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뇌
소연은 차가운 땅바닥에 누워있었다. 며칠 동안 몸을 오른쪽으로 굴렸다, 왼쪽으로 굴렸다, 그러다 정 배고픔을 참지 못하면 누워있는 소연 옆에 쌓여있는 조그마한 에너지바를 하나 집어 먹는다. 그리고 그 옆에 잔뜩 쌓인 에너지바 빈 포장지 위에 새로 빈 포장지를 또 올려놓는다.
소연은 모든 걸 놔버렸다. 직장도, 아빠도. 물론 아빠는 오랫동안 놓고 싶은 존재라 어쩌면 소연의 소원이 이루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일'이라는 말 하나로 소연과 동생 소진을 가볍게 할머니에게 떠넘긴 인간이었다. 물론 할머니와 지내던 시간은 꿈 같은 시간이었지만 한편으로 자신과 소진을 무심하게 바라보고 하루도 채 있지 않고 떠나가던 아버지를 보면 가슴에 새까만 멍울이 피어오른다. 그 멍울은 마음속의 고름으로 번지고 아버지의 무심한 눈초리와 훈계라 포장된 역정에 그 고름이 팍 터지고 나서야 굳은살이 올라왔다. 그때부터 서서히 아버지라는 존재를 마음속에서 지웠다.
나갈 능력이 생기기만 하면 당장 소진과 새로운 집에 살 것이라 다짐했다. 그래서 악착같이 일하고 그 어떤 추한 것도 견뎌내며 마음의 굳은살로 아버지의 화와 잔심부름, 집안일을 다 참아냈다. 그런데 소진의 몸 상태가 악화되었다.
결국 동생과 같이 새로운 삶을 시작해 보기도 전에 동생은 할머니를 따라갔고, 아버지와 크게 싸운 후, 소연은 그대로 집을 나갔다. 그리고 동생과의 삶을 위해 참아왔던 모든 것을 다 버렸다. 직장도, 참을성도, 힘도 모두.
소연은 오늘도 소진의 사진을 봤다. 뭐가 그렇게 급해서 갔을까. 아픈 몸을 안고 태어나서 매시간이 피로하고 고통스러워 떠났을까. 아니면 할머니가 소진을 돌보려고 데려가셨을까.
소진은 유난히 손이 많이 가는 아이였다. 기온 차가 심한 날에는 감기를 조심해야 했고, 봄이면 꽃가루 알레르기가 소진을 괴롭혔다. 여름에 모두 한 번씩 물리는 모기는 소진에게 유난히 치명적인 존재였다. 모기에게 몇 번 물리고 다음 날이 되면 온몸에 빨간 점이 올라왔다. 어린 나이라 유난히 간지럼을 못 참는 소진은 여름마다 힘겨운 고생을 겪어야만 했다. 그래서 소연은 항상 소진을 위해 모기 기피제, 알레르기약 등을 챙기며 살뜰히 따라다녔다. 그렇게 챙기면 힘들 법도 한데, 소진을 챙겨주게 되면 소진은 소연에게 그에 대응할 만한 고마움을 어떤 식으로든 표현했다. 어설프게 접어온 언니를 위한 종이꽃이나 토끼풀꽃으로 만든 반지라던가. 소연은 그래서 더욱 소진을 놓칠 수 없었고 챙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소연의 이런 마음까지는 모르는 할머니는 항상 '아이고, 아가가 고생이 많네.' 하며 소연을 안아주셨다. 그러면 소연은 소진에게 받은 애정이 부족한 게 아니여도 이유 모를 서운함, 탁한 한숨 같은 마음이 일렁일렁 올라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할머니가 지금 나의 상태를 알고 있어 소진이를 데리고 가셨을까. 소연은 생각했다. 이왕이면 자신도 데리고 가달라 하고 싶었다. 자신도 같이 데리고 가서 다시 그 시골집 때처럼 살고 싶다 애원하고 싶었다.
아무것도 없는 지금, 소연의 마음 상태도 무의 상태가 되었다. 죽음에 대한 일말의 두려움이나 공포가 사라진 상태였다. 이 상황을 어서 끝내고 싶었다. 그저 가위로 실을 자르듯 탁, 잘리면 끝나는 인생이길 바랐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고 싶었다.
소연은 상체만 겨우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 발짝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는 책상에 두꺼운 스프링 노트가 놓여 있었다. 소연은 천천히 일어나 스프링 노트가 있는 책상 앞에 섰다. 노트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이제 왜 샀는지도 모를 두꺼운 노트를 집어 들었다. 침대로 돌아와 깨끗한 한 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쳐다본 한 면을 찢었다. 예전에 소진이에게 이리저리 접어줬던 종이접기들이 떠올랐다. 색종이로 상자도 만들어 주고, 종이공도 만들어 놀기도 했는데. 소연은 소진에게 접어주었던 색종이를 생각하며 세모로 한번 접어도 보고 네모로도 한 번 접어보았다. 하지만 선과 선이 맞닿지 않았다. 어떻게 접는지도 까먹었다. 소연은 그대로 종이를 부욱 찢는다. 겹쳐서 가늘게 가늘게, 더 작게 작게 찢는다. 찢긴 종이가 부스스 소연의 다리에, 소연의 침대에 떨어진다. 그 종이를 보니 소연의 마음이 한없이 처연해졌다. 소연은 옆에 더 이상 자신과 마음을 나눌 사람이 없다 느꼈다. 소연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겨 내덩그러졌다. 소연은 연습장 종이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쥐어뜯듯이 연습장을 뜯었다. 그 구겨진 종이를 박박 찢었다. 쫙쫙 종이가 찢어지고 소연은 참았던 울음바다를 힘겹게 꺼내듯 울었다. 끄윽 끄윽. 다음 장도 찢었다. 그리고 그다음 장도. 쥐뜯듯이 연습장을 뜯던 소연은 거세게 일어나 책상 서랍을 거칠게 열었다. 쾅. 그곳에 있던 커터칼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곧장 뒤를 돌아 연습장에 커터칼을 박았다. 쭉 그어 내렸다. 커터칼이 종이를 가르는 날카롭고 무언갈 끊어내는 감각이 소연의 손을 타고 올라왔다. 그 감각을 느낀 소연은 또 한 번 힘겹게 울음을 토했다. 마치 자신의 마음속에 있던 고름을 짜내는 듯하여 고통스럽다는 듯 얼굴이 마구 구겨졌다. 그 상태로 계속 그었다. 스윽 스윽. 점점 더 소연의 손이 빨라졌다. 연습장에 진한 상처가 그어진다. 소연은 최대한 빠르게, 깊게 찔렀다. 그러다 연습장을 잡던 손을 베이고 말았다. 앗, 조그맣게 새빨간 피가 훼손된 종이 사이로 스며들었다. 소연은 자신의 피가 종이를 잠식하고 있는 순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쩌면 나도 금방 따라갈 수 있을 것 같아. 소연은 커터칼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 순간,
"딩동."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커터칼을 들고 있던 소연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또 한 번의 초인종 소리
"딩동, 딩동."
소연이 초인종 소리가 나는 곳이 뚫어져라 응시했다. 누구지? 나에게 올 사람이 없는데.
"쿵쿵쿵."
이번에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소연아, 거기 있어?"
희미하게 익숙한 소리가 들린다. 누구였는지 생각하기도 전에 입술에서 이름이 튀어나왔다.
"지수야."
소연은 치켜들었던 팔을 툭 떨궜다. 그리고 천천히 지수의 목소리가 들리는 문으로 발을 옮겼다. 정말인가. 정말 지수일까. 지수의 목소리는 맞는데 확신이 들지 않았다. 이렇게 타이밍 맞게 내 끊어질 듯한 실을 이어줄 만한 사람이 나타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만약 지수여도 지금 이런 내 손을 잡아주려나. 충격을 받고 도망가려나. 아니면 처량하고 을씨년스러운 내 꼴을 보고 인상을 찌푸리진 않을까. 발걸음을 옮기고 문 앞에 설 때까지 내 마음속 많은 목소리가 오갔다.
문고리를 잡고 열었다. 문 앞에는 역시나 지수가 있었다. 지수의 시선이 소연의 눈에서 머리로, 갈라진 입술과 가늘어진팔, 피가 흐르는 손과 거친 맨발을 지나 다시 소연 눈으로 이동했다. 지수가 날 이상하게 보려나, 소연이 혼란을 느끼려던 찰나,
"소연아, 많이 힘들었지... 미안해. 늦게 찾아와서."
소연을 온몸 가득 감싸고 울었다. 장례식 때와 같이. 휘청거리는 소연의 몸을 지수가 팔로, 어깨로 받아줬다. 소연은 그대로 폭 기대어 울음을 터뜨렸다. 억지로 고름 짜내듯 아픈 눈물이 아닌 속 시원한 파도 소리 같은 울음이었다.
소연의 손에 들려있던 칼이 챙하는 소리를 내며 떨어졌고, 그들도 풀썩 주저앉아 쉼 없이 울었다. 그리고 서로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어깨를 만져주고 몸을 가까이했다. 온기가 담긴 마찰이 서로의 긴장한 근육을 풀어주었다.
소연은 그날, 처음으로 마음껏 펑펑, 짐승과 같은 울음소리를 내었다.
지수는 퇴사하고 안부차 소연에게 왔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방을 쓱 둘러보더니,
"너네 집에 얹혀살아도 되지?"
말 한마디를 던지고 소연에게 씩 웃어 보였다.
소연은 지수를 따라 병원에 갔다. 의사 선생님에게 자신의 인생을 최대한 요약하여 전달했다. 그럼, 선생님은 그때 당시 나의 마음을 물어보았고, 그러면 난 요약한 부분에 덮어놓았던 내 감정을 한참 찾다가 대답하곤 했다.
주요 우울장애 진단을 받고 약을 처방받았다. 의사는 소연에게 우울감은 의지로 없애는 것이 아니라 설명했다. 주요 우울장애의 경우, 세로토닌(serotonin), 도파민(dopamine), 노르에피네프린(norepinephrine) 등 뇌를 관장하는 신경전달물질이 부족해지면서 생기는, 인간의 마음가짐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병이라 말했다. 그러면서 이제부터 소연에게 맞는 약을 찾고 조절하면서 뇌를 다시 살리자고 했다. 소연은 이 불행과 우울함이 나약한 자신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 아님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도서관의 문이 벌컥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수히 많은 동료가 들이닥쳐 책을 뒤지기 시작했다. 어안이 벙벙하여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 오른편에 있는 동료의 명찰에 'Dopamine425378'이라는 일련번호가 새겨져 있었다. 정식 일련번호가 새겨진 옷을 너무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낯설었다. 바로 내 왼편에 있는 동료는 나와 같은 소속이었다. 'Serotonin875374'. 숫자를 보아하니 임무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동료 같아 보였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이 도서관에 다들 떼거리로 몰려 책을 찾는 것인가. 나는 다급하게 고개를 돌려 그들이 무엇을 찾는지 확인했다. 그들은 '지수'라는 이름과 관련된 책을 찾아 펼쳐냈다. '지수'라는 사람과 즐겁게 웃었던 기억, 사진 찍었던 기억, 함께 영화를 봤던 기억, 동생과 지수, 소연이라는 사람 셋이 놀이공원에 갔던 기억. 동료들은 '지수'와 관련된 부분을 찾아 자신이 가진 단말기로 스캔하고 데이터화하여 어디론가 전송했다. 곁눈질하여 살펴보았더니 발신 주소를 보니 중앙관리 본부였다. 저 멀리서 많은 무전기 소리가 엉켜 들렸다.
"여기는 S87485, 데이터 보냈습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
"사라진 행성 복구율 5퍼센트. 특정 기억 데이터화 및 전송 작업에 조금 더 속도를 내도록 하겠습니다. 이상."
행성이 복구되고 있다고? 사실 확인을 위해 밖으로 뛰쳐나갔다. 아까보다 조금 더 환해진 복도를 지나쳐 바깥으로 나갔다. 분명 안개 속으로만 둘러싸여있던 이 행성은 이제 푸른 빛이 아닌 노랗고 온기를 가진 빛을 띠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던 이 주변은 이제 수많은 수송 장치와 동료들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리고 그 무리 속에서 보이는 세 인영.
"도스, 노플, 다래님..."
사라졌다고만 생각했던 동료가 내 앞에 다시 선명하게 서 있었다. 그들은 내 기척을 바로 알아차리고 내 쪽으로 돌아보며 소리쳤다.
"세론!"
나를 부르는 곳을 있는 힘껏 달려갔다. 달려가 그들이 먼지가 아닌 하나의 존재임을 다시 느끼고 싶었다. 나는 그대로 달려가 그들에게 내 몸을 던지듯 안겼다. 그들 또한 웃는 얼굴로 나를 힘껏 받아주었다. 동료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살아있었다. 촉감으로 그 생을 온몸으로 느꼈다.
"사라졌던 행성과 주민들이 복구되기 시작했어. 그리고 행성 간 교통도 활발해지기 시작했고. 이렇게 빠르게 복구되는 건 정말 처음이야. 세론, 우리는 아까 사라지지 않았던가요? 그런데 눈을 떠보니 온전한 채로 이렇게 다시 살아있어요. 이게 어떻게 된 거죠?"
도플이 황당하다는 듯, 연실 웃음을 감추지 못한 채 나에게 질문했다. 나는 뒤에 있는 도서관을 한 번 바라보고, 내 동료들을 바라보았으며, 마지막으로 환해진 이 우주를 보았다.
"드디어 우주가 살고 싶은 마음이 생겼나 보네요."
도플과 노스, 다래는 내 대답에 그게 무슨 소리냐며 되물었다. 이걸 어디까지 이야기해 줘야 할까. 나도 모르게 얼핏 알아버린 우리의 존재에 대해 이야기하려니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어우, 좀 기다려 보세요. 말하려면 좀 정리해서 이야기해야 하니까. 그들의 질척거리는 물음을 피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저기 우두커니.
어두운 세븐의 모습이 보였다.
세븐과 눈이 마주쳤다. 세븐은 그대로 수송 장치 뒤편으로 사라졌다.
"자, 잠깐만!"
나를 붙잡던 동료들의 손을 놓고 세븐에게 달려갔다. 사라지고 싶다던 세븐은 지금 어떤 심정일까. 그렇게 사라지고 싶다던 세븐 앞에 다시 살아나 숨을 쉬는 우주는 세븐에게 어떤 마음을 주었을까.
수많은 물음을 안고 세븐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