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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S의 우주 0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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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 Aug 31. 2023

S의 우주 6

6화 D8233

"네. 그쪽으로 갑시다."      




내가 가지고 있는 기억의 시작점을 생각하면 항상 하얀 침대에 누워있는 '나'의 모습이었다. 내가 나의 처음을 기억하면 떠오르는 장면과 어제, 오늘의 장면이 똑같다. 하얀 침대 위에서 눈을 뜨면 보이는 하얀 천장. 그리고 오늘 일과 시작.

고향 행성에 대한 기억은 몇 조각이 어른거릴 뿐, 거의 모두 자취를 감췄다. '도플'이라 불렸던 것 한 조각, 고향에서 공동체를 이루며 놀았던 장면 몇 조각, 테스트를 받고 수송 임무 교육생으로 발탁되어 싱숭생숭했던 마음 몇 조각. 그것뿐이었다. 지금은 항상 잠을 자는 하얀 침대를 처음 마주했을 땐, 너무 깨끗해 익숙하지 않았다. 하얀 도화지에 먹힐것 같았다. 그래사 내가 여기서 몇 밤 자는지 세어본 적이 있었다. 그러다 백 밤 정도 지났을 무렵, 슬슬 고향 행성에 대한 즐거웠던 기억과 마음이 흔적만 남기고 다 사라졌다. 그래서 명확히 내 처음을 기억하라 말한다면 언제든지 지금 누워있는 하얀 천장을 떠올렸다. 

어린 존재들은 바로 수송 장치를 다룰 순 없었다. 하얀 침대에서 일어나 생활하는 내 주변 존재 모두 일정 훈련 시간을 거치며 성장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 훈련과 성장은 일련번호가 주어지기 시작하는 순간 시작된다.

내 일련번호는 'D238'. 이 문자와 번호가 본격적인 나의 첫 시작이었다.  

우리의 일은 간단했다. 기계만 조작하고 상부와 연락한 다음, 명령에 따라 정해진 위치에 전기에너지와 행성에 필요한 물질을 옮기는 것. 항상 기계를 안정적으로 다뤄야 했고, 어떤 물질이든지 안전하고 재빠르게 옮겨야 했다. 그래서 우리가 옮기는 물질에 대한 이해, 수송 장치에 대한 이해가 충분히 이루어져야 했다. 그 모든 것들은 나에게 그저 식은 죽 먹기였다. 전기에너지나 식량 등, 어떤 것을 옮기든 손실 없이 빠르게 옮겼고, 먼 거리를 가도 별 탈 없이 수송 임무를 마무리했다. 가끔 수송 장치의 전기에너지가 거리에 비해 지나치게 떨어질 때면, 장치 내부 부품 점검을 했고, 수송해야 할 전기에너지를 조금 끌어다 쓰더라도 본부의 허락 아래 효율적으로 수송 임무를 마쳤다. 나에게 그저 이 모든 일련의 일이 익숙했고 쉬웠다. 그래서 남들보다 일찍 훈련을 마쳤고, 남들보다 일찍 수송 보조를 했으며, 남들보다 먼저 첫 수송 임무 기회를 얻었다. 

가끔가다 전기에너지를 다 소실해서 수송 임무를 마치지 못하는 동료가 있었다. 그럼 그 동료는 한동안 자신의 방에 갇힌 채로 추가 교육을 받게 된다. 하다 하다 안돼서 평생 자신의 방에서 공부하는 동료도 더러 있었다. 우리는 그걸 '어리석음', '나태'라고 불렀다. 부지런하지 못해서, 충분한 일머리가 없어서 방에 갇힌 것이라 이야기했다.

나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저 나만 잘하면 되는 것을.

나태한 저 동료는 오늘도 훈련을 멈추고 자신의 방에 들어가게 되었다. 왜 저럴까. 참 그게 그토록 어려운가.

알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어리석은' 동료를 그저 저 멀리서 관조했다.  

"D238님. 오늘부터 임무 변경됩니다. D8233이 안전하게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 때까지 교육하십시오." 

저런 것도 내 임무에 포함되어 있었던가. 생전 처음으로 받아보는 임무였다. 우리는 그저 수송 임무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것만은 아니었나 보다. 근데 교육은 생전 들어보기만 했지, 어떻게 하는지 아무것도 모르는데. 

수송 장치 점검 후, 지나가는 동료들을 다 붙잡고 물어봤다. 

"혹시 저번에 교육 임무 받아보신 적 있습니까?" 

그런데 다들 그렇게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심지어 나보다 번호가 한참 빠른 선배들조차 그 임무는 도대체 무엇이냐며 되려 물어보기 바빴다. 나도 모른다고 고개를 저으면, '요즘 본부가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참….'이라고 혀만 끌끌 차며 지나갈 뿐이었다. 정말 누구에게도, 그 어떤 도움도 얻을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참 막막했다. 교육이라고 하면, 계속 말을 걸고, 가르쳐주고, 이끌어주어야 하는데 그저 수송작업만 하던 나는 누군가와 대화를 해본 적이 없었다. 더군다나 상부에서는 제일 효율적인 방법을 선택하여 임무를 부여한다. 그 때문에 나에게는 다른 어느 동료도 붙여주지 않고 혼자 이곳저곳 많이도 돌아다니게 시켰다. 그런데 인제야 무슨 동료를 붙여준다고. 

나와 같이 일을 하게 될 D8233의 이력을 쭉 훑어보았다. 

"이런 망할…. 이거 뭐 상부에 찍힌 것도 아니고…." 

D8233에게 지난 임무 이력은 없었다. 훈련생이었을뿐더러 기초 교육도 제대로 못 받아 방에서 수업을 듣는 '나태생'이 나에게 온 것이다. 지나가던 선배의 말이 생각났다. 중앙관리 본부가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나와 비슷한 일련번호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번호가 같아서 내가 교육 임무에 당첨되었을까. 아니면 지난 수송 임무 때 몰래 농땡이를 피운 게 들킨 건가. 상부가 내 행적을 속속들이 감시한다는 생각에 소름이 돋아 괜히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나와 일련번호도 비슷한 것이 괜스레 짜증 났다. 나랑 똑같은 번호를 세 개나 달고 있으면 교육이나 잘 들을 것이지. 나와의 공통점이라고는 숫자가 똑같다는 것 뿐이었지만, 그 하나의 공통점마저도 짜증이 났다. 

그냥 일이나 마구 시키면 어떻게든 배우겠지. 다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에 털썩 침대에 내 몸을 눕혔다.  

"D8233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교육생이 수송 장치 점검 중 갑자기 나타나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흠칫, 놀랐지만 내가 새로 받은 임무를 떠올리고는 기분이 더러워져 대충 흘겨봤다.

같은 소속에 비슷한 일련번호라 그런가? 괜히 나랑 더 비슷하게 생긴 것 같아 기분이 몹시 언짢았다. 인사하는 품세를 봤을 땐, 그렇게 게을러 보이진 않아 보였다. 그럼 게으름 때문에 교육받는 게 아니군. 멍청한 아이다. 에휴….

"저기. 제가 뭐 도와드릴 건…."

"알아서 눈치껏 수송 준비해."

그냥 한마디 툭 내뱉었다. 어떻게 하는지 보려는 속셈이었다. 뭐 내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아 반항하는 모습을 보이면 임무 실패했다고 하고 다른 동료에게 넘길 수 있도록 본부에 연락하면 그만이었다.

"아, 알겠습니다."

돌아온 대답이 의외로 당차게 들렸다. 교육생은 대답과 함께 수송 장치 안으로 들어가 수송해야 할 물품 점검을 하기 시작했다. 눈치 채고 분업으로 빨리 일을 진행했다. 수송 임무는 빨리 진행되어야 하는 것도 중요하기에 누군가 장치 점검을 하면 누군가는 물품 점검을 도맡아 하기도 했다.

수송 장치 점검이 마무리되었을 때쯤, 안에서 교육생의 소리가 들렸다.

"선배님, 점검 끝났습니다. 전기에너지가 조금 모자라 더 채워오도록 하겠습니다.

물품 점검도 시간 맞춰 마무리했다. 거기다 남들이 그냥 넘길 수 있는 전기에너지 측정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얼마나 멍청한지 알아야 뭘 가르치기라도 하겠다는 생각으로 일부러 조금 빼놨던 걸 찾아냈다.

교육생은 후다닥 장치에서 내려와 전기에너지를 충전하러 가기 시작했다. 재빠르게 뛰어가는 뒷모습을 보니 정말 궁금해졌다. 도대체 쟤가 왜 나에게 왔지?  

교육생이 들어옴과 동시에 수송 장치 엔진을 작동시켰다. 장치 운전을 자동으로 연결해놓고 교육생이 있는 쪽을 돌아봤다. 빤히 쳐다보며 도대체 무슨 문제 때문에 왔는지 생각했다. 뭐 본다고 찾을 수 있겠냐만, 정말 궁금했다. 쟤가 왜 왔을까.

"뭘, 그렇게 보십니까?"

교육생의 목소리에 눈동자를 굴려 그의 얼굴을 지그시 쳐다봤다. 도무지 감이 안 잡힌다. 저런 애가 왜 지금까지 임무 하나 맡지 못했는가.

"너, 왜 지금까지 임무 이력이 없냐?"

궁금하면 직접 물어봐야지. 단도직입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불명예스럽고 민망한 질문이 될 수 있겠지만 그 전에 도무지 이해가 안 되어 질문부터 던지고 봤다.

교육생은 들을 줄 알았다는 듯, 일말의 표정 변화도 보여주지 않았다. 마치 준비하듯 대답을 읊었다.

"제가 시험을 칠 때마다 전기에너지든 수송물질 어떤 거든 다 조금씩 모자라는 현상이 생깁니다. 분명 수송 중간중간 살펴봤는데도 결과를 보면 항상 기준 미달치로 나옵니다. 그래서 그동안 임무에 한 번도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효율적이지 못한 직원이니까요."

나는 처음 듣는 소리에 당황했다. 에너지와 물질이 사라지는 건 또 뭐람. 수송 임무를 하다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였다. 가끔 우리가 수송하는 물질 중, 직원이 슬쩍 가로채 다른 먼 행성으로 암거래를 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그런 애들은 다 본부에 잡혔겠지만. 하지만 이렇게 밑도 끝도 없이 사라지는 경우는 처음 들었다.

"너는 그게 왜 없어진다고 생각하니?"

나는 그를 응시하며 다음 질문을 던졌다.

그도 나를 빤히 응시한 채로 대답을 던졌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작은 한탄.

"본부에서도 해결책이 없으니 그나마 제일 효율이 날 것 같은 팀으로 꾸린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 그럼 내가 원인도 모르는 너의 그 펑크를 일일이 챙기면서 수송 임무를 해야 하는 건가? '교육'이라는 명목으로?"

교육생은 나를 쳐다볼 뿐 대답이 없었다. 저 눈을 보니 꽤나 시험이나 교육에서 당황스러운 일을 많이 겪은 듯 보였다. 허탈함이 깃든 눈동자였다. '저는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라고 시위하는 저 눈을 보니 내 마음속에 동정표 하나가 새겨지는 듯했다. 자기가 빼돌리려고 한 것도 아닌데 그렇게 되면… 억울하겠지.

나는 작동 화면 쪽으로 다시 의자를 돌렸다. 그 친구도 내 옆 조종석에 앉아 작동 화면을 보기 시작했다. 

중앙관리 본부는 효율성을 중심으로 임무를 배분했다. 행성에 필요한 물질을 전달하는 데 있어 많은 임무 성공률을 보인 나에게 이 교육생을 붙인걸 보면, 그래도 내가 알아서 빠질 양까지 계산하여 임무를 마칠 거라는 생각을 했던 모양이었다.

잠깐 각자 생각이 많아졌는지 정적이 짙게 일어났다. 그러다 교육생은 천천히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했다.

"제가 물질들을 만지고 점검하면 꼭 먼지가 묻어있었습니다. 몇 번이고 닦고 관리를 해도 먼지는 그대로 묻어있습니다. 수십 번 자기반성을 하고 고쳐도 항상 먼지가 묻은 채로 기준미달의 물질을 운반합니다."

교육생은 말을 끝내고 미세하게 떨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제가 이상하지 않다는 것, 임무를 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십시오. 일도 못 한 채 행성에 이주, 아니 유배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는 나에게 배움을 받으러 온 게 아니었다. 간절한 부탁을 하러 온 것이었다. 자신도 어찌 통제할 수 없는 이상 현상으로 불안함을 많이 느꼈을 것이다. 저 교육생과 같이 임무에서 같은 실수를 계속 반복하거나, 몸이 좋지 않아 임무를 할 수 없게 되는 동료는 먼 행성으로 이주해 마지막 여생을 보내게 된다. '마지막 여생'. 겉으로 들을 땐 평화로워 보이지만, 직원들에게는 마치 꼼짝 못 하게 옭아매어 숨 막히게 하는 말과 같다. 저 교육생도 그 '마지막 여생'이라는 단어의 뜻을 알 것이다. 

마지막 동아줄을 붙잡고 아등바등 매달리는 모습이 떠올랐다. 붙박이처럼 박혀 마지막을 기약 없이 기다리는 것은 나 또한 죽기보다 싫다. 그 점이 나와 참 비슷해 보였다. 교육생의 떨리는 눈과 손, 경직된 어깨를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다.

나는 그를 잠시동안 쳐다보다 크게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D8233. 난 알다시피 이 D 소속에서 손가락 안에 뽑힐 정도로 많은 임무를 하고 다녀. 알고 있어?"

그는 고개를 조용히 끄덕였다.

"그렇다는 건 내가 누구보다 제일 바쁘고, 그 옆에 있는 너도 그만큼 매우 바쁘다는 뜻이야. 수십 번 물질 점검, 에너지 체크를 하고 너의 그 이상 현상 때문에 얼마나 물질과 에너지가 빠질 건지 계산해서 임무에 착수해야 해."

이번에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할 수 있어. 이상 현상 체크하고 예측해서 더 가지고 다니면 그만이야. 나는 뭐 하던 대로 일을 하면 되겠지. 그런데, 이런 일을 너도 같이 할 수 있겠어?"

그는 나의 딱딱한 말에 응수하듯 바로 대답했다.

"네, 가르쳐 주십시오."

순간 탁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마음이 맞을 것 같다는 느낌이 왔다.

"너 고향에서는 뭐라고 불렸어?"

순간 그는 당황한 얼굴로 되물었다.

"네?"

"너랑 아무래도 임무 좀 오래 할 것 같은데 그냥 바로 애칭 부르지 뭐. 나는 '도플'인데, 어차피 너는 선배님이라고 부르겠지?"

"...네."

그리고 이어지는 한 마디.

"다래. 다래라고 불렸습니다."

다래? 정말 처음 듣는 유형의 애칭이었다. 이런 녀석은 애칭조차도 특이하구나.

"알겠어. 그럼 다래라고 부를게. 괜찮지? 잘해보자."

나는 다래에게 손을 내밀었다. 다래는 내 손과 얼굴을 보더니 살며시 미소를 보였다. 그의 초조함과 불안의 실타래가 조금씩 풀리는 것처럼 얼굴의 긴장감이 사르르 풀렸다.

그렇게 나에게도 처음으로 후배가 생겼고, 동생이 생겼다.          

"다래야…."

도플은 자신 앞에 마주한 동생의 모습을 보고 얼빠진 모습으로 굳어버렸다. 절망이 뱀처럼 스르륵 도플을 천천히 휘감는 모습이었다.

"언니, 여긴 어쩐 일이야?"

다래라고 불리는 도플의 동생은 절뚝절뚝 목발을 짚고 도플에게 다가왔다. 반가운 듯하면서도 당황스러운 모습이 뒤섞인 얼굴이었다. 그는 자신의 언니 앞에 멈춰서서 손을 건네는 듯했다.

도플 눈 앞에의 다래의 발은 없었다. 발 없이 붕대에 묶인 오른쪽 다리만이 존재했을 뿐이었다. 왼팔도 손을 잃어버린 채 붕대로 묶여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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