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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무늬 Oct 24. 2021

#12 서하와 여름


완벽한 남자였다. 매너와 말투, 얼굴과 스타일, 취향까지 서하의 이상형이었다. (심지어 꿈에 그리던 복근도 있었다! ) 그러나 이상하게 서하는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분명 만나기 전에는 설렜고.. 만나고 나서도 많이 웃었는데 말이다. 왜 나는 이 남자에게 끌리지 않는가! 서하는 자책했다. '이런 기회는 평생에 한 번뿐이야. 정신 차리자 이서하 제발'  서하는 이게 다 김여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김여름은 전혀 완벽하지 않았다. 오히려 부족하다면 부족할 수 있는 남자였다. (복근은 개뿔) 그런데 이상한 끌림이 있었다. 그 아주 이상하고도 작은 끌림이 서하의 발목을 잡았다. 끌림의 원천이 뭔지 모르겠지만 서하는 여름이 항상 궁금했다.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서하는 여름에게 가끔가다 "뭐 하고 지내?"라는 질문의 그림자로 자신의 속마음을 숨겼다.


서하는 여름의 여자친구가 궁금했다. 여름은 어떤 스타일의 사람과 연애하고 있을까? 가끔 보이는 인스타 피드에 올라오는 여름의 취향은 독특하지만 따스했고, 유명한 곳을 가더라고 꼭 엉뚱하고 이상한 구석을 찍곤 했다. 그러다 정말 우연하게 서하는 건너편 길에서 여름과 여름의 여자친구를 보았다. 키는 여름보다 작았고 엄청 말랐는데, 마스크를 쓰고도 뿜어져 나오는 이쁨이 있었다. 그런데 어디서 눈에 많이 익은 사람이었다! 요새 텔레콤 광고에 나와서 유명해진 사람이었다. 여름은 여자친구의 손을 꼭 잡고 걷고 있었는데 한여름에도 여자친구는 온전하고도 완전히 평온해 보였다. 서하는 둘의 모습을 가만히 보다 집에 돌아왔다. 자기전에는 여름의 여자친구 광고를 몇 번이고 돌려보았는데, 그 날 꿈에서 서하는 여름의 여자친구 손을 꼬옥 잡고 있었다. 


여름은 최근 오랜 연애를 끝마쳤다.서하는 직감적으로 그것을 알았다.한 달에 한 번 즈음 보내는 연락이 일주일에 한번으로, 몇일에 한번 정도로 보내게 되었다. 그리고 늦여름에 서하는 드디어 여름과 데이트를 했다. 콩국수를 먹었고, 그늘을 보며 뜨거운 커피를 마셨으며 밤이 되자 한 시간 정도 같이 걸었다. 여름은 대화하는 법이 특이했다. 끊임없이 말하는 남자들과 달리 띄엄띄엄 말했는데 엄청 웃기기도 하면서도 몇 분 동안은 생각을 하게 하는 질문을 갑자기 하기도 했다. 한 시간만 대화했는데 뭔가 확장되는 기분이었다. 그 이상한 기분이 서하는 좋았다. 그러나 그게 끝이었다. 여름은 연락을 항상 먼저 하지 않았고, 서하는 매달리기 싫어서 먼저 하지 않았다. 2주 정도가 지나고 나서 연락을 먼저 해볼까 생각했지만 그때 마침 십년지기 친구가 정말 평생에 만나보기 힘든 사람이라며 소개팅 제의를 했다. 소개팅이 끝나고, 남자는 지하철역 앞에서 애프터 신청을 했다. 그리고 지하철을 타고 오는 도중에 김여름한테 연락이 왔다. 


"산책할래?"

서하는 김여름의 연락을 받고 이제 좀 김여름을 내려놔야겠다고 생각했다. 서하는 김여름한테 시간을 좀 달라고 말하고 소개팅 복장과 화장을 싹 다 지우고 나갔다. 김여름은 편한 복장에 화장도 안한 서하를 보고 조금 눈이 커진 것처럼 보였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서하는 산책을 하면서 오랫동안 침묵했다. 그동안 연락을 하지 않은 여름에 대한 반항심과 그럼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신의 무력함에 침울하기도 화가 나기도 했다. 서하의 서운함은 여름의 경계를 넘을 수 없었고, 늦여름에 찾아온 여름의 문은 이미 닫기에는 너무 무거워져있었다.


서하는 김여름에게 말했다."이제 같이 산책 안 하려고" "왜?" "네가 좀 불편해졌어" "아, 그래.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김여름은 이유를 묻지 않았고 담담히 옆에서 걸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하는 소리를 들었다. 여름의 심장소리를. '심장소리가 이렇게 크다고?' 서하는 여름이라면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하는 심장소리에 경쾌하게 보폭까지 맞추며 걸었다. 산책코스가 끝나갈 때쯤 여름이 나지막이 말했다.


"저기"

"응?"

"서하야 네가 좋아."

"뭐?"


그날 서하는 여름과 키스했다.


어느새 입추였다. 이제는 밤 산책을 해도 땀이 나질 않는 날씨였다. 여름은 투명했고 단조로웠다. 서하는 만나면 만날수록, 스스로를 여름의 미스터리를 하나씩 해결하는 탐정 같다고 생각했다. 서하는 여름에게 매일 만나자고 채근했다. 여름을 매일 보아도 서하는 갈증이 났다. 그러던 어느 날 여름이 카페 화장실에 갔을 때 카톡이 왔다. 여름은 서하에게 비밀번호를 알려줬었는데, 카톡이 궁금했던 서하는 핸드폰의 잠금을 살짝 열었다. 

"오빠 뭐하고 지내?" 

그녀는 여름의 전 여자친구였다. 서하보다 5살이나 어리고, 오래 만났던 전 여자친구. 서하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걸었던 여름이 떠올랐고, 이내 핸드폰을 닫고서는 자신의 손바닥을 어루만졌다.

여름이 화장실에서 돌아왔다. 

그리고 핸드폰을 확인하자마자 여름이 말했다.

"전 여자친구한테 연락 왔었네?" 

"아? 그래?"

"응 근데 걱정하지 마. 내가 알아서 할게" 


서하는 사실 그녀의 연락을 보고 전 남자친구들이 생각났었다. 전 여자친구의 연락을 항상 숨겨왔던 치졸하고도 옹졸한 쓰레기 같은 전 남자친구들 말이다. 그러나 여름은 달랐다. 투명한 여름은 바로 말해주었고, 서하는 역시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문제는 서하가 혼자있을 때였다. 서하의 상상에 두텁고 무거운 구름이 찾아왔다. 화창하던 여름에 장마가 든것처럼 나쁜 상상이 계속 되었고, 가끔 손이 떨리기도 했다. 서하는 여름의 대응이 궁금했다. 기회를 엿보다 결국 여름의 핸드폰 잠금을 해제했다.


서하는 여름이 전 여자친구에게 보낸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으니, 더 이상 연락하지 말아달라"라는 카톡을 보고 안심했다. 서하에게는 능력이 있었다. 능력의 이름은 "사람의 눈을 보면 진심을 알 수 있다" 오직 진실할 때 빛나는 사람의 눈빛이 있었다. 서하는 그 눈빛을 읽었다. 서하는 소개팅 남자의 탁한 눈빛이 싫었다. 여름의 눈빛은 항상 투명했고 진실했다. 서하는 그런 여름의 눈빛이 좋았다. 그래서 여름이 계속 생각이 났다. 항상 청량한 여름의 눈빛. 그러나 그런 여름의 눈빛이 단 한 번 흔들렸던 적이 있었다. 바로 전 여자친구에게 연락 왔던 날이다. 그런데 시점이 이상했다. 보통은 연락 온 것을 보고 나서 흔들려야 하는데, 여름은 핸드폰을 만지기도 전에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서하는 궁금했다. 

핸드폰을 보지 않아도 전 여자친구한테 

연락 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일까?  

에이, 설마 

나처럼 사람의 눈을 보고 

진실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니겠지? 


나는 여름이다. 심장이 오른쪽에 있는. 나는 오랫동안 아팠는데 그 사이에 나의 심장은 비대해졌다. 의사는 내 심장이 왜 비대해졌는지 모르겠다고 했다.다만 일상생활에 큰 지장은 없을 거라고 했다.마지막 수술이 끝난 겨울, 나는 다른 사람의 심장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심장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사람들의 거짓말을 쉽게 알 수 있었고, 자주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은 멀리했다. 그게 내 심장을 지키는 방식이었다. 거짓말이 싫었다. 투명해지려고 노력했다. 투명하게 살기 위해서는 우선 말을 가다듬어야 했다. 솔직한 말에는 가시가 있는 법이다. 나는 졸지에 꽃집을 운영하는 사장님의 마음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첫사랑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할 때 들리는 심장 소리와 리듬을 잊지 못한다.

그녀의 심장 소리는 밝고 경쾌한 재즈 같았다. 심장 소리는 성격을 닮았다. 나는 금세 그녀가 좋아졌다. 우리는 오래 만났다. 나는 그녀에게 내가 거짓말의 심장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보통의 연애를 하고 싶었다. 그녀의 거짓말은 사소하고 귀여웠으며 사랑스러웠다. 나는 그녀로 인해서 거짓말을 사랑하게 되었다. 사랑해서 하는 거짓말의 심장소리는 사랑했을 때의 심장소리와 비슷했다. 그러나 그 심장소리가 거짓말로 바뀌었을 때 나는 알았다. 첫사랑이 끝났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처음으로 그녀에게 거짓말을 했다. 더이상 좋아하지 않는다고. 


서하의 심장은 느리게 뛰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서하는 다른 심장의 세계에서 온 사람 같았다. 걸을 때 들리는 평온한 심장 소리가 좋았다. 서하의 심장소리는 오키나와의 큰 수족관에 있는 고래의 심장소리와 닮았었다. 나는 서하의 소리가 설레었다. 나는 서하의 거짓말을 판별할 수 없었고, 그녀를 만나 보통의 사람이 되었다. 보통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물속에서 하늘을 보는 것 같았다. 출렁이는 감정들이 물 밖의 구름처럼 멀리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의 옆에서 그녀의 심장을 닮아갔다. 더 이상 심장 소리를 신경 쓰지 않았고, 파도 소리와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들을 듣기 시작했다. 그러한 서하의 심장소리가 화장실을 다녀온 사이에 바뀌었다. 나는 금방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날 집에 가서 전 여자친구에게 더 이상 연락하지 말아달라고 카톡 했다. 전 여자친구는 미안하다는 내용의 카톡을 보내왔고 나는 더 이상 답하지 않았다. 나는 심장을 지키기로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요즘 따라 서하가 나의 눈을 자주 쳐다본다. 


그것도 너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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