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뭔가 특별한 날인 것이 날씨로도 느껴진다. 잘 때도 눈이었는데 일어나도 눈이다. 새벽부터 눈이다. 여전히 집합시간은 7시30분이다. 다들 아침잠이 없으신지 마지막 날 까지도 집합시간에서 단 1분도 지체된 적이 없다. 후아. 선생님들도 대단하시고 그 와중에 부지런했던 나 자신, 칭찬해.
버스로 이동하는 동안에는 우리가 볼 것들에 관련된 간단한 강의가 도막도막이긴 하지만 유연하게 흘러갔다. 마지막 날에 보게 될 미우라아야코, 그의 몇 가지 작품들과 와타나베준이치와 무라카미하루키, <철도원>의 아사다지로에 대해 듣고 각자의 생각을 나누는 시간과 아울러 고요한 침묵속에 감탄만 흘러나오는 창 밖 풍경을 보며 깊은 심심함으로 마음을 토닥여주는 시간도 가졌다.
그러는 사이 우리 옆엔 바다가 나타났는데 그 바다가 '오호츠크해'라고 했다. 뭐 때문에 배웠는지는 까먹었는데 학교다닐 때 무수히 많이 들었던 그 오호츠크해가 내 옆에서 파도치고 있다. 보통 바다 앞으론 횟집이나 카페가 들어서있게 마련인데 여긴 그냥 집들이다. 눈과 바다와 파도라니, 버스안에 있어서인지 몰라도 왠지 따뜻했다.
우리가 내릴 곳은 칼(KAL)기격추사건의 희생자를 위한 위령비가 있는 곳이었다. 바람이 얼마나 쎘는지 그야말로 '칼 같은' 바람이었다. 거짓말 조금 더 보태 볼살이 긁히는 느낌. 소리도 강도도 무서울 정도.
'칼기'라고 하면 일단 김현희부터 떠올라 하마터면 그 사건이랑 헷갈릴뻔 했는데 김현희사건은 1987년이고, 지금 도착한 칼기격추사건은 1983년 9월1일에 뉴욕을 출발한 대한항공여객기를 사할린 상공에서 소련 전투기가 격추하여 승객과 승무원 269명이 사망한 사건이다.
80년대는 우리가 알고 있듯 냉전의 시대이며 야만의 시대였다. 어떻게 전투기가 민간여객기를 격추할 수 있나.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은(이 중엔 한국인 81명뿐 아니라 미국인 55명, 일본인 28명, 중국인 36명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사건임에도 진상은 규명하지 않은채 묻혔다. 눈도 뜨기 힘들만큼, 나는 콘택트렌즈를 착용하고 있는데 바람에 렌즈가 빠지는거 아닌가 싶을 만큼 바람이 셌다. 희생자와 유족의 고통이 고작 이런 추위에 비할 바 아니지만 정말 희생자들의 아픔을 위령할 수 밖에 없는 마음이었다.
혹시 살아계신 분도 있지 않을까? 40년이 되어가지만 저 주변에서, 시대가 막고 싶어하는 것을 막아 안은 채 어디선가 입을 막힌 채로 시대의 관찰자로 존재하고 있진 않을까.
나 하나의 삶은 나만의 삶이 아니다. 나는 이미 너무 많은 죽음을 밟고 그 위에 서있다. 내 존재에 스민 존재들이 몇이며 내 인생을 돕는 인생들이 몇인가.
당장 5박6일의 이 여행을 위해서만도 나는 내 1인분을 위해 두 명이 더 힘써줄 것과 아이들에게는 이제까지 해온 너희 각자의 1인분보다 더 값진 1인분을 해야한다고 설명하고 나왔다.
알지도 못하는 죽음이 내 발 밑에, 내가 무심코 휘두르는 팔 옆에, 어쩌면 내가 내 쉬고 뱉는 숨에도 내가 스쳤거나 신세졌거나 나로 인해 아팠을 사람들의 숨이 섞여 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니, 당연히 섞여 있을 것이다. 우리 몸은 오조오억개의 원자로 되어 있다고 했으니까.
너무추워~너무추워~ 하며 우리는 버스를 탔고 한 시간 정도 더 달려 일본 최북단 와카나이에 도착했다. 바다만 건너면 러시아 사할린이다. 마음이 웅장해졌다. 우리나라 땅끝마을도 안가봤는데 일본 최북단에 와있다. 사람이 다닐 통로를 만들기 위해 치워둔 눈은 내 키보다도 훨씬 큰 산을 이뤘다. 그 산 사이를 걸어 와카나이역사에 들어섰다.
기념적인 곳이라 포토존도 있었고 화장실도 깨끗했고 기념품을 파는 곳도 있었다. 홋카이도에서 나는 남자로 만들었다는 감자칩을 샀다. 전날 기념품샵에서 샀는데 한 봉지만 먹어볼까 하며 가볍게 시작한 것이... 너무 맛있어서 다 먹어버리는 바람에 두 박스를 더 샀다.
왜 여기까지 왔을까. 기념사진을 찍으려고?
결혼생활은, 가정을 이루고 아이까지 낳아서 사는 생활은 마음 끝을 어떻게 다스리느냐의 싸움이었던 것 같다. 마음 끝을 굳게 쌓아올려 강직하고 빳빳하게 살 것인지, 마음 끝을 조금씩 조금씩 두드려서 펴내어 확장적이고 유연하게 살 것인지.
다 성격대로 할 탓이지만 계획과 주장이 강하고 추진력있는 삶을 살았던 나는 변수와 예상치못함이 난무하는 결혼생활이 처음엔 신기하고 재미있었지만 갈수록 이상하고 괴로웠다.
사랑보다 생활이 더 길다는 것을 왜 결혼하기 전엔 몰랐을까. 몰랐으니까 결혼했겠지. 아니면 연애하는 것 같은 그런 생활이 계속될거라 생각했었나보다. 내가 그렇게 감정기복이 심하고 화를 잘 내고 목소리도 큰 사람인지를 아이를 둘이나 낳은 후에야 알게 되었다. 진작 알았으면 마음수련을 했지, 좋다고 아이부터 낳지 않았을텐데. 모르니까 용감했다.
용감했던 만큼 생명을 책임져야 한다는 짐이 크게 다가왔는데 짐을 확실하게 지겠다고 마음 끝을 더 딱딱하게 만들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럴 수도 있지, 저럴 수도 있지, 아닐 수도 있고' 주문처럼 외우며 예상치 못한 인생을 살아내기 위해 마음 끝을 녹이고 두드리고 펴내려고 노력했다.
노력을 한다고 할 때마다 이렇게 매서운 바람이 불었다. 마음을 녹이려고 하면 내 몸이 녹아 내리는 것 같았고 마음을 두드리면 내 몸을 두드리는 것 같았다. 감정적으로도 아프고 육체적으로도 아팠다. 내 30대는 결혼이라는 연애의 실패, 그 패배감이 정서의 기반에 자작하게 깔려 있었다.
마음을 녹여봤자 또 굳지, 뭐하려 녹여. 풀어내지 못한 감정의 쓰레기는 눈밭 사이 통로를 만들기 위해 쌓아둔 눈더미 산보다 더 크고 높았다. 그런 채로 또 굳지.
다시 굳어버릴 마음이었지만 가끔 친구들과의 커피타임으로, 독서와 인문학교실 수강으로, 남편과 데이트로, 육아를 도와주시는 엄마의 사랑으로, 남편이 사주는 가방으로 마음을 녹이고 굳으면 또 녹이고 녹아있으려고 노력하고 그렇게 삶을 연명했다. 하루하루 지푸라기잡은 연명이었는데 이제, 10년이 되고 나니 지푸라기같던 줄은 고성능고무줄 정도는 되었던 것 같다. 끊어지지 않고 내 손에 걸려 있었으니.
일본의 최북단이다. 우리는 이 끝에서 다시 내려갈 것이다. 다른 목적지가 있고, 한국에 돌아가기 위해서도 이제 남쪽으로 내려가야 한다. 이곳에서 나는 나의 어떤 끝을 찍고 돌아가는구나. 돌아갈 수 밖에 없구나.
사랑해서 한 결혼이었지만 애증이 더 가득했던 내 마음의 끝을 찍어본다. 5년전 아니, 1년 전이었다고 지금 내가 30년을 막연히 바라고 바란 미우라아야코의 동네에 와 있을 수 있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