삶을 파괴하는 온갖 내러티브, 가치관, 욕구, 삶의 방식을 재생산하고 악순환시켰다.

그리스도와 사도가 보냄 받은 곳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생각, 욕구, 실천이 하나의 문화를 형성한 시공간이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선교에 헌신하는 삶은 다른 세계관과 대조적인 삶의 방식을 요구했고, 그것을 일관되게 유지하는 일에는 불가피하게 고난이 따랐다.

-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인간의 고통과 연약함을 끌어안으시고 인간이 다다를 새 창조의 생명과 몸을 완성하셨다.

그 속에서 인간의 육체적 연약함과 고통 또한 구원의 한 과정으로서 긍정될 수 있다.

어쩌다 보니 종교는 한 인간이 자신의 연약함을 극복하는 수단으로 취급받게 되었다.

고통과 연약함이 만연해 있는데도 말이다.

이런 종교는 현실을 설명하지도 못하고 대안을 제시하지도 못한다.

복음은 인간의 고통과 연약함을 직시한다.

그것을 직시할 때만 고통 중에 있는 인간을 존중할 수 있다.

기복신앙의 체계가 잔인한 이유는 인간의 고통과 연약함을 부정함으써 비현실적 신앙 체계를 강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복신앙의 위험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하나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통해 오히려 그분의 은혜와 능력을 더 온전하게 드러내신다(고후 12:9).

즉, 인간의 고통과 연약함이야말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는 절대적 장소다.

하지만 기복신앙은 애초에 그 가능성을 제거해 버린다.

그러므로 교회는 인간의 고통과 연약함을 끌어안는 사람들의 공동체다.

우리 주변에는 늘 고통과 죽음이 존재한다.

교회가 그들의 고통을 제거해 주지는 못해도 그들과 함께 있으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매개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인간에 대한 가장 정직하고도 현실적인 접근이 아니겠는가?

오늘날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의 메시지를 회복하기 이전에 인간의 연약함에 대한 메시지를 회복해야 한다.

연약한 이들의 곁에 있는 행위야말로 복음 전파의 문을 열어 주리라 생각한다.

그리스도께서 세리, 죄인, 나병 환자에게 하셨던 것처럼,

교회는 연약한 자들과 함께하는 사람들이라는 선한 소문이 필요하다.

-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이자 주님으로 믿는 그리스도인이 구원의 복음을 대적하는 세상에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은 다양한 고난을 경험한다.

선교는 종종 박해와 고난을 낳는다.

즉, 교회가 당하는 고난의 근본 이유가 선교이기에 고난은 선교의 진정성 여부를 판단하는 하나의 시금석이다.

선교적 고난은 교회가 하나님의 선교에 충실히 응답할 때 선교지에서 겪는 모든 고통이다.

- 선교 사역에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려면 몇 가지 통찰을 숙지할 필요가 있다.

(1) 타인을 위해 고난을 당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편에 서서 타인의 고난을 경감시키는 일이다.

(2) 타인을 위해 고난을 당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떠난 동료 인간들의 사악함에 희생되는 일이다.

(3) 타인과 함께 고난을 당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십자가의 길을 통하여 하나님의 큰일을 위한 연약한 도구와 더불어 길을 걷는 일이다.

선교란 이 땅의 고난에 어떻게 참여해야 하는지를 묻고 직접 그 현장에 참여할 때에야 비로소 완성된다.

그 과정에서 선교신학은 전통적으로 이해했던 고통에 대한 질문을 변형하게 되는데…

신정론이 ‘아니 왜 내게 이런 알 수 없는 고난이 닥치는가’를 둘러싼 불만과 회의로부터 시작된다면,

인정론은 ‘고난의 현장에서 내가 할 일은 무엇인가’라는 능동적이고 책임적인 현실 의지의 표명으로 완결된다.

- 탈종교화된 포스트모던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은 종교 영역과 관련하여 어떻게 선교할 수 있는가?

종교의 자유를 위한 노력은 바울의 정당한 시민권 활용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지만 요한계시록에는 그런 활용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 대신 요한은 사람의 신격화나 종교 혼합주의에 대해 분명히 경고한다.

요한계시록의 환상은 공적 영역이 되어 버린 가상 공간에서의 선교에 원칙을 제시한다.

요한계시록의 환상은 상징적인 가상 세계다.

하나님은 환상을 통해 계시를 주시고 독자들을 위로하신다.

메타버스로 대변되는 가상 세계 및 증강 현실 영역에도 하나님의 주권과 복음이 미쳐야 한다.

또한 지구 가열화가 가속화되는 현실에서 예수님이 수행하고 계신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새 창조의 선교에 동참하는 교회는 환경 보전을 통한 선교적 실천도 간과할 수 없다.

- 예수님의 존재와 선교적 사역은 가장 근본적인 뉴노멀 그 자체였다.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값으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 처형을 영광으로 여기셨고,

부활하심으로써 세상을 낙원으로 재창조하시며,

하늘 보좌에 앉으셔서 성령과 교회를 통해 만유를 다스리시기 때문이다.

두려움과 죽음의 악취를 내뿜는…

뉴노멀의 세상을 창조와 구원과 심판을 시행하시는 하나님 나라로 변혁시키기 위해,

어린양의 신부들은 새 창조와 구원을 감사히 누리며 신랑께서 가져다주신 소망과 위로와 생명의 향기를 세상에 발산하기 위해 목숨을 무릅쓰고서 ‘MRI’를 고수해야 한다.

MRI란,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항상 선교에 힘쓰고,

하나님과 이웃과 상호 작용하는 관계를 유지하며,

하늘을 이 땅에 실감 나게 심으려는 성육신적 삶이다.

그런 MRI 성도가 주중에 교회당 바깥의 시민 사회 영역에서도

성만찬 예배에 참여하는 것처럼 섬긴다면 공동선을 촉진하게 되며,

천국을 맛보고 증언하며 현시하는 선교 공동체는 실종되지 않을 것이다.

위로와 소망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요한계시록의 따뜻한 선교적 복음이야말로 적실한 메시지다.

하나님의 선교에 따르면,

성도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교회당 안팎에 전하기 위해

선교 여행의 걸음을 내디딘다면,

통전적 선교의 결실은 하나님이 책임지신다.

# 느낀 점

이 책을 읽으면서 평소와 달리

생각보다 잘 읽히지 않아서 놀라웠다.

한 번에 읽기를 포기하고 여러 차례에 걸쳐

기도하며 천천히 읽게 되었다.

그만큼 정독을 하고 나서

느끼고 깨달은 게 많았던 좋은 책이었다.

우리는 누구나 고통 가운데에,

그 고통의 크기를 떠나서 살아간다.

주의 자녀라 하는 우리는

세상과 교회 공동체 안에서 여러 고난을 겪으며

때로는

주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때로는

주님을 떠나 세상과 자신 스스로에게 집중하며

더욱 망가지기도 한다.

기복주의 신앙이 만연하며,

이로 위로를 받아 가는 많은 크리스천들.

그리고 과거의 나.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은 것들.

사실 그 모든 피하고 싶은 것들은

크리스천인 우리와 떼어내려야 떼어낼 수 없음을

다시금 깨닫게 되면서

이 거룩하면서 숭고한 희생의 삶을 받아들여함에

그간 나의 삶 가운데의 여러 나날들이 더 쉽게 이해가 되었다.

세상적인 것들은 참으로 달콤하다.

그 달콤함이 우리의 생명을 유지시켜주지는 못한다.

각종 질병 등 죽음으로 끌고 가는 방법 중의 하나이다.

복음은 쓰다.

때로는 너무 짜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의 영육혼에는 소금으로서 생명 유지 장치이기도 하다.

우리의 몸은 전해질의 균형이 맞아야 살아갈 수 있다.

음식을 조리하는 과정에서.

적절한 양의 소금을 밑간으로 사용하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그리스도의 삶은.

복음은.

십자가의 길은.

소금과 같다.

때로는 너무 쓰고 짜고 괴롭지만.

적절함이 따르면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세상 가운데에서 우리 크리스천의 삶은

이런 소금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 쓰고 짠 소금이

세상에서 그리고 세상을 지향하는

우리들에게는 매우 두렵고 어려운 존재일 수도 있다.

우리를 빛과 소금이라 하신 주님께서.

세상으로 나아가라 하셨다.

빛이자 소금임을 아는 우리들은.

과하거나 부족하면 전해질 불균형으로 생명을 위태롭게 하며,

과하거나 부족하면 차마 입에 넣기 불가할 정도의 쓰레기로 음식을 만들기도 하는 소금 그 자체인 주님의 선택받은 재료인 창조물로써.

고난에 대하여.

선교에 대하여.

자녀이자.

제자로서.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어떠한 신앙생활로 나아가야 하는지.

사랑과

공의의

인격적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우리의 자세를 다시 성찰해 볼 시간이 필요하다고 본다.

우리는 과연 얼마나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는가.

우리는 과연 얼마나 하나님에 대해 알기를 원하는가.

우리는 과연 얼마나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가.

결단을 하였는가.

아니면

아직 세상과의 저울질로 고민하는가.

우리의 존재 이유.

우리의 주권자.

우리의 하나님께서

부여하시는 고난과 같은 그 어려운 길.

부와 명예 그리고 건강 등의 열매.

그리고 고난의 열매.

주님께서 언제나 함께 하시며 보살펴주시는

하나의 나무들인 우리는 부어주시고 채워주시는 양분들로서.

어떠한 열매라도 온전히 맺을 각오로 임하여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진정 우리가 이 땅 가운데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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