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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호정 Dec 15. 2020

나는 당신의 죽음이 두렵다

나의 죽음은 두렵지 않지만

앞선 글에서 나는 수저를 갖고 태어났다가 색깔이 변하다가 수저를 잃게 되었다가 지금 다시 수저를 만드는 중이라는 이야기를 썼다.

https://brunch.co.kr/@kimojung/125


 결혼 전의 내 인생은, 지금도 쪽팔리고 골아픈 이야기인데, 고등학교도 떨어지고 대학도 떨어지고 재수도 실패하는 등 아주양 고약한 세월이었다. 수저를 들고 있었어도 이런 저런 일들이 있었다. 나는 어두웠고 우울했다.


 오히려 연애를 거쳐 결혼을 하면서 하우스푸어, 베이비푸어, 카푸어 등 푸어3종세트를 단기간에 달성하긴 했지만 살기 위한 노력, 발전적인 삶을 위한 노력이라는 측면으로 생각하면 사실상 "별일 없이 산다"에 더 가까운 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남들은 잘 경험하지도 않는 고입실패까지 겪은 것은 지금 생각해도 10대에겐 가혹한 일이었다. 하지만 서른이 넘어 '가정'을 구축하기 위한 것으로 푸어의 단계를 밟는 것을 가혹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내 주변에 물론 잘 사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비슷하게 시작해서 같이, 조금씩, 함께 발전적인 단계를 밟아가는 친구들이 대부분이었다. 별일이 없는 중으로 지금까지 살고 있다.


 


 12월 9일이었다.

밤에 친구에게 카톡이 왔다.

 "윤지회 작가님 돌아가셨어."


 뭐라고.


 나는 인스타그램을 하지 않는다. 네이버 기사검색이 나로서는 제일 빠른 사실확인 작업이었다. 기사가 없다. 네이버에 "윤지회"를 검색했더니 작가님의 인스타그램이 링크되어있다. 들어가봤다.

아.....

작가님은 79년생이다.


 평소 작가님 특유의 따뜻하고 재미있는 그림책을 좋아해왔다. 나는 아이들을 위한 그림책보다는 내가 좋아서 사는 그림책이 더 많은 편인데, 정말 내가 모르는 작가님의 책이 있을까 싶어 검색해서 살 정도였다.



어린이를 키우는 구독자 분들이라면 오다가다 한 번 씩을 봤을 법한 그림책들이지 않나요?


 아들 건오의 초등학교 입학이 2023년이라고 했다. 내 둘째보다도 어린 아이는 엄마를 보냈다. 영생을 믿는 기독교인이지만 죽음은 힘들다. '지금 가도 여한이 없다'고들 한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나'의 죽음은 나도 두렵지 않다. 삶의 완성이라는 생각도 들 것 같고, 홀가분할 것도 같다.


 하지만 남의 죽음은 두렵다. 정확히 말해 '당신(You)'의 죽음이 두렵다. 무섭다. 상상만으로도 괴롭다. 남편과 자식, 부모님, 친구들, 동료들. 특히 친구들이나 동료들은 친하지 않다고 해도 그들의 부고소식은 내 일상을 크게 흔들 것이다. 이민이나 이직 소식에도 마음이 출렁하는데 죽음이라면, 상상이 불가능하다.


 이렇게 일방적으로만 알았던 분의 죽음도 며칠은 괴로웠는데, 지금도 사실 괴로운 중인데 측근의 죽음이라면. 죽음이라는 결핍은 다른 것으로 채울 수가 없다. 그 결핍을 안고 가야한다. 평생. 나의 죽음이 올 때까지.


 난 당신의 죽음이 두렵습니다. 

 부디 곁에 오래 있어주세요.

 당신 곁에 괜찮은 사람으로 오래 머물 수 있도록 기회를 주세요.


 윤지회 작가님의 부음을 듣고, 작가님의 지난 인스타그램을 보며 펑펑 울다가 잠이 들었다.

 

카톡캡쳐에요 동영상아닙니다 누르지마세요ㅋㅋ

일어나자마자 엄마한테 카톡이 와있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시지?


조카가 태어났단다.

둘째 조카다.


응?


이 아이의 예정일은 2021년 1월2일인데.

제왕절개를 해야해서 그 날로 수술날짜를 잡아두었다고 했는데.

이미 그 날도 보통의 출산예정일보다 열흘은 당겨진 날짜일거다.


근데 벌써 낳았다고? 12월10일 아침에?

특히 이날 아침은 올케가 보고할 것이 있어 재택근무 못하고 출근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들은 터였는데. 올케의 출산휴가는 12월18일부터라고 했는데.


헐.


탄생의 소식은 예측불가다. 예측가능하긴 하다. 예측이 가능하니까 조리원도 병원도  다 예약할 수 있다. 하지만 정확하게는 예측불가능이다.  막상 조리원에 입소하려고 하면 일정보다 빨리 출산해서 혹은 늦어서 예약해두었던 방이 엉키는 경우들이 있었다.


 어제는 부고소식을 듣고 울다가 잤는데

 오늘은 탄생소식을 듣고 웃으며 일어났다.

 부은 눈으로 웃고 있는 나는 기가막혔다. 그러다가 이왕 웃은 거, 웃기로 했다. 작가님의 어머니도 저렇게 의연하신데, 나도 같이 의연하자 싶었다. 작가님의 책들은 여전히 살아서 기억으로, 생각으로, 어쩌다 떠오르는 반가움으로 내 주변에 있을테니.




 지나고 나면 별 일이 아닌데 겪고 있는 와중엔 별 일인 일들 때문에, 그러니까 고입과 대입 실패, 전세로 입주만 하면 집을 팔아버려서 계약일 전까지 나가달라고 했던 집주인 둘, 푸어 3종 달성, 산후우울 등으로 괴로웠던 날 들을 지나면서 나는 아직까지는 살기를 선택해왔다. 괴로웠지만 결국은 '괜찮'아졌던 과거의 일들을 생각하면서. 살기를 택하는 것으로 신에 대한 신의를 보이는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그렇게 사는 일에, 살아 있는 일에 익숙해지면 "별일 없이 산다"고 생각했다. 별일 없는 삶의 대부분은, 사실 별일 있는 삶도 대부분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이었고 노력한다고 달라지기 어려운 일들이었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살기, 죽지않기, 정도 였던 것 같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들이 나를 흔든다. 당신의 죽음과 당신의 탄생이 나를 흔들고 나를 붙잡는다. 내가 흔들리고 붙잡히고 괴롭고 슬프고 기쁘고 행복한 모든 것들은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느끼는 것.

 살아서 느끼는 많은 감정들 중에 당신이 살아있다는 느낌을 제일 많이 느끼고 싶다. 당신이 건강하고, 당신이 행복하고, 당신이 웃는 상황 주변에 있고 싶다.


 이제와서 하는 생각은 내 주변이 살아있어야 나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죽음앞에 오열하더라도 다시 살 힘을 얻는 것은 결국 작가님이 남긴 메세지의 아름다움 때문이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그리고

 당신의 죽음이, 당신의 부재가 두렵습니다.

 살기로 결정해요. 살아있습시다.

 부족한 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 수 있는 힘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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