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차
나는 ‘운전기사 아저씨’를 싫어한다. 치가 떨 정도로 싫어한다. 생각만 해도 미간이 찌푸려지고, 몸이 파르르 떨릴 정도이다. 물론 '운전기사 아저씨'들 중 좋은 분들이 더 많지만, 나에겐 안 좋은 기억들뿐이다. 그래서 운전기사가 보이는 택시나 버스는 잘 타지 않거 걷거나 지하철을 주로 이용한다.
중년, 남성, 운전기사 이 세 가지와 나는 무슨 악연인지 크고 작은 사건이 많았는데, 그중 두 번의 사건은 나에게 ‘아물지 않는 상처’를 주었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수학학원을 다녔다. 학원이 끝나면 학원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는데 버스를 탈 때 큰소리로 기사 아저씨에게 목적지를 말해야 했다.
“아저씨!!! ㅇㅇ아파트요오-!!!”
15인승 크지도 작지도 않은 버스에 쉼 없이 떠드는 초등학생들로 가득 차면 목소리가 쉽게 묻혀 거의 비명 수준으로 소리 질러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기사 아저씨가 듣지 못하고 집을 지나쳐 혼이 났다.
하지만 나는 소심하고 부끄러움이 많은 아이였다. 그래서 큰소리로 말하는 걸 하지 못했다. 또 다른 친구들보다 더 큰 목소리로 외칠 자신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수업이 끝나면 바로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가 운전석 바로 옆자리를 사수했다. 그리고 아저씨에게 작게 말했다.
“...ㅁㅁ마트 앞이요.”
자연스럽게 앞자리는 내 지정석이 되었다. 기사 아저씨도 옆자리를 내 자리로 비워두셨다. 다른 친구가 타면 뒤로 가라고 하고 나에게 옆자리를 내어주셨다. 아저씨의 배려가 고마웠다, 처음엔.
기사 아저씨는 키가 크고 까무잡잡한 외모에 50대 후반쯤 돼보였다. 학원버스 기사로 얼마나 일 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운전은 베테랑이었다. 그 큰 차를 마치 제 몸인 것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이고, 어떤 길도 능숙하게 빠져나갔다. 아저씨는 종종 한 손으로 운전하는 기술도 선보였는데, 한 손으로 핸들을 잡으면 다른 한 손은 내 어깨를 감쌌다. 그리고 내릴 땐 착하다며 꽉 안아주셨다. 칭찬을 하는 이유도 모르겠지만 그보다도 아저씨의 칭찬이 싫었다.
아저씨의 손은 내 어깨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그 손은 어깨에서 등으로 그리고 원을 그리듯 쓰다듬다가 허리까지 내려왔고 나중엔 엉덩이까지 도달했다. 초등학교 4학년, 142cm에 또래보다 작았던 내 몸을 아저씨는 손과 손가락으로 여러 번 훑어 만졌다. 그때의 기분은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나는 몸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싫었지만 아무 말하지 못했다. 아저씨는 나보다 훨씬 크고, 또 어른이라 ‘싫다.’고 말하면 혼날 것 같았다. 게다가 당시엔 '나를 예뻐하시는 건데 싫다고 말하면 안 되겠지?'하고 생각을 했다. 그때 나는 겨우 11살이었다.
기사 아저씨의 손짓은 날이 갈수록 과감해져 이제는 목적지를 말하는 것보다 앞좌석에 타는데 더 큰 용기가 필요해졌다. 하지만 나는 어떤 쪽에도 용기가 나지 않아 학원 버스를 타지 않고 작은 샛길을 통해 집으로 가기 시작했다. 이름 모를 사람들의 무덤이 길 양옆에 즐비해 있는 으스스한 길이었지만 학원 버스를 타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당연하겠지만 걸어서 가니 평소보다 늦게 집에 도착했다. 어느 날 걸어서 집에 도착해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아버지가 재떨이를 던졌다. 아버지는 눈이 새빨개져선 다짜고짜 소리를 질렀다. 자신보다 집에 늦게 들어왔다는 게 이유였다. 아버지는 큰 소리로 맥락도 없고 납득도 가지 않는 분노를 뱉어내기만 하셨고 내가 늦은 이유에 대해선 묻지도 궁금해하지도 않으셨다.
다행히 엄마는 아빠와 달랐다. 엄마는 뒤늦게 내 얘기를 들으시고 바로 학원 원장을 찾아가 이 일을 알렸다. 그리고 그때 그 기사 아저씨에 대한 민원이 내가 처음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하지만 아저씨는 해고되지 않다. 원장 선생님은 같은 학원에 있는 다른 버스를 운전하는 것으로 이 일을 마무리지었다. 원장 선생님이 왜 그 기사 아저씨를 해고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지만, 덕분에 나는 그 아저씨가 운전하는 버스를 일주일 더 타야 했다. 그리고 일주일 동안 범죄자 취급을 당해 억울해 죽겠다고 손자뻘 되는 아이들에게 하소연하는 아저씨의 말을 들어야 했다. 아저씨의 하소연에 나는 마치 밀고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은 겪어야 했다. 정말 끔찍했다. 차를 타고 집에 가는 20분이 지옥 같았지만 걸어서 집에 가는 것도 불가능했다. 아버지가 언제 또 재떨이를 던질지 모르니...
가해자는 배려와 애정이었다며 억울함을 호소한다. 운전기사 아저씨도 그랬고, 동료도 그랬다. 하지만 분명하게 말하지 못한 사람이 잘못이라고 한다. 그 와중에 피해자는 자신을 더 질책하며 스스로를 더 아프게 한다. ‘그래… 제대로 말하지 못한 내 잘못이지…’ 하고.
버스가 떠난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데 비가 부산스럽게 내려 신발과 바지가 쫄딱 젖었다. 여름 날씨였지만 옷이 젖으니 오슬오슬 떨렸다. 나는 ‘걸으면 추위를 조금 덜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넋 놓고 걷기 시작한 지 3시간, 발가락 사이가 아프기 시작했다. 몸에 힘도 거의 없었다. 그날 뱃속엔 비행기에서 마신 오렌지 주스밖에 없었는데, 그 오렌지 주스 기운도 다 떨어져 가고 있었다. 그때 어떤 마을 입구에 도착했다.
고개를 들어 좌우를 살펴보니 온통 아파트들 뿐이었다. 관광객이 오는 곳이 아닌 제주도민이 사는 평범한 동네 같았다. 나는 우선 편의점을 찾아 들어가 큰 초콜릿 덩어리가 박힌 쿠키 2개를 샀다. 그리고 허겁지겁 입에 쑤셔 넣고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도 없었는데 서둘렀던 이유는 발가락이 짓무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탁소를 찾고 있었다. 일반 세탁소가 아니라 건조기만 사용할 수 있는 셀프 세탁소여야 했다. 십여분쯤 찾아 헤매니 내가 찾던 세탁소를 찾을 수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뛰어 들어가 바로 의자에 앉아 신발부터 벗었다. 팅팅 불은 발을 신발로부터 탈출시키니 ‘아휴... 살겠다.’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나는 맨발로 건조기 앞에 걸어가 신발을 던져 넣었다. 그리고 버튼을 누르려는데 건조기 위에 손으로 쓴 문구가 보였다.
[신발을 넣고 돌리지 마세요. 제발.]
앗... '제발' 마지막 두 글자가 간절하면서도 강하게 경고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에게도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게에 아주 잠깐 망설이고 버튼을 눌었다. ‘덜커덩’ 소리를 내며 건조기가 돌아가고 그 안에서 운동화가 요란하게 춤을 췄다. 나는 그 사이 양말도 바꿔 신고, 가방과 옷을 재정비했다.
그렇게 한숨을 돌리고 나니 뒤늦게 숙소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적지 없이 무식하게 앞으로 걷기만 해서 내가 어디쯤 와 있는지도 몰랐다. 나는 GPS를 켜고 지도 앱에서 내가 어디쯤 와있는지 확인했다. 나는 공항에서 제주섬의 왼쪽으로 걷고 있었다. 이호테우 해변을 지나 연대포구…. 이도동 그리고 ‘하귀’라는 곳에 내 빨간 점이 서 있었다. 나는 애월읍의 하귀리에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서있는 빨간 점에서 저~ 왼쪽 어딘가에 있는 게스트 하우스에 예약을 했다. ‘걷다 보면 이쯤 도달하겠지.’하는 생각으로 예약을 했다. 제주도가 큰 섬이라는 것을 간과한 채...
그사이 건조기가 다 돌아가고 신발도 충분히 보송해졌다. 비도 그쳐 공기도 적당히 개운했고, 잠깐의 휴식 덕분인지 몸도 가방도 가볍게 느껴졌다. 나는 몇 시간이고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조금 나아진 기분으로 예약한 숙소 방향으로 걷기 위해 지도 앱을 켰는데 문자가 왔다.
[데이터 80% 소진, 1360MB 남았습니다.]
‘아, 사람이 숨 쉬고 사는데 별걸 다 채워줘야 하는구나.’ 하나를 해결하고 나니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좋았던 기분도 잠시 다시 한숨이 나왔다. 좋은 것을 채우는 만큼 아픔이 빠져나가면 얼마나 좋겠냐만, 아픔은 기름때 같아서 씻어도 쉽게 빠져나가지 않았다. 빠져나가는 건 데이터와 통장잔고뿐. 평소였다면 자책과 신세를 한탄하며 비관적 생각으로 가득 채웠을 텐데 몸이 피곤해서 그런지 쉽게 마음을 내려놓았다. 나는 핸드폰을 끄고 무작정 바닷가가 보이는 방향으로 걷기로 했다. ‘제주도는 섬이고 동그랗게 생겼으니 해안을 따라 걸으면 되겠지.’하고 생각했다. 무식한 생각이었지만 몸이 피곤해지니 생각이 단순해졌다.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니 새까만 화강암으로 만든 담장과 그 너머에 귤밭이 보였다. 귤밭에 약을 치는 할머니와 눈이 마주쳐 눈인사도 하고, 지나가는 길고양이와 잠깐 눈싸움도 했다. 저금 흥얼거리기도 했다. 그렇게 지평선이 수평선이 될 때까지 걸어 바다에 도착했다.
바다를 보니 마음이 차분해져 생각할 여유가 생기는 것 같았다. 털썩 자갈밭에 앉아 생각을 시작했다.
"나... 어쩌다 여기까지 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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