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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아울 Jul 12. 2022

엉뚱한 일에 고마워하기

이제 막 무신론자가 된 나의 감사

무신론자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혼란스러운 생각 하나가 있다. 신이 없는데, 누구에게 감사해야 할까? 이 주제에 대해 평생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모든 일의 종착지이자 시작인 신에게 감사해왔다. 단순하기도 하고, 편협하기도 했다. 고마운 사람에게도 감사하지만 신에게는 더 감사해야 했다. 감사를 신이 아닌 존재들에게 한다는 것이 쓸모가 없게 느껴지기도 하고, 아직 나는 완전히 종교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것 같다. 


이제는 고마운 일이 생기면 바로 그때 즉시 지금 여기서 감사하기로 마음먹었다. 꼭 사람이 아니어도 될 것 같다. 나른할 수 있는 시간에 감사하고, 찰랑거리는 얼음물에 감사하는 식이다. 고마우면 그것에 대고 한다. 이런 식의 감사가 어색해서 잘 될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앞으로는 만물에게 다 그때 감사하려고 한다. 아예 안 하는 방법도 있는데, 그건 삶이 너무 무미건조할 것 같다. 


전혀 고맙지 않은 상황에서도 고마워할 방법을 찾아냈다. 바로 엉뚱한 곳에 하면 된다. 일단 화, 분노, 억울함, 짜증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몰아치면 여기서 기술적, 조금은 기계적으로 접근해본다. 시선을 돌려서 그로 인해 고마운 일을 찾아내버리는 것이다. 합리화나 정신승리일 수도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해결할 수 도 없는 분노에 끝도 없이 매몰된다. 적당한 분노는 쾌감이 있지만 심하게 집중하면 분노라는 애는 특히 내면에서 퍼지다가 밖으로도 잘 퍼져나간다. 그런데 무슨 생각이든 몰두하면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되지 않나? 감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최근에 선물해준 물건을 다시 수거해간 사람이 있었다. 안써서 어디 묵혀둔 걸 본 게 아니라 내가 잘 사용하고 있는 걸 본 이후였다. 다시 만들어준다고 했지만 나는 내가 쓰던 게 좋다고 말했다. 그리곤 들리는 대답이 명확하지 않았다. 내 물건이 다시 올 거라는 기대를 하지 않는다. 저번에도 이런 일이 두 차례나 더 있었지만 그 물건에 별로 애착도 없었기에 대수롭지 않았다. 그러나 세 번은 다르다. 두 번까지는 그럴 수 있어도 세 번째에는 의미가 부여된다. 다른 사람에게도 이렇게 대할까? 나만 호구로 보이나? 무례하다는 걸 알까? 편해서 가까우니까 그럴수있다고 생각할까? 이런 저런 분석을 해봐도 선명한건 하나 뿐이다. 그 분은 나에게 사과할 생각이 없다는 것.


이 시점에서 기계적으고, 또 기술적으로 감사를 시작해야 한다. 내 것을 뺏긴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친구가 있어서 고맙다. 나에게 뭘 가져가도 나는 다시 살 수 있는 돈이 있어서 고맙다. 줘 놓고 다시 가져갈 정도로 내가 가진 것을 부러워하는 구나, 나에게 있으면 예뻐 보이나 싶어서 고맙다. 앞으로 선물이라면 뭐든 덥석 덥석 받지 않기로 결정한 나의 새로운 다짐에 감사하다. 이런 일도 나에게 일어나는 재미가 고맙다. 그리고 마침내 글감이 재탄생되었으니 더할 나위 없다. 앞으로 내 삶에 주어진 괴로움도 많겠지만 더 많은 행복을 일일이 세면서 살아야겠다.


인간이란 자기 괴로움을 세는 것만 좋아하지. 자기 행복은 아예 세 질 않아. 만약 제대로만 센다면 누구나 자기 몫이 있다는 걸 알게 될 텐데. 
지하로부터의 수기,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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