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할머니의 팬티

16. 할머니의 팬티

by 파랑

나는 속옷 서랍장에서 팬티를 꺼낸다. 내 엉덩이보다 훨씬 큰 사이즈의 순면 팬티다. 자잘한 연보라색 꽃무늬 팬티로, 앞쪽에는 검정색 유성매직으로 ‘김덕자’라는 이름이 크게 씌어 있다. 김덕자는 할머니 이름이다. 팬티에 할머니 이름을 크게 또박또박 쓴 장본인은 바로 나다.

팬티에 두 발을 넣고 밴드를 허리로 끌어올린다. 할머니 팬티가 이렇게 편할 줄 몰랐다. 펑퍼짐한 팬티가 내 엉덩이를 낙낙하게 감싸주는데, 평화롭고 자유롭고 더군다나 아주 고요하다. 뭐라고 더 표현할까? 엉덩이가 무위자연으로 돌아간 느낌이라고나 할까?


남자친구 용태와 약속이 있다. 지하철 7호선 뚝섬한강공원역으로 나오란다. 오랜만에 만난다. 그동안 서로에게 일이 너무 많아서 데이트할 겨를도 없었고, 그럴 처지도 아니었다.

집을 나선다. 할머니 팬티를 입으니 발걸음이 씩씩해진다. 속옷 서랍장에는 할머니 팬티가 열아홉 장이나 더 있다. 요양병원에 입원 중인 할머니가 팬티 대신 팬티기저귀를 입게 되었다. 그저께 요양병원에서 팬티를 받아왔다. 그동안 열심히 사다 날랐던 팬티 스무 장이 소용없게 되었다. 김덕자 팬티는 이제 내 차지가 되었다.


지하철 뚝섬한강공원역 출입구에 용태가 서 있다. 유원지를 향해 걸어가면서 용태가 한숨을 내쉰다.

“할머니는 좀 어떠셔?”

“음……, 괜찮으셔…….”

나는 말로 표현하고 싶지 않은 뭔가를……, 그냥 삼킨다. 나중에, 더 나중에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고 싶으면 그때 말하리라.

용태도 아무 말 없이 걷는다. 용태는 걷다가 그늘이 나오면 나를 그늘로 밀어넣는다.

“두드러기는 다 나았지?”

내 물음에 용태가 피식 웃는다.

“가슴 어깨 등짝까지 번졌고 팔 다리까지 번져나갔어. 피부과를 열심히 들락거려도 나아지지 않아. 병원에서도 원인을 몰라.”

“아직도 안 나았어?”

용태가 허탈하게 웃는다.

“대증요법으로만 치료약을 주는데 효과가 없어.”

푸른 수염이 그를 잔혹하게 괴롭혔듯이 두드러기도 그를 잔혹하게 괴롭히고 있나보다.

“나 환공포증까지 생겼어. 하다하다…….”

용태가 또 피식거린다.

“그게 뭐야? 그게 왜 생겨?”

“얼굴과 손발 빼고는 모조리 두드러기가 쫘악 퍼졌거든. 얼마나 촘촘하게 얼마나 질서정연하게 점령했는지 몰라. 내 몸을 거울에 비쳐보고 있으면, 속에서 토가 올라와. 너무 역겹고 혐오스럽고 그냥 막 내 몸을 죽여버리고 싶어. 누가 내 피부를 프레스기에 넣어서 빨간 땡땡이무늬를 인쇄한 것 같아.”

대체 뭐라고 하는지? 믿기지 않는 이야기인데……, 용태의 말에 더 귀를 기울인다.

“병원에서는 뭐래?”

“크하하……. 진찰하는 의사도 아무 것도 몰라. 어린 의사새끼들이 와서 땡땡이 살펴보고 사진 찍고 지랄이야. 기분 더럽게. 교수는 약 처방해주고, 다음 주에 뵙도록 합시다, 그 말뿐이야. 아무 설명도 못해. 다 엉터리들이야.”

내가 용태 셔츠의 소매를 올리며 그의 팔뚝이라도 볼까 하다가 그만둔다.

“내 몸을 막 자해하고 싶어져. 땡땡이 피부를 보고 있으면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막 어지럽고……. 아무도 이해 못할 거야……. 그래서 내 몸뚱이를 안 봐. 눈 감고 샤워하고 거울도 억지로 보지 않아. 미치거나, 나를 죽이거나…….”

내 상상으로 땡땡이 피부를 떠올리니 오싹해진다. 용태의 팔뚝을 보면 나도 토하고 싶어질 수도. 환공포증에 홀려서 어지러울 수도.

“어떤 심정인지 알 거 같긴 한데……, 무서운 생각 좀 그만 해.”

“한강을 보면, 편하게 쉬는 사람들도 보고 강바람도 맞을 수 있어서 오라고 했어. 너야말로 말로 할 수 없는 큰일을 많이 겪었잖아. 너 위로해주고 나도 위로받고. 우리 마음 편하게 놀아본 적이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난다. 힘든 일들의 연속이었지.”

또 한숨을 내쉬면서 용태가 한강의 풍경을 둘러본다. 예전보다는 표정이 다소 편해진 느낌이다. 그늘막 아래에 앉은 사람들과 벤치에 앉은 사람들도 많다. 돗자리를 펼치고 드러누워 쉬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다들 평화롭게 햇살과 강바람을 즐기고 있다. 머리 위로 거대하고 멋진 뚝섬자벌레가 떠 있다.

청춘이 끝나가고 있는 느낌이다. 우리에게 불어오는 바람도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들도 차분해 보인다. 기세 좋게 뻗어 오르던 나뭇잎들이 아니고, 거칠게 불어대던 바람이 아니다. 햇볕도 뜨거운 열기가 잦아들고 있다. 거대한 도시 서울을 가로지르는 다채롭게 반짝거리는 한강. 아직 내 몸속에도 내 마음속에도 다채롭게 반짝이는 뭔가가 있을까?

내가 옆에 있는 용태의 팔을 잡고는 마구 흔들어댄다.

“우리 오리 타자. 오리 타고 놀자.”

우리는 선착장으로 가서 티켓을 살펴본다.

“수동 오리배가 더 재밌지 않을까?”

내가 웃으며 용태를 바라본다. 용태가 고개를 끄덕인다

구명조끼를 입고 오리배에 올라탄다. 페달이 앞좌석 두 곳에 다 있다. 나는 한 사람만 발로 노를 저으면 되는 줄 알았다. 이크, 나도 다리 운동해야 하는 구나.

용태와 내가 발로 페달을 돌려 노를 젓는다. 용태가 열심히 페달을 돌리면, 나는 따라갈 수가 없다. 용태가 다리가 길고 힘이 세니까, 그 속도에 내가 맞추기가 힘들다. 내가 버벅거리는 걸 보고 용태가 그제서야 웃음을 터트린다.

“이거 쉽지 않아.”

“넌 열심히 노를 저어라. 나는 풍광을 즐기겠다.”

나는 거만하게 명령하고 페달에서 발을 떼며 킥킥거린다.

용태 혼자만의 노력으로도 오리배는 잘 나아간다. 강바람을 시원하게 마신다. 배가 뒤뚱거리면서도 물결을 헤치며 잘 나아간다.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할머니와 나는 망망대해에 떨어져 각각 다른 파도에 휩쓸려 알 수 없는 세계로 각자 흘러가고 있다고. 말할 수 없이 두렵다고. 격렬한 슬픔이 덮쳐와 숨도 쉴 수 없다고. 슬픔 속에 슬픔이 있고 슬픔 속에 또 슬픔이 있다고. 슬픔이 밀려들고 또 밀려든다고…….

지금은 이런 생각을 한다.

나는 지금 항해 중이다. 파도 위에 앉아 있다. 균형을 잡으며 파도를 잘 타고 있다. 머뭇거리지 않고 대양으로 나아가고 있다. 기꺼이 모험할 것이다. 이 파도를 타면서…… 이야기를 낚을 것이다. 망망대해에서 이야기를 낚는 어부다. 누구나 망망대해에서 자신의 몸뚱이 하나로 뭔가를 낚으려고 한다. 그게 인생이다.

오리배가 물결을 타며 앞으로 둥둥 나아간다.

수상가옥이 생각난다. 물 위에 지은 집. 지상의 가옥이나 수상가옥이나 마찬가지다. 인간의 존재기반은 거센 물결처럼 늘 위태롭다. 거센 물결 위에서 꿋꿋하게 서야 하는 게 인간의 책무다. 어느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 억센 물결이 솟구치고 파도가 갈라지고 바다의 협곡으로 가옥이 곤두박질치더라도 자신을 믿어야 한다. 자신을 믿는 것 말고는 아무 선택이 없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가 생각난다. 자신을 믿고 희망을 만들어가는 게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이제 더 이상 슬픔에 묻혀 있지 않을 거다.

“너한테도 기회를 주고 싶다. 이거 돌릴 기회. 되게 재밌어.”

용태가 희죽거리며 계속 페달을 돌린다. 관자노리와 목덜미로 땀을 줄줄 흘리며 용태가 나를 바라본다.

“괜찮아. 기회 안 줘도 되는데……. 알았어, 이제 내가 해볼게. 넌 쉬어.”

내가 헤헤거리며 페달을 돌린다. 페달을 힘껏 돌려보는데, 배가 물결에 갇혀 있는 건지, 나아가는지도 모르겠다. 나를 지켜보던 용태가 다시 페달을 힘껏 돌린다.

“힘을 써. 다리에 힘을 딱 주고 돌리라고.”

“알았어. 다리에 힘을 딱 줄게.”

용태가 웃음을 터트린다. 나도 웃음을 터트리며 페달을 돌린다.

엉덩이가 시원하고 뜨뜻하다. 화하다. 박하를 엉덩이에 비빈 것처럼. 할머니의 팬티를 입은 내 엉덩이가. 심장에서 용기가 솟구친다. 엉덩이와 심장이 연결된 것처럼. 이 신박한 느낌. 물결을 헤치며 나아간다. 일 년 내내 파도치는 바다는 없다. 물결 위에 은빛 금빛 날개들이 떠다닌다. 나는 가열하게 컴퓨터의 자판을 두드린다. 나는 이야기를 낚고 있다. 꼬리지느러미가 두 갈래로 갈라진 날쌘 물고기가 허공으로 튀어 오른다. 해변으로 올라와 강인한 여자가 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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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태와 나는 오리배 선착장을 나와서 걷는다. 신록이 시원하게 그늘진 유원지의 오솔길을 걷는다. 나무와 이파리와 구름이 용태와 내 주변에서 살랑거린다.

“너 두드러기 때문에 고생이 너무 많다. 근데 피부과 약은 오래 먹으면 좋지 않은데…….”

“그런 것 같애. 얼굴이 붓기도 하고…….”

“푸른 수염이든 피부병이든 그런 것들에 굴복해서는 안 돼. 그냥 과감하게 약 끊어봐.”

용태가 내 얼굴을 쳐다본다.

“내가 섣불리 말하기는 좀 그런데……. 넌 다른 치료약이 필요한 것 같아.”

나는 용태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는다.

“오리배가 생각보다 되게 즐거운데? 오래 만에 즐겁다. 담에 또 타자.”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나는 그냥 싱긋 웃으면서 용태를 바라본다.

상큼한 바람과 잘 버무려진 맑은 햇살이 용태와 나 사이에서 부풀어 오른다.

“너 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려보면 어때?”

“뭐?”

용태가 걸음을 멈추고 나를 응시하고 있다.

하늘은 파랗게 깨끗하고 구름은 더없이 풍성하고 찬연하게 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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