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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모판 Jul 22. 2024

나더러 콘트라베이스를 하라고?

 오케스트라는 아무나 하나 _ 02화

오케스트라는 아무나 하나오케스트라는 아무나 하나

시작은 배드민턴이었다. 

코로나로 멈췄던 교직원배드민턴 대회가 내가 근무하고 있는 지역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들은 A가 대회에 나가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기 전에 3년 정도 레슨을 받으며 배드민턴 클럽생활을 했었다. 코로나가 시작되던 해에 이 지역으로 전근을 왔고 그때부터 2년간 배드민턴을 쉬고 있던 때였다.


나와 달리 배드민턴을 배운 적 없는 A와 함께 복식(같은 성별로 복식으로만 출전 가능)으로 대회에 나가려면 함께 레슨을 받아야 했다. 학교에서 근무하는 스포츠강사님께 연락했더니 배드민턴 클럽에 가입하여 레슨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라고 했다. 


스포츠강사님이 말한 클럽은 멀었고(차로 10분 정도의 거리였지만 그 정도의 거리도 멀게 느끼는 사람인지라), 가까이 있는 클럽들을 모두 방문해 봤지만 레슨 강사가 없었다. 배드민턴 클럽이 아닌 학교에서 레슨을 받고 싶다고 하니 레슨 받을 사람이 최소 5명이 되면 시간을 내 보겠다고 했다.


며칠 동안 교무실, 행정실, 급식실, 보안관실까지 찾아다니며 만나는 사람마다 물어봤지만 전체 교직원이 40명도 안 되는 학교에서 5명을 모으기는 쉽지 않았다. 간신히 3명(나와 A를 빼면 단 1명 모집한 상태)을 만들어서 2명을 더 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어느 날 아침 A가 내 사무실 문을 열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 선생님을 위한 정보를 제가 알아왔어요"


나를 위한 정보라니 궁금했다. 들어보니 MZ세대인 A가(본인은 MZ가 아니라고 하지만 나이 구분상 MZ에 해당함)가 용감하게 교장선생님께 배드민턴을 배울 생각이 있는지 물으러 갔던 것이었고, 교장선생님께서는 배드민턴을 배울 의향이 있으며 목요일은 오케스트라 교육에 가야 되니 목요일에 레슨을 잡으면 안 된다고 말한 것을 듣자마자 나를 찾아온 것이었다. 


교장 선생님은 클라리넷을 신청할 거라는 말도 함께 전했다. 그러면서 나더러 오케스트라에 지원하라고 했다. 악기까지 정해주었다. 콘트라베이스. 콘트라베이스가 멋있어 보인다며 콘트라베이스를 꼭 하라고 했다. (왜 자기가 하고 싶은 악기를 나더러 하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시간이 없어서 못 한다고 말했지만 A가 나가자마자 바로 관련 내용을 찾아보았다.


오케스트라가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이 지역 문화재단에서 하는 사업이었다. 학생과 일반인이 따로 연습을 한 후 연말에 합동 공연을 하는 프로젝트였는데 학생들은 일주일에 두 번, 일반인은 일주일에 한 번 매주 2시간씩 교육에 참여해야 했다. 


수강료는 무료였으며 악기는 개인 지참이었다. 이 지역에 주소를 둔 사람만 지원할 수 있었으며 신청 인원이 적었는지 추가 모집을 하고 있었다. 코로나로 2년 동안 중단했다가 코로나 실외 마스크 해제 시기에 맞춰 오케스트라단을 다시 모집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방통대 국문과 4학년에 재학 중이었고, 문학 카페의 임원(어쩌다 쓰게 된 감투) 노릇을 하느라 날마다 카페에 들락거리고 있었고, 교내 교직원 탁구 동아리 회장(공식적인 모임은 한 달에 한 번이었지만, 그때는 탁구에 빠져 있었다)을 하고 있었고, 거기에다 배드민턴 레슨을 다시 시작할 예정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케스트라가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문화재단 홈페이지에서 안내문과 같이 첨부된 지원서를 열어 보았다. 그때까지도 딱히 지원할 마음은 없었다. 그냥 어떤 양식인지 궁금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지원서의 희망악기 적는 란을 보니 빈칸을 채우고 싶었다.



※ 교육 시작 후 희망 및 신체 특성 등을 고려하여 악기 선정
바이올린 / 비올라 / 첼로 / 콘트라베이스 / 플루트 / 클라리넷 / 오보에 /트럼펫 / 트롬본 / 호른 / 타악
1순위:      2순위:       3순위:


희망악기는 1순위에 플루루트를 쓰고 2순위, 3순위는 빈칸으로 두었다. 플루트를 쓴 이유는 우리 집 화장대 서랍에 딸들이 초등학교 때 쓰던 플룻이 2개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집에 콘트라베이스가 있었다면 콘트라베이스라고 썼을 것이다.


그 아래 '지원 사유(필수기재)'란의 넓은 공간을 보자 꽉 채워 쓰고 싶었다.


- 집에 아이들이 어릴 때 불던 플루트가 있긴 합니다만 어떤 악기든 배워보고 싶습니다.
- 생활 속에서 음악을 가까이하고 음악을 주변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 저마다 다른 특색을 가진 악기들이 어울려 하모니를 만들어내는 멋진 경험을 하고 싶습니다.
- oo를 사랑하는 oo군민으로서 oo군 지역의 전문예술인을 육성하고 oo군민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데 기여하기 위한 오케스트라 활동에 자부심을 갖고 참여하고 싶습니다.


일을 너무 많이 벌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지원서를 작성해 두고 보내지 않고 있었다. 


그날 오후 지원서를 한 번 써봤다는 말을 들은 A가 말했다.


"그러실 줄 알았어요"


그 말에 고무된 나는 덜컥 담당자 이메일로 지원서를 전송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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