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없어요.”에 감춰진 진실

by 킴프로


“자기가 좋아하는 관심사에 대한 책편식이 좀 심한 편인데 저는 다양한 책을 읽었으면 하거든요.”


당시 3학년이었던 진오(가명)의 어머니께서 수업 요청서를 보내셨다. 몇 차례 대화가 오고 간 끝에 나는 이렇게 덧붙였다.


“아이가 다양한 책을 읽기를 원하시면 독서논술 학원을 권합니다. 제 수업을 듣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만 감히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좋아하는 주제가 있다면 더 많이 읽게 해 주세요.”


무슨 자신감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일주일에 한두 권 지정 도서를 읽고, 질문과 토론을 통해 사고력을 확장한 뒤 글쓰기로 이어지는 수업을 하는 학원은 주변에 얼마든지 널려있다. 그리고 그곳의 커리큘럼이 내 것보다 더 체계적일 가능성이 높다. “내 수업은 학원과는 차별화되어 있어.”라는 확신보다 오히려 부모님께서 지금 원하는 그 기대치에 딱 맞는 학원 대신 굳이 나를 선택해야 할 이유가 없어 보였다.


당시의 나는 만약 학생에게 좋아하는 주제가 있다면 그 주제를 더 파고들어야 한다고 강하게 믿고 있었다(물론 지금도 그렇다). 하나의 주제를 깊이 파고든 경험은 다양한 분야를 얕게 건드려 보는 것과는 비교하기 어려운 학습의 깊이를 만든다. 또한 한 가지 분야에 대한 깊은 이해는 발표나 글쓰기와 같은 수행평가에서 역량을 발휘하는 데 직접적으로 도움이 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 새로운 관심사가 생겼을 때 그 역시 밀도 있게 탐구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글에서 진심으로 교육의 본질을 추구하시는 선생님이라는 걸 느꼈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진오의 어머니는 바로 나와의 수업 일정을 잡으셨고, 그렇게 약 1년간 함께 공부했다. 진오는 내 수업에서만 약 70여 권의 책을 읽었고(평소에 혼자 읽은 책은 포함하지 않았다.), 이제 문학과 비문학을 가리지 않고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진오가 읽은 70여 권의 책 중 “재미없다”, “읽기 싫다”라고 한 책은 몇 권 되지 않았다. 그것도 다 읽고 나서 “재미없었어요.”라고 했고, 재미없으니 읽지 않겠다고 포기한 책은 약 세 권 정도(지금 생각해 보면 그 책을 추천한 내 잘못이 크다) 뿐이었다.





*여기서 잠깐, 진오에 대하여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진오는 조선의 왕과 공룡 딱 두 가지 분야에만 관심이 있었다. 공룡에 대해서는 시기, 서식지, 분류, 종, 특성, 크기 등을 도감 한 권 통째로 머릿속에 넣은 듯 암기하고 있었고, 조선 역사에 대한 지식은 보통의 성인 수준을 넘어선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진오는 스마트 폰이 없으며, 평일에는 TV를 포함한 영상시청을 하지 않는다. 다만 주말 하루 영상 Day가 있는데 가족 구성원이 각자 보고 싶은 영상을 하나씩 골라 3-4 시간 정도 함께 시청한다. 이것을 언급하는 것은 진오에게 책 읽는 것 자체가 쉬는 시간을 보내는 방법 중 하나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다시 돌아와서)


수업을 7-8회 차 진행했을 무렵 진오는 이미 “코드네임 X”를 읽고 있었다. 어머니가 걱정하셨던 “책편식”이 생각보다 빨리 해결된 것이다. 당시에 나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 밝혀내기 위해 지난 수업 과정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진오가 왜 공룡과 조선왕만을 좋아하는지, 탐구를 시작한 것이다.






진오에게는 “책 편식”이라고 단순히 말하기에는 조금 독특한 모습이 있었다.


먼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말하는 데 매우 적극적이라는 점이었다. 그러나 접해본 적 없는 분야에 대해서 수업할 때에는 ‘몰라요’로 일관하는 것은 물론, 짜증을 심하게 내고 때로는 폭력적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공룡이나 조선과 관련된 내용을 다룰 때면,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쏟아냈다. 그리고 그 정보들은 대부분 내 질문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다.


진오는 수업 중에 진행하는 활동이나 질문의 요점을 정확히 짚지 못하고 있었다. 워크시트에 “공룡”이나 “조선의 왕”이 눈에 들어오면 그저 공룡의 이름이나 왕 또는 주변 인물의 이름을 나열하는 데는 아주 능숙했다. 하지만 정보 사이의 독특한 관계나 의미를 연결하는 사고 활동은 매우 힘들어했다.


진오와의 수업이 진행될수록 지식 정보, 즉 본인이 잘 알고 있는 것을 정신없이 나열하고 자랑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인상이 점차 강해졌다. 진오에게 공룡과 조선은 탐구의 대상이라기보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반복할 수 있는 안전한 영역에 가까웠던 것이다.


그렇다. 진오에게 ‘좋아한다’는 것은 그것이 익숙하고 예측 가능하며, 실수할 가능성이 낮아 자신에게 똑똑하다는 느낌을 주는 대상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진오는 앞서 내가 어머니에게 피력했던 내 교육관의 적용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 말해 내 수업이 진오로 하여금 공룡과 조선의 역사를 더 좋아하도록 만들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오히려 다른 주제의 책을 접할 기회를 열어 주는 것이 다시 이 수업의 목표가 된 것이다.






한편 그 무렵 난 엘레나 페란테의 나폴리 4부작을 읽고 있었다. 무려 2,400페이지에 등장인물만 약 60명에 육박하는 대작이다.


나는 소설책을 오래 싫어했다. 평소 내가 즐겨 읽던 책은 주로 비문학(특히 과학 분야)이나 에세이 정도였다. 사실 나는 소설은 사실이 아닌 것, 그리고 과학은 사실인 것으로 크게 착각하고 살고 있었다.


그런 나를 소설로 이끈 것은 바로 “노벨 문학상”이었다. 우리나라에서 무려 노벨 문학상이 나오다니, 게다가 내 모국어로 읽을 수 있다는 것은 거의 행운에 가까운 일이었다. 나는 이 작품들을 읽지 않으면 안 된다는 한국인으로서의 어떤 책임과 의무감까지 느꼈다. 수상 발표가 끝난 그 즉시 한강 작가의 전작을 한번에 구입했으며, 나는 배송이 오는 족족 읽어 나가기 시작했고, 마치는 대로 감상을 기록했다.


그렇게 온전히 소설 읽기와 리뷰를 쓰는 데 꼬박 2개월을 보냈고, 마침내 나는 소설에 대한 내 오래된 편견을 깰 수 있게 되었다. 더 이상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니 이제는 1950년대 나폴리 배경의 약 60년에 걸친 대서사시도 거뜬히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어떻게 된 일일까?






이전의 나는 소설을 읽어낼 수 있는 수준이 안 되었던 상태였다. 하지만 단기간에 한강 작가의 작품 16권을 몰입해서 읽고, 9편의 리뷰를 쓴 경험이 나폴리 4부작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문해력을 키워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소설책을 읽을 수 있게 되면서 마침내 진오의 상태도 함께 이해하게 되었다.


의외로 진오는 내가 제공(공룡/조선 80:이야기책 20의 비율로 조절하던 당시)하는 이야기책을 크게 거부하지 않고 조금씩 읽기 시작하고 있었다. 즉 공룡과 역사 이외의 분야를 완강하게 거부하는 아이는 아니라는 뜻이었다. 문제의 핵심은 흥미의 부재가 아니라, 낯선 텍스트를 읽어낼 힘의 부족에 있었다. 진오 역시 과거의 나처럼 다른 분야를 소화할 만큼의 문해력이 아직 충분히 형성되지 않은 상태였던 것이다. 그림책만 겨우 읽던 진오에게 엄마가 내민 생소한 내용의 글이 많은 이야기책은 그저 낯설고 어려웠다. 그러나 그 진실은 “책 편식”이라는 프레임에 가려져 있었고, 결국 진오는 더 익숙한 공룡 도감과 조선왕조실록에 강하게 애착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공룡과 역사에 대해 더 읽혀야 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나의 숨은 갈등은 해소되었고, 그동안 진오에게 적용하고 있던 방식에 마침내 확신이 들었다. 즉 문해력을 천천히 끌어올리고, 거부감이 생기지 않도록 주제를 점진적으로 확장하는 교육 방식을 더 본격적으로 진행했다. 다만 나의 문해력을 키워준 “한국어로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의 작품 읽기”와 같은 동기는 진오에게 있을 리 만무하니 그것은 아동 문학 자체의 재미와 나와의 신뢰 그리고 약간의 보상으로 채워나갔다.






진오의 사례를 통해 스스로 알게 된 나의 역할은 아이가 특정 주제를 ‘탐구의 대상으로 좋아하는지’, 아니면 ‘익숙해서 안전하다고 느끼는 대상으로 여기는지’를 우선적으로 구별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집안 사정을 속속들이 꺼내기도 하지만 때로는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는 솔직하지 못하다. “재미없다”, “하기 싫다”에 숨겨진 말은 사실 “어렵다”, “낯설다”로 해석해야 할 때가 종종 있다는 것이다. 특히 진오와 같이 낯선 것에 두려움이 크고 익숙한 정보에 강하게 의존하는 성향의 아이라면 더욱 그렇다.


최근의 일이었다. 학기가 바뀌어 수업에도 새로움을 불어넣어 보고자 본 수업에 앞서 짧은 뉴스를 한 페이지씩 읽게 했다. 이슈가 되고 있는 주제를 초등학생의 눈높이에 맞추어 신문 형식으로 재구성하여 한창 인기가 좋은 도서다. 스마트폰이 없는 진오를 고려해 너무 생소한 주제는 제외하고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적당한 주제를 골라 복사를 했다.


그 첫 시간, 이걸 왜 갑자기 읽어야 하냐며 읽지 않겠다고 온갖 핑계를 다대며 30분을 실랑이했다. 차라리 국어 문제집을 매번 풀겠다며 있는 대로 성질을 부리며 종이를 던지기까지 했다. 그렇게 두 번이 지났다. 그리고 그 뉴스를 내민 지 3회 차가 되던 날, 원하는 대로 다섯 문제가 딸린 국어 독해 문제지와 뉴스 한 페이지를 책상에 올려두었다. 원하는 것을 고르라고 했다. 뉴스를 집어 들더니 어떠한 불평도 하지 않고 쭉쭉 읽어나간다. 모르는 어휘는 국어사전에서 찾게 했다.


진오는 그 종이가 무슨 내용을 담고 있든 그저 처음 본 종이이니 일단 어려울 것이라고 가정하고 거부부터 하고 본 것이다.

결국, 또 기다림이 답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은 흥미를 느끼기 쉽지 않다. 아이가 특정 주제를 과하게 고집하고 있다면,

그것이 정말 좋아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인지,

다른 주제를 어려워해서인지,

낯선 것에 대한 경계심이 큰 성향 때문인지,

혹은 제 수준에 맞는 방식으로 경험해 본 적이 없어서인지를 살펴봐야 한다.


다양한 분야를 좋아할 수 있다는 것과 한 가지를 깊이 아는 것은 사실 나란한 위계에 둘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읽고 깊이 이해하며, 그에 대한 의견을 글로 표현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높은 인지 능력을 요구하고 있었다. 층위가 다른 다양한 정보를 처리한다는 것은 어휘, 요구되는 배경지식, 문장의 추론, 그리고 사고방식까지 다르게 작동시킬 수 있음을 의미한다. 즉 인지적으로 유연해야 가능한 일이다. 스스로 만들어 놓은 익숙하고 편안한 인지적 안전지대에서 벗어나 한 발짝 내딛기 위해서는 문해력을 탄탄히 갖추고, 자기만의 속도로 다양한 주제를 접해야 한다.






그렇게 진오는 1년에 걸쳐 닭의 조상과 서서히 이별했고, 조선에 대한 진오의 사랑은 영국이 넘겨받게 되었다. 그렇다고 내가 그들의 사이를 억지로 갈라놓은 것은 아니라고 변명하고 싶다. 지난해 국립중앙과학관에서 열린 공룡덕후박람회 행사 중 하나였던 제1대 공통령 선거의 후보자료집을 적극 활용했고, 조선장단꾼의 “태정태세문단세” 조선팝 뮤직비디오를 함께 감상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진오가 그린 수십 장의 마인드맵 중 50%는 조선의 왕들이 차지했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바이다.







에필로그


지난 1년간 진오가 읽은 책 중 가장 좋아하는 책은 단연코 “건방이의 건방진 수련기”. 친구에게 건방이 시리즈를 추천하고, 또 그 친구는 진오에게 그리스 로마 신화를 추천해 줘서 다 읽었다며 내게 재재거린다. 아마 그 순간이 진오와 수업하면서 가장 뿌듯했던 때였던 것 같다.


어느 날 진오에게 물었다.


“진오야 이렇게 이야기 책 잘 읽으면서 왜 선생님 만나기 전에는 싫어했어?”


“이런 책이 있는 줄 몰랐어요. 이 수업하고 이런 책(글씨 많고 두꺼운 이야기책) 처음 읽은 거예요.”


녀석 또 거짓말이다. 이제 솔직할 때도 되지 않았나 싶다.


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