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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호정 Dec 08. 2020

쉬어 가는 페이지

단미 작가님의 글을 읽다가

브런치를 보다가 피드에서 단미작가님의 글을 읽었다.


https://brunch.co.kr/@mimi7292/74

무슨 부자인가, 나는.


지금껏 살면서 겪어온 경제적인 상황들이 주르륵 지나갔다.


그냥 편하게 '~해요'체로 쓸게요 허허^^




저는 서울에서 태어났답니다. 성수동에서요. 방 세개 있는 연립이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태어났더니 집이 30평대였던거죠. 나름 엘리트집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빠엄마 다 대졸이시거든요. 아빠는 영문과 출신인데 당시 군대에 있던 세탁기는 다 미제라서 설명서도 미국말이었는데, 부대에서 미국말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아빠 뿐이라서 세탁병이었다는 썰이 있습니다.


미국말 얘기가 나와서 스타벅스 사진^^ 양평에 생긴 DTR좋더라고요^^


 할아버지가 경제권을 빨리 잃으시는 바람에(아빠 고등학교때? 확실힌 모르겠는데, 그 즈음 온 가족의 미국이민을 준비했었답니다. 하루 전에 중개인이 짐 옮기는 등의 일을 위해 집에 와준다고 했는데 안왔데요. 다 날린거죠. 사기당함. 아빠는 6남매 중 장남) 고딩 영어교사였다가 대기업 건설회사로 취직을 하십니다. 지금도 그 때 아빠 연봉이 얼마였다고 자랑을 하시는데, 살면서 한 번도 아빠의 연봉을 체감하며 산 적은 없... 그만큼 옛날 얘기이기도 하고요.


 엄마는 교육학과 출신이십니다. 저는 자라면서 딱히 엄마의 교육학 프리미엄을 누려본 적은 없지만 우리 애들 키워주시는거 보면 역시 울엄마야! 싶어요. 엄마의 목표는 저의 정년퇴직입니다. 60살까지 일 관둘 생각하지 말라고ㅜㅜ


 엄마는 대학을 졸업하시고 바로 취업을 하셨고 바로 아빠를 만나서 연애를 했는데, 그 즈음에 베이비부머의 자녀들의 수가 많아 교육학과 등 관련 전공자에 한해 6개월 정도의 연수를 받으면 초등교사 자격이 주어지는 특례가 있었다고 해요. 당시 남자친구였던 아빠에게 이 연수를 받고 싶다고 했더니 아빠가 그냥 자기랑 결혼하자고, 일하며 고생하지 말라고, 그 말에 설득당해가지고, 헐, 설득 당할게 없어서, 그 때 연수받지 않고 초등교사 되지 못하신게 천추의 한이십니다. 그 당시에 엄마보다 공부 못하고 놀았던 애들이 50대에 대박적인 연 봉을 받으며 일하는 걸 보시면서


 "니 직업이 딱히 정년퇴직이 없으면 70까지 일해."

 "엄마, 그래도 애들한텐 엄마가 필요하잖아? 둘째까지 초딩가면 나 집에 들어와야 하지 않을까?"

 "어딜 들어와? 그때부터 정규직을 해야지!"

 "헐."

 "절대 들어앉을 생각하지 말어!!"

 네, 저희 남편도 일하는 여자를 좋아해서 저는 결혼식 하루 전 날에도 일을 다 했어요. 제 팔자는 소팔자인가요?


소 사진은 없어서 돼지사진으로 대신ㅋㅋㅋ


 엄마는 결혼 후, 시부모님과 시(남)동생 둘과 함께 사는 놀라운 세상이 펼쳐집니다. 이러려고 연수 못 받게 했나. 아빠의 빅피처인가 싶습니다. 제가 3살 때 성수동에서 화곡동으로 이사했(다고 하)고, 그 동네는 예전에 다 그랬듯이 주택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동네였는데 저희 집은 그 동네에서 제법 큰 집이었고, 주방이 딸려 있는 방이 또 있어 그 방은 세를 주기도 했어요. 대부분 장사하시는 분들이었는데 우리 아빠는 외국계 회사를 다니셨답니다. 허허. 그래봤자 연탄난로 떼고 개똥치우며 시간과 자연의 지배를 받는 삶은 똑같았죠.


https://brunch.co.kr/@kimojung/121



 아빠 직장이 용인으로 옮겨지면서 분당으로 이사했습니다. 학원이든 과외든 뭐 딱히 장애없이 했던 것 같습니다. 따라주지 않는 건 저의 성적일 뿐, 돈이 따라주지 않은 건 아니었던 것 같아요. 혹시 저 그...금..수저 였던건가요?

 

 대망의 97년에 되었습니다. IMF가 왔죠. 대기업다니시는 아빠답게 굳건하게 그 시간을 버티셨습니다. 별 일 없었어요. 아무 일 없었습니다. IMF는 남얘기. 그냥 살던 대로 살았는데, 굳이 뒷북을 치시더라고요. 아빠가 아니라 아빠의 회사가. 아빠가 다니던 회사가 워크아웃이 되면서 2000년에 아빠는 집에 들어오셨습니다.


 아빠의 퇴직 후 엄마는 크린토피아라는 세탁편의점을 하셨고요, 한 5년 정도? 그렇게 모은 돈과 아빠의 퇴직금으로  헬스장을 오픈하셨는데 맛있지도 않게 말아잡수셨습니다. 사기비슷한것도 당했고요. 화장실 두개 있던 아파트에 살았는데 화장실 하나 있는 빌라로 이사했습니다.


 그 시절엔 수저색깔 유행어가 없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래도 은수저쯤은 갖고 태어났던것 같아요. 20대 이후로 수저색깔이 점점 변해갑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대출이나 상가 임대 등의 탈출구가 있었을텐데 50넘게 사시는 와중에 대출 경험이 전무하셔서, 굳이 집을 팔고 이사를 하고 사기를 당하고 뭐 그랬던 것 같아요.


 아파트를 팔고 빌라로 이사를 하면서 집 안에 약간의 현금이 돌았기에 저는 대학원에 진학할 수 있었고, 첫 학기 등록금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위기가 기회였던 단 한 번의 경험이었습니다. 있는 돈을 조금씩 까먹으며 저도 같이 까먹다가 저는 결혼을 했고, 부모님으로부터 축의금으로 2천만원을 받았습니다. 부모님께 도움받은 마지막이었네요. 흑.

 

 결혼하고 나서 약간의 빚을 더해 1억짜리 전세집에 들어갔는데요. 둘째까지 생기니 차가 필요하더라고요. 중고차를 샀죠. 결혼한 지 만 3년도 되지 않아 하우스푸어, 카푸어, 베이비푸어 등 3종 푸어를 달성합니다. 하하. 이 때 완전히 수저를 잃게 되지요.



 첫째가 백일이 되었는데 엄마가 5만원 주셨고요, 돌 때는 반 돈 반지. 그래도 시어머니는 첫째 백일 때 한 돈 반지, 돌때 세 돈 팔지 해주셨는데 우리 집 많이 힘들구나 싶었습니다. 근데 남동생이 아기낳고 백일되었을 때 엄마가 반지 해주셨더라고요. 설마 반 돈은 아니었겠죠? 얼마 전 돌잔치때도 겁나 포장 예쁜걸 꺼내신 걸 봤습니다. 딸에게 용돈받아 아들 준다더니 진짠가 싶고요? 그래도 엄마가 당당한 시어머니였음 싶습니다.


 결혼 후부터 본격적으로 수저를 만들기로 합니다. 저희 집에서 가까운 동네에 분양공고가 났었어요. 2013년~14년으로 기억해요. 51타입은 방2개, 화장실1개였고 59타입은 방3개, 화장실2개였습니다. 첫째 아이 임신중이었고요. 저희는 신혼특공으로도 1순위, 그냥 청약순위로도 1순위였습니다. 두 가지로 다 접수 가능했죠.

 막연히 둘째까지는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59타입을 노렸고, 당시 분양가가 2억8천. 지금 생각하면 똥...은 아니어도 진짜..헐..값인데, 남편이 계약금 1억이 어딨냐, 중도금은 어디서 떨어지냐(3개월마다 1800만원씩 몇 번 냈어야 했던걸로 기억해요)며 자기 회사에서 얼마나 힘들게 돈 버는 줄 아냐며..


 저는 아니까 이러는거다, 우리의 인생과제 중 하나를 빨리 풀자, 대출받으면 되고 정 안되면 팔면 된다 등등으로 꼬셨습니다. 거기 전매제한도 없을 때였거든요. 남편이 난리난리 쳐가꾸 결국 접수를 못했고요. 전세로라도 새 아파트에 살고 싶어서 입주기간에 전세가를 알아보니 분양가 2억8천이었던 그 집은 전세가 3억3천부터 시작했......지금은 매매가 7억도 우스운.... 32평 아니고요, 59타입이면 20평 정도 인가요?



 저는 이 사실에 대해 남편에게 바가지 긁지 않았습니다. 남편은 그제서야 노동은 신성한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죠. 근로소득의 한계를 알았달까요. 처절한 반성의 시간을 거치며 이후로 부동산카페를 들락거리고 주말에 하는 원포인트 강의도 다녀오면서 저의 말을 경청하게 되었습니다.


 

20대에는 다들 그렇죠, 가치를 위해 살았다고 할까. 지금도 그렇습니다만, 근데 살아보니 돈이 필요하...다기 보다는 사는데는 돈이 들어요. 사노요코도 그랬죠. 사는데 돈이 든다고. 그러니 돈 벌 궁리를 아니할 수가 없는거죠.


 아, 남편은 태어날 때부터 수저가 없었습니다. 이런 큰 레슨을 받고 저와 수저를 만들고 있습니다. 남편과 제가 처한 곳이 금밭이었으면 금으로 만들 수 있었을까 싶은데, 잘 뭉쳐지지 않는 흙밭인것 같아요. 자존심이 있으니 모래밭이라고 하긴 싫습니다ㅋㅋ 흙으로 수저를 만들려니 잘 붙질 않아 둘이 성질을 냅니다.


이런 흙밭이면 좋을텐데 벗어나고 싶네요


 쇳불도 당김에 빼야되니 만들기로 작정했을 때 빨리 만들어지면 좋은데 남편은 많이 꼼꼼한 편이라 시간이 걸려요. 행동은 느려도 성격은 급한 저랑 잘 안맞죠. 이럴 때 엄마가(시어머니라도) 잘 붙으라고 물이라도 뿌려주면 좋을텐데, 아니에요. 그냥 독야청청 홀로 서서 제 할 말 다 하고 사는 게 편합니다. 이렇게 흙밭에서 구르는 중입니다. 그런 흙밭에서 애는 둘이나 만들었네요. 애들은 그래도 흙밭이라 좋아하는 것 같아요. 뭐 흙놀이터면 게임 끝이죠.


 우리가 들어가기만 하면 집주인이 집을 팔아버리는 바람에 서러워서 어차피 흙밭이어도 애는 키워야 하니 친정엄마 가까운 흙밭으로 집을 사는게 좋겠다고 얘기했고, 전세가와 매매가 차이가 4천만원 정도 나던 시기에 매매로 옮겼습니다. 그때는 지금같은 대출제한이 없어서 60% 이상까지도 대출이 되었던 것 같아요. 근로노동을 하며 빚을 갚는 속도보다 집이 자기 값 올리는 속도가 빠르더라고요. 저의 촉에 대해 남편은 완전히 무릎을 꿇었고, 촉은 다시 한 번 날을 세워서 뜻을 모았는데 남편은 이제와서 자기는 경희궁 자이에 살고 싶다나, 청담 자이가 이름이 예쁘다나, 갤러리아 포레가 좋겠다나, 꿈이 크다나.....


 아직 수저가 안 만들어졌거든요. 모양이 완성되면 구워야지, 구워야 내가 쓰든 팔든 하지, 그래야 은수저를 새로 사든 은밭으로 옮기든 하지.



 돈은 참 좋은 것인데, 편하게도 해주고 즐겁게도 해주고. 근데 뭔가 모를 자존심이랄까 체면이랄까.

 "가난한 건 창피한 게 아니야."

 "돈 때문은 아니고."

 "세속적인 것에 목숨걸지 말아."

특히나 전 교회문화권(?)에서 살았기 때문에 목사님들은 돈을 좋아할지언정 교육은 그렇게 안시키셨죠. 흣.

지금보다 어렸을 때 부자가 될 것에 대해 꿈을 꾸고, 부자가 되고 싶은 만큼 가져야 하는 책임과 도덕성에 대해 배우고 신경쓰고 체득하고.. 했다면 어땠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저 같은 경우, 들고 있는 수저색깔은 자꾸 변해가는데 '인생에 돈이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랬어, 사람이 비전을 갖고 살아야지.'라면서 유토피아를 꿈꾸고 살았네요. 허허. 지금 이렇게 돈의 직격탄을 맞고 있는데. 그래도 한때나마 유토피아를 꿈꿨던 덕에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잘 쓰고 싶어하고, 그런 꿈을 꾸고 사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제와서는 정말, 돈 많은 부자가 되고 싶어 돈을 벌고 부동산 촉을 세운다기 보다는 사는데 돈이 드니까 살아 가려고 하는 노력이다 싶고요. 혼자의 행복보다 둘의 불행을 택하는 각오로 남편과 결혼을 했는데, 정말 불행은 불행한거더라고요. 비혼 추천합니다(뜬금포).


사랑하긴했었다 남편을, 그렇게 사랑하지 않아서 그렇지ㅋ

 

 저는 무슨 부자일까요,

수저부자네요ㅋㅋㅋㅋ

바뀌어가는 수저의 색깔을 다 경험했을 뿐 아니라 그 수저를 잃기도 해봤으니까요. 심지어 만들고도 있네요.


 돈을 벌 수도 있고 잃을 수도 있는 나라에서, 그래도 돈을 벌어가며 책임감있게 살고 베풀고자 하는 선한 마음과 함께 실제로도 그렇게 살면서 생각보다 긴 인생을 엮어가보도록 할게요(급 포부발표).

 인생이 짧지 않다는 생각이에요. 제 새끼들이 지 새끼들 키워달라고 할 때까지 제가 (사건사고가 없다면) 살아있을 확률이 크니까요. 끔찍하네요. 제 새끼들만 독립시키면 인간으로서의 일은 다 한 것 같은데, 그래도 인생이 안끝나니까 그만큼 인간의 생이 기니까 되고 싶은 부자의 목록을 더 마련해봐야겠습니다.


 꿈 처럼 바람 처럼 돈이 온다면 무엇을 하고 싶은지도요, 그림을 살까요? 그 그림을 담아낼 수 있는 집과 그런 집을 가꿀 만큼 넉넉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살부터 빼야 하나 싶고요(뜬금포2).


 돈을 벌고 쓸 수도 있게, 책을 읽고 그림을 볼 수도 있게,

일단은 코로나가 지나가줬으면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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