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와 피해자(1)

가해자에 대한 이야기

by 킴프로


1

“선생님! 오늘이 마지막 시간이에요?”


“아니? 엄마가 좀 더 하신다고 연락하셨던데?”


“아싸~!!!”


몇 개월 전, 4학년 진오(가명)가 곧 뉴욕으로 떠나 약 10개월 후에 다시 돌아올 예정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진오가 수업 중 ‘저 미국에 갈 수도 있대요.’하는 말을 종종 했었기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은 아니었다.


진오의 어머니께서는 내년에 한국으로 돌아오면 아이들을 다시 맡아달라고 부탁하셨지만 사람일 한 치 앞도 모를 일, 나는 잠정적으로 아이들과의 ‘마지막’을 마음 한 구석에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며칠 전 예정된 ‘마지막’ 수업을 앞두고 어머니께서 연락을 하셨다.


“선생님, 아이들이 국어 수업을 더 하고 싶어 하는데, 2주 더 수업이 가능하실까요?”


아이들이 긴 여행을 앞두고 집에서 너무 놀게만 두게 하지 않으시려고 수업을 연장하시는 건가 했다. 그런데 맙소사 정말 진오가 나와 수업을 더 하고 싶어 했던 것이다.


‘아싸’라니.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나는 아이들이 이 날이 마지막이든지 말든지 신경도 쓰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었다. 처음엔 잘 다녀오라는 편지와 작은 선물을 준비할까도 싶었지만, 나도 유별나게 굴고 싶지 않아 평소처럼 똑같이 수업을 하고 조심히 다녀오라는 인사정도만 하고 돌아설 참이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마지막’을 염두에 두었다는 것도 의외의 일이었지만, 수업을 더 하고 싶다는 마음이 참 고마웠다.


차마 진오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워크시트를 넘기며 말했다.


“이제 수업 안 해서 좋다고 할 줄 알았더니, 공부 더 하고 싶다고 말해줘서 고마워~”


그런데 진오야 너 나랑 수업하기 싫다고 침대 밑에 들어갔던 애 맞지? 나랑 수업하기 싫다고 울었던 애 맞지?




2

진오는 앞서 발행한 글 “아들이 없어서 행복해요(1), (2)”의 주인공이다. 사실 그 글에서는 밝히지 않았던 사실이 하나 있다.


진오는 ‘학교 폭력’에 연루되었던 적이 있다.


진오가 가해자였고, 그 일은 나와 만나기 바로 직전에 있었던 일이며, 결론적으로는 그 일이 잘 해결된 이후였다.


아니 나 같은 초짜 선생님에게 이런 일이. 나는 심리 상담 선생님이 아닌 읽기 선생님인데도 불구하고 어머니가 첫 상담 시 이 부분을 언급하신 이유가 있었을 텐데, 나는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내가 아이의 엄마라면 숨겼을 것 같다.


나는 갑자기 그런 배짱이 생겼는지는 모르겠다. 그 ‘사건’ 하나만으로 내가 수업을 포기할 이유가 없었다. 학생에게 일어났던 과거의 어떤 ‘사건’이 선생님이 학생을 겪어보기도 전에 ‘읽기 수업’을 거절할 이유가 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1년 3개월째 매주 두 번씩 만나서 공부하고 있다.




3

나는 수업을 시작하자마자 진오의 ‘존댓말’‘통제력’을 발견하고 매우 놀랐다. 아마도 그 이유는 나도 모르는 새 진오가 예의 바르지 않고, 감정적으로 충동적일 것이라고 단정 지었었기 때문 아니었을까. 그러나 내가 진오에게 읽기 수업을 ‘허락’(본 계약을 다음과 같이 체결한다. 참고) 맡은 이후로 지금까지 진오는 ‘선’을 넘은 적이 없다.


진오는 내 얼굴을 마주치기만 하면 쉴 새 없이 조잘거린다. 게임, 유튜브에서 본 재밌는 영상, 학교에서 선생님께 들었던 이야기, 친구들이랑 있었던 일 등 매시간 그렇게 할 이야기가 많다. 그렇게 말을 하다 보면 문장과 문장사이에 쉬는 지점이 생기거나 숨 가쁘게 말을 잇다가 ‘-요’가 빠지는 상황이 생기는데, 진오는 곧바로 “반말한 거 아니에요.”라고 정정을 한다. 실제로 그것이 반말이 아니라 잠깐의 ‘멈춤’인데도 절대 반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만난 진오 또래의 아이들은 조금 친해졌다 싶으면 은근슬쩍 말을 짧게 하거나 끝 마무리를 짓지 않기 시작한다. 심할 때는 자신의 엄마 대하듯 날 대하는 경우도 있다(이건 내 태도의 문제인가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나는 아이들이 반말을 하는 그 상황을 따져보고, 현재 상황과 상대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반말’이라는 예의 없는 태도로 표현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일일이 지적하지 않는다. 그런데 진오는 그 어떤 경우에서라도 내게 존대를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나를 놀라게 했던 다른 하나는 통제력이다. 항상 스마트 폰을 곁에 두고 있는 진오 머릿속의 80%는 로블록스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게임 종류와 캐릭터는 왜 그렇게 많고 스킨은 또 얼마나 다양한지 들어도 들어도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을 진오는 내게 소개하기 바쁘다. 새로운 스킨이라도 구매하면 공부방에 들어오자마자 배경 음악이나 스킬들을 보여주고 싶어 난리고, 때로는 수업 직전까지 게임을 하다가 도중에 수업 시간이 시작이 돼 버려 게임을 중간에 끊고 싶지 않은 경우가 발생하고야 만다.


나는 진오가 하던 것을 마저하게 둔다. 만약 길어지겠다 싶으면 “한 판 끝나려면 몇 분 정도 걸릴 것 같아?”라고 묻고, 진오가 스스로 약속한 시간이 될 때까지 기다린다. 그렇게 하면 진오는 스스로 게임을 종료한다.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약속한 시간 보다 한 판이 일찍 끝나면 게임 시간이 남았다고 따지지도 않는다(다른 남자 아이들은 1분 1초까지 따지고 든다. 아들이 없어서 정말 행복하다.).


진오는 나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내게 이 말을 한 적이 없다. 하지만 또래의 다른 아이들의 입에 항상 붙어 있는 말. 한번씩 내 스마트폰을 빌려준 것을 아주 후회하게 만드는 말. 그리고 반드시 아이들의 짜증이 뒤쫓아 오는 그 말.


“아~!!! 조금만 더 할게요!”




4

당연히 그렇게 했어야 하지만 이쯤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다. 내가 진오를 만나면서 원칙으로 삼은 것 중 하나가 나와 만나기도 전에 있었던 “학교 폭력”이라는 사건을 내 옆에 앉아있는 이 아이와 연결 짓지 않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처 알아차릴 새도 없이 내 머릿속을 점령하고 있었던 “무례함”“충동성” ‘사건’과 완전히 무관했음이 증명되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내게 보여준 진오의 일관된 태도로 말이다.


물론 나는 어떤 경우에도 ‘폭력’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나는 아이들에게서 물건을 던지는 것, 위험한 물건을 들고 고집을 부리는 것, 주먹으로 책상과 벽을 치는 행동 등을 종종 목격한다. 그리고 그 즉시 훈육하고, 부모에게도 반드시 알린다. 나는 반말하는 것은 봐주는 선생님일지는 몰라도 ‘폭력적’인 언행과 행동은 단 한 번이라도 절대 넘어가주지 않는다.


그러나 진오는 내게 단 한 번도 다른 아이들이 하는 ‘폭력적인 말과 행동’을 보인 적이 없었고, 오히려 예의가 바르며 감정을 절제할 줄 안다. 따라서 내게는 진오를 진오가 가진 다른 모습과 가능성들을 가릴만한 어떠한 이름으로도 규정 지을 권리가 없다.






진오가 먼저 그 이야기를 내게 꺼냈던 날이 지금도 생생하다. 수업을 시작하고 세 번째 만나는 날이었다. 그 ‘일’을 진오의 입으로 직접 들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갑작스러웠다.


나는 딱 세 마디를 건넸다. 그리고 그 이후로 우리는 서로 그 ‘일’에 대하여 다시는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때 진오 마음이 어땠어?”


“진오도 많이 놀랐겠다.”


“이제는 절대 그러면 안 돼.”






만약 내가 조금이라도 그 ‘사건’에 눈이 어두워져 진오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더라면 나는 이 순간들을 모두 놓쳤을 것이다.


이제 조금 친해진 선생님이 도착할 시간이 되어 선생님을 깜짝 놀라게 해주려고 맨발로 엘리베이터 앞에 나가 기다리는 마음

학교에서 “정의란 이런 것”이라는 제목의 책을 읽고, 선생님에게 빨리 이야기해 주고 싶은 마음

장애가 있는 같은 반 친구와 함께 물총싸움을 하고 싶은 마음

선생님이 읽어주는 책이 재미있어서 오늘 수업을 더 해달라고 조르는 마음

선생님에게 '공평'과 '공정'의 차이에 대해 그림을 그려가며 설명해 주고 싶은 마음


같은 것들을 말이다.




5

‘이런 부모 밑에는 이런 아이(부자가 되려면 고깃집을 하세요 참조)’에서 ‘이런’은 없었음을 한 차례 밝힌 바 있다. 적어도 내가 만난 아이들에게서는 “학교에서 ‘문제’가 된 적이 있는 아이는 ‘이러할’ 것이다.”에서 ‘이러할’이라는 틀 안에 넣어 단정할 만한 것은 없었다. 아이들은 그들의 사회에서 겪은 사건 하나만으로 특정한 이름으로 규정지어지고 그 안에서만 해석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


모든 경우를 아우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분명한 것은 이름은 우리의 눈을 흐릿하게 할 수 있다.

그 사건 하나 때문에 그‘때’의 아이들이 가지는 깊고 다양한 내면이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그대로 묻혀 버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아이들을 돌보아야 할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은 도덕적 윤리를 벗어나지 않는 날카로운 기준을 세우고, 스스로의 객관성과 예민함으로 아이들을 면밀히 관찰하고, 미처 몰랐던 새로운 사실을 발견해 나가는 것이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 위에서 ‘문제’는 그 ‘문제’의 주체가 되는 아이(가해자)와 연루된 아이(피해자) 모두의 입장에서의 ‘문제’를 뜻하는 것임을 분명하게 하고 싶다. 그 이유는 바로 다음 화에서 같은 반 학생들에게 정신적, 신체적 괴롭힘을 당한 아이에 대해서 다룰 예정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역시 “학교에서 ‘문제’가 된 적이 있는 아이는 ‘이러할’ 것이다.”라는 것은 폐기되어야 하는 가정임을 내게 보여준 아이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이 이야기에 대해서는 발행을 취소할 수도 있음을 미리 밝힌다.).


화요일 연재
이전 08화“재미없어요.”에 감춰진 진실