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급한 프롤로그
"아, 젠장..."
"숨이 안 쉬어져... 어쩌지?"
밤 10시, 자취방을 바로 코 앞에 두고 길바닥에 벌러덩 누워버렸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이 이야기를 쓰는 것을 망설이고 있다. 10년 지기 친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수천번 삼켜왔던 이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들과 나누는 게 조심스러웠다. 아직 제대로 된 '나의 언어'도 없이 서툴게 이야기를 시작했다가 끝내지 못할까 봐 걱정이 되었다. ‘내가 해도 될까? 감히?’ 그렇게 매일 '자격시험'을 치르다가 조심스럽게 노트북 위에 손을 올렸다.
계기는 퇴사였다. 사건은 3년 전 누군가 내 상처의 고름을 터뜨린 것 때문이었고, 문제는 내가 그 고름의 깊이를 봐버렸다는 것이었다.
2020년 가을, 잠시 멈추고 싶어서 퇴사를 했다. 일에, 사람에게, 감정에게 치여 교통사고가 난 지 오래인데 망가진 차로 열심히 달리다가 이제 정말 달릴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멈춰버렸다. 그렇게 출근하기를 멈추고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바닥은 나요. 나는 바닥이요.'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이상하게 평온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치도록 시끄러웠다, 마음이. 천장으로 보며 지난 일을 되씹고 '왜 그랬지?'하고 자책을 하거나, 분노하고, 또 억울해하며 자유를 누리며 행복해도 모자랄 시간을 눈물로 허비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과거의 상처가 나를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상처를 붙잡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질척이'는 나였다. 지난 상처의 진흙탕에 빠져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팅팅 불은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다가 깨달았다. '아, 제대로 나아가기 위해선 지난 상처를 게워내든 소화를 시키든 둘 중 하나는 해야 했다.' 그렇게 일어나 앉아 내가 한 것은 글쓰기였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하는 게 좋을까...' 하고 첫 문장을 고민하다가 내 상처의 고름을 터드린 2018년 길바닥에 눕게 된 그 날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연초만 되면 '기한 엄수', '정확 요함'을 요구하는 서류들이 뜨거운 용암처럼 쏟아 내렸다. 몇 주째 야근을 해도 끝이 나지 않아 며칠째 찝찝한 마음으로 퇴근을 했다. 하지만 그날은 마무리가 보이기 시작해 조금 가벼운 발걸음으로 퇴근을 했다. 달동네에 있는 내 자취방, 평소에도 가쁜 숨과 함께 올랐지만 그날은 마음이 조금 가벼워진 덕분에 훌쩍 걸어 올라갔다. 그때 반갑지 않은 전화가 왔다.
늦은 시간에 내 전화를 울린 사람은 회사 동료였다. ‘웅- 웅- 웅-' 끈질기게 진동이 울렸지만 받지 않았다. 그날 그 동료와 불편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피하고 있는 그 동료는 남의 일에 지나치게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나도 한 오지랖 하는 사람이지만 그의 오지랖은 선을 지킬 줄 몰랐다. 그는 일보다 사적 친분이 먼저라 서로 지켜져야 할 선을 무시하고 넘을 때가 많았다. 그래서 상대가 불편하고 민감해하는 얘기를 눈치 없이 나불거릴 때가 많았고, 사적인 질문과 수위를 넘나드는 농담은 그만의 ‘친분 표시’였다.
그런 그가 불편했다. 하지만 ‘하지 마세요.’라고 말하지도 못했다. 매일 마주하며 같이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어색해질 만한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최대한 내색하지 않고 적당히 지내려 했다. 하지만 그날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날따라 그 동료는 유난히 말이 많았다. 원래도 그랬지만 그날은 특히 나에게 대화를 시도하려고 계속해서 시동을 걸었다. 하지만 나는 '아, 네...'라고 하며 요리조리 피해 다녔다.
그와 얘기를 나누면 소문이 되어 퍼져나가기 쉬웠고, 과장되거나 왜곡되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업무 외에 얘기를 나누는 걸 최대한 피했다. 그날도 잘 피해 다녔다 생각하고 있는데 마지막에 결국 붙잡히고 말았다.
그는 나에게 자신의 퇴근길을 배웅해달라고 했다. 나는 몇 번이나 거절했지만 그는 기어코 나를 자리에서 끌어냈다. 사무실에서 회사 밖으로 나가는 입구까지 고작 5분, 그 짧은 시간도 그는 허투루 보내지 않기 위해 쉬지 않고 얘기를 했다. 배웅해달라 곳까지 와서도 그는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의 말에 지쳐 고개가 뒤로 넘어갈 때쯤 동료가 갑자기 목소리를 줄이고 주변을 살피더니 나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팥팥씨, 여기 입사 지원할 거라 면서요?"
"...... 에?"
넘어가던 고개가 그의 말에 놀라 스프링처럼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앞뒤를 잘라먹고 불쑥 들이민 그의 말에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하지만 무슨 얘기를 하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나는 파견직이었다. 그리고 곧 계약 종료를 앞두고 있었다. 계약기간을 꽉 채워 일을 하면서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이 조직에서 계속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입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당시 조직은 나를 제외하고 모두가 정규직이었다. 그래서 내 근로형태에 대해 모르거나, 이해를 못하거나, 종종 텃세를 부리는 등 오묘한 시선과 말을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누군가 알게 되면 시끄럽게 굴게 뻔해 나름(?) 비밀리 준비했다. 그리고 설령 누군가 알게 되더라도 눈치가 있다면 모른 척할 얘기였다.
하지만 그 동료는 아니었다. 소문 좋아하는 그의 입에서 내 얘기가 나오니 심장이 펄쩍 뛰었다. 놀라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나와 다르게 그는 나의 비밀을 알게 되어 나와 더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더 신이 나서 질주 아니 폭주하기 시작했다.
그는 나의 얘기를 누구와 어떻게 나눴으며, 그것에 대해 자신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하지 않아도 될 훈수와 다른 사람의 소회까지도 상세하게 전했다. 그의 말속에는 부정적 생각과 동정, 연민이 있었고 나는 유난스럽고도 또 딱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나에게 공유하면서 나는 더 비참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도저히 그의 말을 듣고 있을 수 없었다.
"누구한테 들으셨어요?"
나는 정색하며 물었다. 아마 동료는 내가 정색하는 것을 처음 본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달리던 말을 급하게 멈춰 세웠다.
그는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그는 웅얼거리며 내 질문에 제대로 말하지 않았다. 사실 나는 그가 누구한테 말을 들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저때는 말이죠~', '사람들이 뭐라고 했냐면...'하고 소문을 확장시키고 또 그것을 나에게 전한 것에 화가 났던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더 듣고 싶지 않아 그의 입을 다물게 하기 위해 던진 질문이었다. 하지만 싸늘해진 내 표정에 심하게 당황한 그는 제대로 답도 하지 않고 서둘러 자리를 떠나버렸다. 그리고 뒤늦게 몰려온 찝찝함에 그 늦은 저녁에 전화를 한 것이었다.
동료는 해명을 하고 싶어 했다. 나를 위한 해명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해명. 그는 자신의 마음이 편해지기 위해 나에게 ‘괜찮아요.’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속내가 너무 빤히 보여 나는 그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설령 받는다 하더라도 그가 원하는 말을 해주고 싶지 않았다.
"사과도 상대가 받을 준비가 되어있어야 사과지. 일방적으로 욱여넣으면 그게 사과야? 그건 폭력이야."
- 다쳐서 엉엉 울고 있는 나에게 친구가...-
하지만 동료는 포기를 몰랐다. 그는 불도저처럼 계속 전화를 걸었다. 그는 1분 1초라도 해당 문제에서 벗어나 편안해지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전원을 꺼버릴까 하고 고민도 했지만, 매몰차게 굴면 '고의적으로 전화를 끊었다.'며 또 다른 소문을 만들어 낼게 빤했다. 나는 그가 그렇게 여러 명 보내는 걸 자주 목격했었다. 그래서 나는 전화 대신 문자를 보냈다.
[지금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핸드폰이 정해준 일반적인 문구로 거절의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나름 잘 대처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답장이 왔다.
[나는 괜찮으니 늦더라도 통화 좀 해요. 할 말이 있어요.]
‘아아....’ 동료의 답장에 탄식이 나왔다. ‘배려를 가장한 이기심이란….’ 그의 이기적인 문자에 나는 전원을 끄지 않고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는 정말 포기를 몰랐다.
그는 문자로, 전화로 그리고 업무 메신저로, 다시 문자로, 카톡으로, 전화로, 문자로... 정신없이 나를 몰아세웠다. 그건 마치 공포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전화가 미친 듯이 울려대는데 무섭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집요함이 그가 바로 옆에 있는 것 같은 공포를 느끼게 했다. 그 공포가 순식간에 나를 휘감더니 내 안에 검은 풍선을 흔들기 시작했다.
동료가 일으킨 건 고작 실바람이었지만 내 검은 풍선을 흔들기엔 충분했다. 동료의 행동은 과거 나의 나쁜 기억과 많이 닮아 있었다. 그때 그 기억이 서서히 역류해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 겨우, 정말 힘겹게 평범한 일상을 찾아가고 있었기에 이렇게 쉽게 지고 싶지 않았다. 나는 흔들리는 검은 풍선을 다시 부여잡고 눈물을 꾹꾹 누르며 그에게 답장했다.
[그만하세요.]
하지만 동료는 전화 걸기를 멈추지 않았다. 나는 다시 답장을 보냈다.
[제발 그만하세요.]
그래도 동료는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사정을 했다.
[제가 정말 전화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라서 그래요. 제발 그만 연락하세요.]
나는 잘못한 것도 없이 무릎을 꿇고 빌었다. 하지만 내 검은 풍선은 이미 강풍을 만난 것처럼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사정사정해도 멈추지 않는 그의 전화에 나는 이미 꺽꺽거리며 울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전화가 잠잠해졌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동료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다. 장문의 문자였다. 길고 긴 문자에는 구차한 변명이나 사과의 말은 단 한 줄도 담겨 있지 않았다. 대신 ‘친하다 생각해서 조언을 해준 건데... 서운하다.’는 원망이 잔뜩 담겨있었다. 나에 대한 서운함을 길게 나열한 문자 사이사이에는 자신이 더 피해자라는 억울함도 섞여있었다. 그렇게 또 일방적인 말들만 가득한 문자는 이렇게 끝났다.
[나도 잊을 테니, 팥팥씨도 없던 일로 해요. 못 들은 걸로 해요.]
숨이 턱! 하고 막혔다. 검은 풍선은 빵! 하고 터져 버렸다. 마치 화선지에 먹이 번져 나가듯 나쁜 기억들이 내 안에서 빠르게 번져나갔고 그 기억들은 완전히 소환되었다. 그때부터였다. 그날부터 나는 보이지 않았던 것을 보이고, 희미하게 느껴졌던 것들이 선명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심장은 카페인을 들이부은 것처럼 빠르게 뛰었고, 숨은 어떻게 쉬어야 하는지 잃어버린 것처럼 헐떡거렸다. 아직 추위가 끝나지 않은 3월, 그렇게 나는 차가운 길바닥에 산송장처럼 누워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