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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아울 Mar 07. 2023

우리, 스무 해 지나 만나자

20년 전 담임선생님과 한 약속을 지켰다


우리, 20년이 지나고 초등학교 느티나무 아래에서 만나자.
그때에 누군가는 결혼을 하고 아이도 있을 거야. 다 같이 와도 좋아!


학교를 갓 졸업한 멋진 남선생님은 24살이었다. 우리가 첫 제자여서 그런지 선생님께 많은 사랑을 받았다. 선생님이 한 학기를 마치고 군대 간다고 했을 때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른다. 실과시간에 샌드위치를 만들고 찍은 단체사진과 편지를 가지고 책받침을 만들어주셨다. 그 맨 아래 '2023. 3. 1.에 느티나무아래에서'라고 쓰여있는데 내가 쓴 건지, 선생님이 써주신 건지 기억은 안 난다.


얼마 전 이사한 친구가 집 정리를 하면서 그 책받침 사진을 발견했다고 문자를 보내왔다. 우리 진짜 만날 수 있겠지? 누가 기억은 하려나? 내가 연락하고 있는 초등학교 친구들은 딱 둘 뿐인데 초등학생 시절 이야기만 나오면 6학년 이야기가 빠지지 않았다.  서른 살이 지날 때쯤 우리 정말 그날이 오고 있다며 설레고 신기해했다. 선생님조차 기억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때 묻어둔 타입캡슐도 꺼내보자고 했다. 그 속에는 20년 후에 나에게 쓰는 편지를 적었고 어떤 물건도 들어있다고 했다. 기억이 제각각이라 실제로 어떤 게 나올지 궁금했다.


약속시간이 가까워지자 차 두대가 학교 앞에 왔다. 모두 친하게 지내던 친구 두 명이었다. 너무 오랜만이라 어색했지만 금방 초등학생처럼 자연스러운 대화를 나눴다. B는 꾸준히 연락해 온 친구였고, C는 아이가 셋이나 있는 여엿한 아빠였다. 친구 둘은 선생님보다 훌쩍 커버렸다. 마지막으로 선생님이 등장했고 우리는 서로 감격스러워했다.

긴 이야기를 제쳐두고 우리는 타입캡슐 이야기부터 꺼냈다. 나는 무조건 오늘 확인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늘 아니면 영영 봉인된 상태로 있을 거라고 했다. 그러자 한 친구가 트렁크에서 삽과 목장갑을 꺼내왔다. 그리고 냅다 파기 시작했다. 추운 날씨라 손이 시렸는데도 웃느라 정신없이 삽질을 이어갔다. 그러다 퍽하고 뜯어지는 소리가 났다. 뚜껑이 삽에 의해 박살 났고 그 덕에 캡슐을 찾을 수 있었다.


우리가 생각한 파란색이 맞았다. 밀폐가 잘되지 않을 것 같았는데 역시 이미 젖어있어서 종이가 썩어 악취도 났고, 대부분의 형태는 알아볼 수 없었다. 그래도 틈틈이 친구들의 이름을 발견해서 사진을 찍었고, 기억도 안나는 테이프를 발견했다. 어떤 목소리가 녹음되어 있을지 영원히 궁금할 것 같다. 나에게 쓰는 편지는 되도록 한 문장이라도 읽어볼 수 있도록 한참을 세세하게 펼쳐냈다. 선생님은 우리가 고고학자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타입캡슐이 묻힌 위치는 바뀌어져 있었다. 알고 보니 B의 친구 아버지가 작년까지 우리 초등학교의 교장선생님이었고, 학교가 철거되고 다시 지어진다는 소식을 듣고 친구가 타임캡슐 이야기를 전했다고 했다. 그 덕에 우리 타입캡슐 위에는 근사한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오늘까지 이 이야기가 있기까지 많은 고마운 사람들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선생님 앞에서 쉴 새 없이 떠들었다. 아마 6학년 시절에도 그랬던 것 같다. 선생님 앞에서 말하기 좋아했던 우리들. 선생님은 우리처럼 순박한 아이들이 없었다고 하셨다. 우리의 기억을 꺼내놓아 보니 웃긴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우리는 이육사, 윤동주, 백석 등의 시를 참 많이 외우기도 했는데 선생님은 미안해하셨다. 우리는 현대문학 지문에 나와서 좋았다고 말했지만 선생님은 첫 제자라 시도한 게 많다며, 연신 미안해하셨다.


그때에도 알고 있었다. 젊고 멋진 선생님이 우리에게 알려주고 싶은 게 많았고, 우리는 즐겁게 배웠다. 그리고 그 기억이 20년이 지나 아직도 잊히지 않아서 다시 약속을 지키러 교정에 갔다. 타임캡슐에 남아있는 게 흐릿해도 기억은 생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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