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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쑥채 Jan 29. 2021

경로를 이탈하여 재탐색합니다

아직도 1일 차

   13km를 걸어 드디어 바다에 도착했다. '헉!' 소리가 날만큼 반갑고 괜히 가슴이 벅차올라 맥주를 마시듯 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그러니 복잡하고 다급했던 마음이 가라앉으면서 한결 차분해졌다. 그제야 처음부터 다시 생각을 할 필요를 느꼈다.



# 경로를 이탈하여 재재재 탐색합니다.


나는 왜 여기에 왔지?

병원에 가기 싫어서 무심코…


왜 병원에 가기 싫었던 걸까?

선생님이 가라고 해서 갔던 거지. 그래 맞아, 사실 나는 가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어.


왜 가고 싶지 않았던 건데?

... 의심하는 건 아닌데 ‘가서 치료를 받으면 과연 나아질까? 진단을 받고 어떤 병인지 알면 좀 나아질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너무 오래된 상처여서 잘 떨어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거든. 또... 그 과정이 너무너무 아플 거 같아.


왜 아플 거 같다고 생각한 거야?

머릿속에 죄다 안 좋은 기억뿐인데 그걸 반강제적으로 끄집어내야 하잖아. 생각만 해도 끔찍했어. 나는 아직 그럴 용기도 힘도 없어. 지금 나는 내 상처에 대해서 말하고 싶지 않아. 그럴 힘도 없고... 그래 맞아, 나는 아직 내 상처를 마주할 용기가 없어.


   3년 전 당시 자문자답하며 끈질기게 알게 된 결론이었다. 당시 나는 ‘이게 제 상처예요.’라고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또 말조차 하기 힘든, 인생에서 최고의 겁쟁이가 되어 있는 상태라는 걸 깨달았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치료’보다 앞서 나의 흉한 상처를 마주할 용기가 필요했다.

   매일 ‘아프다~ 아프다~’하면서 병원에 가지 않는 엄마가 답답하고 짜증이 났었다. 엄마는 ‘진짜 큰 병일까 봐 겁이 나서 못 가겠어. 차라리 모르고 사는 게 나아.’라고 말했다. 당시 답답함에 잔소리를 퍼부었지만 지금은 엄마가 조금 이해가 되었다.

   혼자 끙끙 앓는 것보다 전문가에게 보여주는 것이 분명 백배 천배 나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을 몰아세우면서 병원에 가는 것은 싫은 것을 꾸역꾸역 참아 트라우마가 되어버린 것들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변명 같아 보이지만 얼마나 싫었으면 이렇게 엉뚱한 곳까지 와버렸을까... 그렇게 나는 의도치 않은 이탈을 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뭐, 그래도 괜찮다. 많이 돌아왔지만 괜찮다. 경로는 언제든 재탐색하면 되니까.

   얼마나 깊이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건지 해가 지고 있는 것도 몰랐다. 시간을 보니 벌써 저녁 6시를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데이터가 부족하다는 문자를 무시하고 허둥지둥 지도 앱을 켰다. 이런, 예약한 숙소까지 걸어온 것만큼 가야 했다.



# 불안은 ‘나’를 먹는다.


   주변은 이미 어두운데 편의점 같은 건물도 적어 의지할 수 있는 빛도 적었다. 어둑어둑해지니 불안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낯선 장소, 어두운 거리, 처음 가보는 길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불안한데 어두워지면 ‘그림자’가 나타나서 나를 다 불안하게 했다. 잘못하면 집 앞도 아닌 낯선 길 위에 드러눕게 생겼다.

   나는 뛰듯 걸었다. 발이 아프고 가방끈이 어깨를 파고드는 것처럼 아픈데 불안한 마음이 더 우세해 걷는 속도를 줄일 수 없었다. 그렇게 빨리 걸으니 불안해서 심장이 뛰는 건지, 숨이 차서 심장이 뛰는 건지 헷갈려서 조금 도움이 됐다. 하지만 내가 어디쯤 와 있는지 알 수가 없어 다기 지도 앱을 켰다. 길을 찾느라 지도를 한참 들여다보는데 데이터를 완전히 소진했다는 알림이 떴다. 그리고 곧이어 ‘띠링-띠링-‘하고 또 다른 알림음이 들렸다.


[배터리 5%]


   이런, 이젠 배터리가 말썽이었다. 이쯤 되니 될 일도 안 되는 것 같고, 나는 그른 거 같고, 멍청하고, 한심하고.... 온갖 부정적 생각으로 마음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세탁소에서 충전할 기회가 있었는데 왜 안 했을까?’

‘생각도 없이 먼 곳에 숙소는 왜 잡았지?’

‘그동안 데이터는 왜 무식하게 써서… 음악을 듣지 말걸. 돈이 없으면 아끼고나 살지...’

‘왜 꼼꼼하게 지도를 살피지 않았을까. 봐, 길을 엄청 돌아와서 이 지경이 됐잖아!’

‘.... 걸으면서 생각했어도 됐잖아! 왜 몇 시간씩 진을 치고 않아 있었던 거야. 이 멍청아.’


   나를 다독이고 용기를 얻어가자고 다짐한 지 몇 분 만에 내 안에서 자책 파티가 벌어졌다. 이만큼 걸어온 것도, 생각을 정리한 것도 며칠은 으스대고 스스로를 칭찬해도 모자란데 또 스스로 상처 주고 있었다. 이렇게 불안은 쉽게 나를 잡아먹었다.

불안아 불안아 나오는게 어쩔 수 없다면 갑자기만 튀어나오지는 말아다오... 그렇게 주문을 외웠다.

   주변은 완전히 어두워지고, 잠깐 사이에 배터리가 2% 더 줄었다. 도로 위에는 작은 오토바이조차 지나가지 않았다. 그렇게 피했던 버스나 택시가 간절하기까지 했다. 만능이던 핸드폰은 이미 고물 같고, 의지할 빛도 타고 갈 차도 도움을 청할 사람도 없는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잠시 생각했다. 하지만 깊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할 수 있는 건 오직 계속 걷기뿐이었다. 그것 말고는 지금 할 수 있는데 없었다. 나는 지도 앱에서 숙소까지의 거리와 걸리는 시간, 방향만 확인하고 과감하게 핸드폰 전원을 완전히 꺼버렸다.

   그렇게 걷기를 몇 시간, 지칠 대로 지쳐 이제는 발을 질질 끌며 걷고 있는데 나한테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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