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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무늬 Oct 24. 2021

#1 기억의 되새김질

102번의 전생의 삶을 기억하는 사람의 이야기

기억은 모든 것이다. 사람은 하나의 영혼을 가지고 있다. 다시 태어날 때마다 기억은 사라졌지만, 습관이나 태도, 성격 등은 그대로 가지고 다시 태어났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예전 자신을 기억하지 못했다. 매번 태어날 때마다 자신의 영혼을 처음 태어난 것처럼 학습해나갔다. 하빈은 자신이 살아왔던 102가지 삶에 대해 모두 기억하는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일흔두 번째 삶의 1402번째 먹었던 음식을 기억하는 등의 세밀한 기억은 아니었고, 하나의 삶마다 기억에 남는 사람과 사건들을 기억하는 식이었다. 하빈의 첫 번째 삶은 어느 이집트에서 부채를 부치던 사람이었다. 어느 날은 부채를 부치다가 부채가 부러졌는데, 하필이면 주인의 얼굴에 상처가 나서 매를 실컷 맞다가 어이없게 죽어버렸다. 두 번째 삶은 부채가 필요 없는 어느 추운 북쪽 지방에서 태어났다. 6살이 되던 해에 아궁이에 불을 때면서 부치던 부채를 보게 되었는데 그때 첫 번째 삶의 기억이 하빈의 기억으로 흘러들어왔다. 


현존하는 삶과 전생의 삶이 충돌하자, 하빈은 넋이 나가버렸다. 하루 종일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고 있자, 부모들은 신을 모시는 사람한테 하빈을 데려갔다. 목걸이를 주렁주렁 달고 있던 사람이 얇은 작대기로 하빈의 어깨를 때리고 하빈의 주위에서 하루 종일 방방 뛰어다녔는데 하빈은 끄떡없었다. 1주일 정도 지나자, 하빈은 제정신이 돌아왔고 전생의 삶이 기억난다고 부모에게 말했다. 부모는 1주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던 하빈에게 동물의 영혼이 들어갔다고 생각했다. 하빈은 가족들조차 자신을 믿지 않자 전생에 대해 설명하는 것을 이내 포기했다. 그래도 좋은 점이라고 한다면 두 번째 삶을 살던 하빈이 첫 번째 삶의 기억들로 인해서 삶이 좀 더 풍요로워졌다는 것이다. 기억은 선택으로 귀결된다. 하빈은 선택에 있어서 좀 더 지혜로울 수 있었다. 가장 크게 영향을 받았던 부분은 인간관계였는데, 온갖 이상한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던 이집트 부채 소년이었던 경험으로 인해서 두 번째 삶에서의 인간관계는 무탈하게 지나갔다.


그런데 유일하게 바로 옆집에 살던 수빈은 항상 어려웠다.


수빈은 예민했는데 따스했고, 매사 귀찮아하면서도 하빈이 놀자고 하면 매번 나와서 같이 놀아주었다. 전생에 단 한 번의 사랑도 해보지 않은 상태로 생을 마감했던 하빈은 두 번째 삶의 의미가 바로 수빈이라고 생각했다. 수빈은 하빈이 가장 처음으로 사랑하게 된 사람이었다. 그러나 수빈은 까다로웠다. 어른이 되면 될수록 원하는 선들이 하나씩 생겨났다. 그것은 일정 부분 수빈의 전 남자친구들 때문이기도 했지만, 문제는 하나라도 도달하지 못하면 이성으로서 느껴지질 않는다는 것이었다. 선들에는 키나 외모, 습관들이 존재했는데, 하빈은 몇 개의 선 안으로는 아슬아슬하게 들어올수 있었지만 몇 개는 넘을 수 없었다. 그중 가장 큰 선은 하빈이 여자라는 점이었다. 하빈의 두 번째 삶을 살던 시대에서는 성을 바꾸는 수술이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동성애 금지도 심했던 터라 하빈은 깊은 좌절감에 빠져서 사랑을 포기하고 수빈과 가장 친한 친구로 살았다. 


세 번째 삶에서 하빈은 남자로 태어났다. 드디어 수빈에게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한 하빈은 태어나 자마 우렁찬 울음소리로 세상에 화답했다. 그러나 바로 옆 요람에서 수빈 역시 남자로 태어난 것을 보게 된 하빈은 하루 종일  빽하고 울어댔다. 그래도 하빈은 아주 어린 시절 스리슬쩍 수빈의 손을 잡고 걷고는 했는데, 이후에는 거의 매일 손을 잡고 걸었다. 그러나 그 행복감도 얼마 지나지 않았다. 손을 잡으려는 하빈의 손이 거슬린다고 뿌리친 수빈은 어느새 예쁜 여자라면 사족을 못쓰는 남자로 성장했다. 길을 가다가도 예쁜 여자가 지나가면 고개를 돌리고 여자가 사라질 때까지 보는 놈이었다. ‘하아.. 진짜 내가 어쩌다가 이런 놈을 좋아하게 됐을까?’ 하빈은 그럴 때면 수빈의 뒤통수를 퍽 하고 쳤다. 수빈은 그런 하빈을 끝까지 따라가서 다시 복수하고는 했다. 하빈은 이번 인생에서 또다시 수빈의 친한 친구가 되어주었고, 수빈의 장례식에서 목놓아 울었다. 네 번째 삶에서 드디어 하빈은 남자로, 수빈은 여자로 태어났다. 


매번 그랬듯이 수빈을 좋아하는 남자들은 많았다. 그것은 수빈의 영혼이 가진 매력으로 인한 그림자 같은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하빈은 수빈에게 수많은 남자들 사이에 그저 그런 평범한 남자 중 1명으로 취급받았다. 그래도 이상하게 하빈은 자신의 취향과 성격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라는 것에는 별 이견이 없었다. 하빈은 서툴렀다. 그래도 끊임없이 수빈을 챙겼고, 고백했다. 수빈은 계속해서 그런 하빈을 밀어내기만 했다.그럴 때마다 수빈은 하빈에게 매번 “나는 너를 만나면 가장 솔직하고 많이 웃지만, 도저히 이성으로는 느껴지질 않아”라며 거절했다. 하빈은 그런 말을 하는 수빈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그런 수빈의 거절도 수빈의 개성이라고 생각하며 사랑했다. 그러나 수빈은 다른 사람과 결혼했다. 하빈 역시 수빈을 포기하고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과 결혼했다. 둘 다 행복한 결혼생활이었지만, 어딘가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이 있었다. 


온전하고도 완벽한 솔직함의 결여가 각자의 결혼 생활에서 불만족을 야기했다. 그러나 둘이 태어난 시대에는 이혼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다. 죽을 때까지 유지해야 하는 것이 결혼이었다. 둘은 불만족을 껴앉고 평생을 살았으며 그렇게 각자의 삶을 마감했다. 다섯 번째 삶에서 하빈은 수빈을 찾을 수 없었다. 하빈은 수빈을 평생 동안 찾아 헤매었다. 태어나면 태어날수록 인구수가 급격히 늘었고, 갈수록 수빈을 찾기 어려웠다. 딱 한 번. 딱 한 번만 눈을 마주치면 하빈은 수빈을 알아볼 수 있었다. 어떠한 색깔의 눈동자도 수빈의 아름다운 영혼이 담기면 깊고 깊은 심연의 눈동자가 되었다. 아마도 하빈은 수빈의 그러한 눈동자를 사랑했을 것이다. 그러나 30년 동안 찾아 헤매었던 하빈은 더 이상 수빈을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하였고, 부모님이 소개해 준 사람과 결혼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이가 태어났다. 그 순간 하빈은 깨달았다. 


‘이번 생애에서는 수빈이 나의 자식으로 태어났구나.’ 

하빈은 가슴이 아프기도 했지만, 벅차기도 했다. 하빈은 최선을 다해 수빈을 길렀다. 수빈의 똥 기저귀도 갈고, 수빈이 열받아서 얼굴을 할퀴거나 엉덩이 똥침을 놓아도 하빈은 그런 수빈의 장난을 다 받아주었다. 수빈은 건강하게 자라주었다. 성인이 되어서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도 했는데, 수빈을 떠나보내는 날에는 하루 종일 울적했다. 딸을 끔찍히 여기는 것을 아는 하빈의 아내는 그런 하빈의 손을 말없이 잡아주었다. 그러나 불행은 갑자기 종이에 베이듯 소소한 행복의 삶 중에 불현듯 찾아오는 법이었다. 수빈은 안타깝게도 병에 걸리고 말았다. 끔찍한 병이었다. 정신을 놓아버리게 되는 병 때문에 수빈의 남편은 이내 도망가 버렸고, 하빈은 수빈이 죽을 때까지 묵묵하게 수빈의 병수발을 들었다. 병수발이 끝나자 하빈은 기력이 다하여 금방 죽고 말았다.


한 번은 남매로 한 번은 수녀와 신부로 그렇게 계속해서 엇갈리던 이 둘의 관계는 102번째 삶이 되어서야 드디어 사귀게 되었다. 하빈은 진심으로 수빈을 사랑해 주었다. 수빈의 형제, 자매, 부모, 친구로서 살아봤던 하빈은 그 누구보다 수빈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수빈 역시 102번째가 되어서야 비로소 하빈을 사랑하게 되었다. 수빈의 갈라진 영혼이 하빈의 영혼을 받아들이자 매끈한 형태로 완성이 되었다. 둘은 완벽한 하나의 영혼이 되었다. 거의 매 순간을 같이 지냈으며, 무슨 일을 하더라도 시선 한구석에 상대방이 있어야 마음이 편안했다. 사랑하기에도 부족한 시간들이었다. 매번이 아쉬웠으며 옆에 있더라도 그리운 시간들이었다. 그러나 삶은 짧았다. 이번 삶에서 처음으로 하빈은 수빈보다 먼저 죽게 되었다. 하빈은 사랑하는 사람이 앞서서 죽은 경험을 100번 정도 경험해본 사람이었다. 떠나보낼 때의 깊은 심연의 슬픔을 알기에 남겨진 수빈을 위로하기 위해 하빈은 죽기 전 마지막 쪽지를 남기었다.


나의 영혼은 

너를 사랑하기 위해 태어났으므로

어떤사람으로 태어나더라도 

나는 너를 사랑할 것이다


네가 나에게 준 상처들도 사랑하며 

모든 기억들을 소중히 간직하여

다음 생에도 너에게 갈것이다


지구를 떠나지 못하는 달의 습관처럼

모래를 만나러 오는 파도의 발자국처럼

너에게 금방 돌아갈 것이다


조만간 만나자. 

그리고 다시 사랑하자.


102번째 삶의 마지막 글이었으며, 

103번째 삶을 시작하기 위한 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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